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15화 (1,216/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15화>

“…….”

키즈 카페에서 수없이 봤던 너무나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수십 명의 꼬맹이가 달라붙어 너도 한입, 나도 한입!

와작, 와작- 깨지고.

핥짝, 핥짝- 닳아 버린.

커다란 사탕!

천강흔 랜덤 박스의 봉인이 꼬맹이가 정신없이 깨트리고 핥아 먹은 사탕처럼 닳아 있었다!

“……!”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에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오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다른 곳도 아닌 영육과 혼백의 사이, 심상 공간에 있는 천강흔 랜덤 박스의 봉인이 닳아 버렸다!

요괴선, 마선, 마불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누가? 언제 이렇게 된 거야?!’

스스로에게 외치는 순간 깨달았다.

서초구에서 깨어난 후 북한산까지!

오늘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내력을 뽑아 썼다!

자신도 모르게 천강흔 랜덤 박스에서 흘러나온 힘을 사용한 거다!

즉, 봉인이 깨진 건 오늘 일어난 일이 아니다!

‘언제 봉인이 깨진 거지?!’

2004년 부산!

2000년 4월 서초구 빌딩!

이상한 숲과 더 이상한 꼬맹이!

2000년 1월 2일 세기말 대한민국!

빠르게 머릿속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봉인이 깨진 기억은 없다!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설마……?!’

천문석은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선연에는 마장이 따르는 법!

‘하늘님? 이게 대가입니까?!’

언제나 그렇듯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것이 대답을 대신했다.

천천히 떠오르는 그림자 마수.

손에 쥐어진 워커 실트의 회중시계.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가고,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다.

천검 이세기, 천마 천문석급의 절대 강자가 있어야 한다.

갑자기 허공에서 초인경의 강자가 뚝 떨어질 리 없으니, 자신이 천강흔 랜덤 박스를 열고 초인경의 강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30퍼센트의 리스크?

천강흔 랜덤 박스의 봉인이 깨지기 전의 이야기!

깨진 사탕처럼 닳아 버린 지금 상태라면 초절정에 오르는 순간 천강흔 랜덤 박스는 100% 열린다.

그리고 99% 인과를 거스르는 역천의 마물 천마신공이 튀어나온다.

99%의 리스크!

이미 이건 도박도 아니다. 몸에 기름을 붓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열지 않을 수도 없다.

둥실, 둥실-

그림자 마수는 여전히 느릿느릿 각성력의 태양을 향해 떠오르고!

틱-

워커 실트의 회중시계 초침은 또다시 한 칸 전진했으니까!

이러다 2020년으로 튕겨 나가면?

엉망진창 난장판이 된다.

아니 난장판 그 이상이다.

난장판을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까!

‘생각해라! 생각해!’

천문석은 사고 가속 상태에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외통수에 걸려 버렸다.

그냥 있어도 망하고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그림자 마수를 해결해도 망한다.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

자신과 장철, 마혁진. 셋이 같이 망하느냐, 자신 혼자 망하느냐 뿐이다!

‘하, 인생!’

탄식과 함께 사고 가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불현듯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방법 있는 거 알고 있잖아?’

마음을 바라보는 순간 소리는 이어졌다.

‘제3의 선택. 워커 실트의 회중시계로 그냥 2020년으로 돌아간다.’

‘나비……!’

반박하기도 전에 웃음기 어린 마음의 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하루 그 모든 것을 해 놓고 이제 와서 나비 효과?’

‘이미 알고 있잖아? 던전은 현상을 비추는 수면, 허상일 뿐.’

‘허상을 위해서 천강흔 랜덤 박스를 열고 초절정에 오르겠다고?’

‘그토록 벗어나길 원했던 마공, 천마신공에 다시 입문한다고?’

‘마공의 결말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당연히 결말을 알고 있다.

마공의 끝은 파멸뿐.

천마신공 또한 그 끝이 다르진 않다.

천마신공의 업이 극을 넘어 그릇에서 넘쳐흐르는 순간.

그 불꽃에 마음이 타 버린 인형이 되거나, 폭풍처럼 끓어오른 칠정에 먹힌 광인이 된다.

불타 재가 된 나무를 되살릴 수 없듯이 마공은 한번 입문하면 끝이다.

그 무엇으로도 마공의 업을 벗을 수는 없다.

