<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22화>
민주적 절차?
다수결을 하자고?
장철, 이세기. 자신. 셋이서?!
‘야, 이 미친……!!’
마혁진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키고 바로 확인했다.
“민주적 절차?”
“어, 민주적 절차.”
“다수결?”
“어, 다수결.”
묻는 즉시 바로바로 대답하는 이세기.
마혁진은 깊게 심호흡하고 다시 확인했다.
“장철, 너, 나. 세 명밖에 없는데 다수결이라고?”
“셋이니까 딱 맞지! 여기 기절한 청년 마혁진 깨어 있어서 넷이었으면 2대 2로 결론이 안 나잖아?”
“야, 그 말이 아니잖아! 너랑 장철이랑 아는 사이인데 다수결이 말이 되냐?!”
“뭔 소리야? 너랑 나도 아는 사이잖아? ‘염동 대협’ 별호도 내가 지어 준 거잖아? 그리고 장철 헌터님 마혁진 아시죠?”
“당연히 알지. 1세대 헌터 칠성파 보스 마혁진!”
“들었지? 우리 셋은 서로 아는 사이야. 즉, 다수결로 하는 게 공평하다는 거지!”
“그렇지. 맞아. 설득력 있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와 장철!
‘뭐 설득력이 있다고?!’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에 가슴이 검게 타들어 갔다.
‘장철, 이세기 이 미친놈들이!!’
예전의 자신이라면 당장 염동포탄부터 갈겼을 거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
신동대문 이래 온갖 난장판에서 개같이 구른 자신은 이 정도로 폭발하지 않는다!
이세기 하나도 버거운데 장철까지 있다!
흥분해선 안 된다.
절대로 흥분해선 안 된다!
논리와 이성으로 설득해야 한다!!
‘참을 忍忍忍忍忍……!’
마혁진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삼키며 머리를 쥐어짜 내 설득을 시작했다.
“이세기 너랑 장철. 두 사람은 특수 관계인이잖아?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이 특수 관계인데, 다수결로 하면 민주적 절차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야, 나랑 장철 헌터님. 공사 구분 못 하고 그런 사람 아냐!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할 거다! 그렇죠. 장철 헌터님?”
“당연하지! 큭-.”
대답하는 순간 다급히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는 장철!
애초에 자신한테는 말을 까면서, 장철한테는 꼬박꼬박 ‘님’을 붙이면서 객관적? 공정이라고?!
“새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쟤도 방금 웃었잖아! 장철도 웃었다고! 다수결! 절대 안 돼! 차라리 동전 던져!”
“동전 던져서 정하자고?”
이세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지? 뭔가 있나?!’
순간 들려오는 장철의 한숨 소리.
“하아- 이세기 이 녀석 우리 집 꼬맹이도 승부로 이겼다. 동전 던지기 하면 100% 네가 진다.”
“뭔 개구라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세기의 손에서 동전이 튕겨 올랐다.
팅, 핑그르르-
직선으로 허공을 지나 장철에게 날아가는 동전!
탁-
장철이 동전을 낚아채는 순간 확신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
활짝 펼친 장철의 손에 놓인 동전은 앞면이었다!
“한번은 누구나……!”
팅팅팅팅팅-
장철은 연속으로 동전을 튕겼고.
“앞뒤앞뒤앞…….”
이세기는 쉴 새 없이 외쳤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모조리 맞췄다!
“잠깐! 내가, 내가 해 볼게!”
팅팅, 팅팅팅팅-
옷깃으로 가리고, 역장으로 가속하고, 낚아채는 순간 잽싸게 뒤집었다.
그러나 무엇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앞앞, 앞앞뒤뒤-
이세기는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모조리 맞췄다.
‘어떻게 다 맞추는 거야?!’
경악한 마혁진은 동전을 낚아채는 순간 염동력으로 손바닥에 고정하고 내밀었다.
“하, 염동 새끼 잔머리는! 섰다!”
손을 펼치자 손바닥에 수직으로 서 있는 동전!
“…….”
마혁진은 동전에서 이세기, 장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득의양양한 웃음, 자랑스러운 기색, 놀람과 경악 그 무엇도 없었다.
장철과 이세기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여상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하긴 그 정도는 돼야 우리 집 꼬맹이를 이기지. 너 그거 어떻게 맞추는 거냐?”