마도 18문을 넘어 고금에 유례없는 절대 강자.

전생 천마 천문석 자신조차 마공의 업을 벗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은 결론은 천강의 불꽃으로 마업(魔業)을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림자 마수를 저지하고 마력 폭풍을 지켜 이 세계를 구한다고 해도 결말은 전생과 같다.

천강의 불꽃에 한 줌 잿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류세연, 특급 헌터, 철수형, 장민 대표, 임옥분 여사님…….

현생 알바 천문석이 아는 모두가 있는 2020년이 아닌 던전 속 2000년에서.

지금 마음의 목소리는 묻고 있었다.

‘허상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

세기말 대한민국에 떨어진 건 벌써 2번째였다.

여전히 이 세계가 허상인지, 과거인지, 평행 세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다.

-어린 조카를 지키기 위해 부엌칼 창을 겨누던 중학생 소녀.

-자신의 보물, 소중한 곰 인형을 선물로 건네준 아이.

-배달 오토바이로 거대 괴수를 유인해 달린 학생.

-몬스터를 막기 위해 저지선을 펼치고 끝까지 싸운 군인들.

……

자신이 만난 사람들은 허상이 아니었다.

이들 모두는 살아 숨 쉬고 웃고 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느껴진다.

휘파람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와.

붉은 노을을 드리우는 각성력의 태양이.

천문석은 웃었다.

천마신공에 다시 입문하면서까지 허상일지도 모르는 2000년 이 세계를 구해야 하냐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재의 기사와 김철수가 한 대답이 세상에 가득했으니까!

재의 기사는 스스로의 본질을 태워 서약의 불꽃을 만들었고.

김철수는 힘을 깎아내 마력 폭풍을 일으키고, 명운을 태운 절멸의 빛으로 그림자와 몬스터 웨이브를 지워 버렸다.

김철수와 재의 기사는 게이트 전쟁이라는 긴 어둠을 밝힐 불꽃을 피워 올렸다.

말도 약속도 없었다.

하지만 김철수와 재의 기사가 스스로를 태워 빛을 밝힌 순간 결정됐다.

자신이 김철수와 재의 기사가 피어올린 불꽃을 지켜야 한다.

이건 의무감도 책임감도 아니었다.

비가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고.

생명이 자라나듯.

너무나 당연한 당위(當爲)!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천강흔 랜덤 박스의 봉인이 깨졌어도 변한 건 없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다!’

천문석은 멈췄던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탓-

발을 내딛는 순간 심상 공간에서 꼬리를 물고 회전하는 일기공과 일원공의 내력이 올올히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천문석은 천기와 용맥을 향해 뜻을 뻗으며 생각했다.

자연에 정체란 없으니.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 다시 다른 생명을 키워 낸다.

선악도 도덕도 없는 자연의 순환이자 거대한 흐름.

무공 또한 마찬가지!

영육에 쌓아 올리고, 혼백에 새겨지는 진정한 무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정체란 곧 퇴보!

끝없이 나아가 비상하느냐.

제자리에 멈춰 서 추락하느냐.

비상과 추락 둘 중 하나일 뿐 중간은 없다!

일기일원공도 마찬가지였다.

천강흔에 발목이 잡힌 채 지금 같은 어중간한 상태로 영원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야 했다.

결국, 천강흔 랜덤 박스를 열어야 할 때가 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공에 입문하는 순간 무인이 짊어지는 숙명이었다.

영락한 마신!

경지를 넘은 요괴선!

인과에서 도망친 마불!

……

극을 넘어선 강자!

재앙과도 같은 존재와의 격전에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천강흔 랜덤 박스를 열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

천문석은 하늘을 바라봤다.

확연히 작아진 각성력의 태양 아래로 보였다.

여전히 초지일관, 둥실둥실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는 그림자 마수.

저 그림자 마수가 자신이 랜덤 박스를 열고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이유였다.

‘원거리 공격이 안 돼서!’

하늘 높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그림자 마수를 저지할 수단이 없어서 천강흔 랜덤 박스를 열고 초절정에 오르게 됐다!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상황이지만 괜찮다.

원래 삶은 예측불허.

뜻밖의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법이니까.

피식 웃는 순간 두근- 느낌이 왔다!