“오컴의 면도날이죠.”
“오컴의 면도날?”
“가장 간단한 설명이 정답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가장 간단한 설명……?”
마혁진은 자신도 모르게 묻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광경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전투 예지 능력자!
꽝의 여신, 검은 폭풍 이세영!
비전투 상황에서 100% 빗나가는 이세영의 전투 예지와 같다!
다른 것은 하나 100% 적중한다는 것!
이세영은 1세대 헌터 중에서도 천외천!
5연발 리볼버 한 자루로 셀 수없이 많은 최상급 몬스터를 잡았고.
끝까지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서울 수복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세기가 그런 이세영과 동급의 전투 예지 능력자라고?!’
순간 신동대문 이래 이세기와 엮여서 굴렀던 기억들이 봇물 터지듯이 밀려왔다.
-신동대문 광장 깃발전!
-초거대 괴수 갑각 위 3인 결전!
-열사의 사막에서의 조우!
-거대 괴수와 나이트 아머가 뒤엉킨 부산!
-남중국 푸저우시 난장판에서의 만남!
-2004년 부산 칠성파 빌딩!
-이곳 세기말 대한민국 북한산까지!
언제나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난장판에서 구르고 있었다!
검은 폭풍 이세영이 가장 위험하고 치열한 전장에서 1세대 헌터과 함께 굴렀던 것처럼!
자신이 이세기와 싸워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전투 예지 능력자는 일대일 승부에서는 규격 외!
공식 탱커 랭커 1위, 비공식 대인전 랭커 1위인 철벽 이태성조차 이세영에게 패했으니까!
즉, 이세기 녀석은 무공 각성자가 아니라 무공과 전투 예지 다중 각성자다!
이세영처럼!
깨달음의 전율이 밀려오는 순간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누가 남을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할까? 아니면 제비를 뽑아도 좋고. 네가 골라. 장철 헌터님 괜찮으시죠?”
장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염동 네가 선택해라.”
“…….”
이세기와 장철의 담담한 얼굴에 담긴 자신감!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재앙급 마수와 맞닥뜨린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시바시바, 개시바! 그냥 뒤집어엎을까?!’
하지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건 장철이다!
게이트가 중첩해 열린 서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마수와 몬스터를 뚫고 게이트까지 피의 길을 열었던 강철 해머 장철!
1세대 헌터 중 최고의 돌파력을 지닌 육체 각성자!
게다가 옆에는 이세기가 있었다.
이세영과 이름마저 비슷한 대인전에선 규격 외의 초강자인 전투 예지 능력자가!
사면초가! 완전히 물렸다!
다수결, 제비뽑기, 뒤집어엎기.
그 무엇을 선택하건 결과는 같다!
“…….”
가슴속에서 훅훅 치솟은 열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을 때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뭐 해? 빨리 정해. 시계 소리 안 들려? 틱, 틱- 벌써 9시 도착했잖아?!”
‘시계 소리?!’
마혁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깨달았다.
2020년으로 돌아가는 방법, 회중시계는 자신의 손에 쥐여 있다!
그리고 반대쪽 손에는 마력폭풍을 유지하기 위한 보안키가 있다!
2020년으로 돌아갈 방법!
2000년에서 존버해야 하는 이유!
방법과 이유가 모두 자신의 손에 있다!
‘동귀어진! 최악의 경우 모두 같이 망하게 만드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마혁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장철을 봤다.
“장철 너 명예를 걸고……!”
장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고 웃음기 한점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철 해머의 명예를 걸고 사감 없이 공정하게 선택하겠다.”
마혁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다수결로 하자…….”
순식간에 종이를 나눠 이름을 적고 하나로 모았다.
모자 안에 담긴 접은 종이 셋!
이것으로 20년 존버의 주인공이 정해진다!
그리고 2표를 받을 존버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이 중요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회중시계를 인질 삼아……!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릴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 안 하고 뭐 해? 내가 확인할까?”
“내가 확인한다!”
마혁진은 모자 안으로 떨리는 손을 넣어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장철]
“…….”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멍하니 종이를 바라보다 다급히 다음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이세기]
“……!”
마혁진의 경악한 시선이 장철과 이세기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처음 여상한 얼굴 그대로 담담하게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었다.
마치, 결과를 알고 있던 것처럼!
* * *
“너희…….”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설마, 설마……?”
멍하니 장철과 이세기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할 때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동. 마지막 한 장 확인해야지?”
마혁진은 대답하지도 종이를 펼치지도 못했다.
모자 안에 남겨진 마지막 한 장의 종이는 딱지처럼 접혀 있었으니까.
만약을 위해 딱지 모양으로 접어 둔 자신의 종이.
“…….”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피식 웃은 이세기의 손이 모자를 향해 다가왔다.
“잠깐…… 실수! 실수가 있었어! 이거 무효야! 처음부터 다시……!”
다급히 모자를 낚아채며 외쳤지만, 이세기의 손끝이 모자를 스치는 순간.
딱지는 공중으로 튕겨 올라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이세기의 손바닥에!
“야, 보지 마! 무효……!”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종이는 펼쳐지고 이름 세 글자가 보였다.
[이세기]
“이세기. 2표. 내가 당첨이다.”
이세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염동 수고했다. 잘 가라. 태성 길드 블랙리스트는 장철 헌터님이 해결해 주실 거다. 장철 헌터님 세연이랑 특급 헌터에게 잘 말해 주세요.”
“처음부터…….”
마혁진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할 때.
장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말은 못 전해 줄 거 같다.”
“네?”
이세기가 반문하는 순간.
장철은 이름이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비볐다.
파스스슥-
가루가 된 종이가 흩날릴 때.
장철은 웃는 목소리로 폭탄을 터트렸다.
“여기에 내 딸이 있다. 당연히 내가 남아야지.”
* * *
넋이 나간 듯한 마혁진.
깜짝 놀라 자신을 보는 이세기.
바라보고만 있어도 웃게 되는 불가능한 위업을 이뤄낸 동료들이다.
이제 자신이 마무리를 지을 때다.
‘여기에 내 딸이 있다. 당연히 내가 남아야지.’
장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남는다고 장세린과 함께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세계의 세린이는 잘못된 선택으로 영원히 잃어버린 자신의 딸이 아니고.
이 세계에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은 장철, 세린이의 아빠가 있었으니까.
장철은 노을에 물든 북한산 너머 서울을 바라봤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기말 대한민국을 재현하는 던전에 들어와 세린이를 만나 운명을 바꿨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
20년 전 회사원 장철이 알지 못했던 것들을 20년 후 헌터 장철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선택하고, 손을 더럽히고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살아야 한다.
선택의 순간을 회피하면 자신 뒤에 자리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
내 딸 세린이가.
내 동생 장민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의 의무는 그런 것이다.
가족을,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
너무나 소중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이 모든 것을 알게 됐다.
헌터 장철은 이제 선택할 준비가 됐다.
그렇기에 자신은 이 세계에 남아야 했다.
세린이의 아빠는 될 수 없지만, 가끔 보는 친한 아저씨는 될 수 있으니까.
장철은 웃었다.
던전은 현상을 비추는 그림자, 눈 뜬 채 꾸는 꿈, 허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이 손에 놓였던 깃털 같은 가벼운 몸과 따뜻하게 스며드는 체온.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그 웃음, 목소리 하나까지 모든 것이 진짜라는 것을.
아니 이 모든 게 허상, 꿈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허상을 현실로 만들 방법을 찾았으니까.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은 현실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장철은 넋을 놓은 마혁진에게 성큼 다가가 보안키를 잡았다.
“마혁진. 아니 염동 대협. 넌 진짜 대협이었다. 1세대 헌터의 이름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함께 싸워 영광이었다.”
“너…….”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가며 생각했다.
이제 곧 게이트 전쟁이 시작된다.
게이트 전쟁 그 치열한 시대의 파고에서 가족을 지키는 아빠, 오빠, 가족은 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름은 상관없었다.
너무나 바라던 당연한 그 일을 드디어 할 수 있었으니까.
이 모든 것이 조카가 키즈카페에서 만난 한 청년 덕분에 가능했다.
바로 자신 앞, 말을 잇지 못하는 청년.
알바, 천문석, 이세기!
장철은 이세기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장민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전해 주라. 특급 헌터에게는 나 대신 한우 선물 세트 부탁하고. 이 모든 것 정말 고마웠다. 이세기.”
그리고 확신을 담아 다시 한번 말했다.
“세기말 대한민국에는 내가 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