올올이 풀려나온 일원공이 하늘에 세워지고, 일기공이 대지에 스며들었다.

붉은 노을에 가려진 별빛이 쏟아지고, 단단한 대지 아래 숨겨진 거대한 맥동이 느껴졌다.

하늘의 인력과 대지의 속삭임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다.’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돌려 장철 헌터를 봤다.

“특급 헌터랑 세연이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갑자기 무슨……?”

천문석은 대답 없이 마혁진을 봤다.

“마혁진…….”

“새캬! 갑자기 목소리는 왜 깔아?! 내가 계속 말했잖아! 사고 터질 거 같다고! 너 재수 없다고! 내 말이 맞았잖아! 시바시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으아아악-.”

분통을 터트리며 괴성을 지르는 마혁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악연으로 시작된 관계는 악연으로 끝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틀렸다.

신동대문에서, 열사의 사막에서, 부산에서, 남중국에서.

그리고 2004년 부산을 지나 이곳 세기말 대한민국까지.

그 시작은 악연이었지만 수많은 난장판에서 같이 구르며 관계가 변했다.

적으로 시작해 고용주를 거쳐 이제 친구가 됐다.

사람은 바뀔 수 있었다.

깡패 두목 마혁진은 없다.

염동 대협 마혁진만 있었다.

천문석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염동 대협 마혁진 그동안 고마웠다.”

“새꺄! 개같이 망했는데 뭐가 고마……!!”

분통을 터트리던 마혁진은 생경한 감각에 문득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손에 쥐어진 회중시계!

2020년 대한민국,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자신의 손에 있었다!

“어, 어? 이걸 왜?”

“회중시계?! 너 뭘 하려고……!”

마혁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장철의 경악한 외침이 터지는 순간.

“여기는 제가 정리할 테니까. 먼저 가세요.”

천문석은 씩 한번 웃고 몸을 돌렸다.

“……!”

“……!”

장철과 마혁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야!”

“잠깐만……!”

두 사람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 동시에.

천문석의 발이 성큼 암반을 밟았다.

뻗은 손은 허공을 가르고.

천문석의 존재감은 멀어졌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아득한 하늘의 별처럼!

*   *   *

용맥의 흐름을 밟고 천기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나타났다.

모든 무림인이 꿈에라도 그 앞에 서기를 바라는 벽.

초절정의 벽!

이 벽 앞에 서는 무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인 중에서도 한 줌.

그 한 줌의 무인 중에서도 이 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렇기에 이 벽은 생사가 갈리는 관문, 생사현관이라 불렸고.

이 벽을 넘은 초인경의 고수는 천하십절이라 칭했다.

천문석은 생사현관을 향해 무심히 발을 내디뎠다.

오를 승(昇)!

새가 상승기류를 타고 비상하듯 너무나 간단하게 초절정의 벽에 올랐다.

이제 한 걸음만 내디디면 모든 게 결정된다.

비상하거나 추락하거나!

그러나 흥분도 감흥도 없었다.

이미 한번 지나갔던 길, 이뤘던 경지 앞에 다시 선 것뿐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천문석은 지권인의 수인을 짚어 지혜의 륜을 띄운 채 심상 공간을 관조했다.

꼬리를 물고 소용돌이치던 일기공과 일원공이 사라진 심상 공간의 중심!

꼬맹이가 깨뜨려 먹은 사탕처럼 곳곳이 깨지고 닳아 버린 천강흔 랜덤 박스 봉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두두둥-

마음이 닿는 순간 천강흔 랜덤 박스가 맥동하고.

머릿속에서 랜덤 박스 뽑기 BGM이 울려 퍼졌다.

천문석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99%는 천마신공이다!

이건 역으로 말하면 1%의 천마신공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1퍼센트!

백에 하나!

현실에서는 너무나 미약한 수치다.

그러나 냉혹한 가챠, 뽑기, 랜덤 박스의 세계에서 1%는 모든 것!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승부할 만 한 숫자다!

‘하늘님 땅님! 천지신명! 원시천존! 부처님! 제발, 제발, 제발!!’

천문석은 어린 류세연의 세뱃돈을 몰빵했던 그 날처럼 모든 마음을 담아 간절히 바랐다.

빠빠빠빵-!

영혼육백 존재의 본질을 흔드는 거대한 울림과 함께 천강흔 랜덤 박스가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