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02화>
서약의 불꽃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롱소드.
마력 폭풍을 터트리기 위한 마지막 조각이 준비됐다.
“…….”
김철수는 롱소드를 들어 올린 기사를 바라봤다.
하이브리온의 의지를 잇고.
칠성검, 검성의 검술을 사용하고.
롱소드, 자신이 건네준 검을 가지고 있다.
분명 하이브리온의 기사가 맞다.
그러나 처음 제국의 깃발을 세웠을 때부터 승천의식으로 지구로 돌아올 때까지.
하이브리온 가문의 기사는 단 한 명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 속에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적금발의 여기사는 없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이브리온 가문의 기사가 지구에 나타났다.
그것도 빛바랜 갑옷을 입고 영육을 불사르는 불의 서약을 한 재의 기사가 되어!
가능한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다.
자신이 떠난 후의 타대륙, 제국에 무언가 일이 생겼다!
“제국은 어떻게 됐냐?”
[…….]
“불의 서약으로 묶여 있는 거냐?”
[…….]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약의 불꽃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롱소드를 들어 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아인종, 수인족…… 수많은 사람이 문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기 위해 그 피와 생명을 바쳤던 것처럼!
“…….”
김철수는 선뜻 롱소드에 손을 뻗지 못했다.
이 롱소드에 담긴 서약의 불꽃은 재의 기사의 생명 그 자체다.
처음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화약을 터트리는 데는 작은 성냥불이면 충분하듯.
각성력의 씨앗을 터트리기 위해 재의 기사에게서 작은 불꽃만 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수백 년은 지난 듯 빛바랜 갑옷과 검.
재의 기사에게는 서약의 불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남은 혼과 백을 태워 만들어 낸 서약의 불꽃을 검에 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롱소드에 담긴 서약의 불꽃은 기사의 명운이다.
이 롱소드에 담긴 명운, 서약의 불꽃으로 마력 폭풍을 일으키면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힘과 기억, 쌓아 올린 모든 업을 잃고 흐름으로 돌아가게 된다.
누군가의 희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자기 자신!
그렇기에 김철수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하이브리온의 기사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서약의 불꽃으로 각성력의 씨앗을 터트리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 업과 명운을 잃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
기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눈빛과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를 보는 순간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기꺼이!’
고대의 악과 허신, 초월종, 암흑 제국의 어둠이 드리워진 타대륙에 작은 촛불을 피어올렸던 하이브리온 가문의 가훈.
‘인류를 지킨다.’
그 대의를 마도 제국의 대의로 삼겠다는 약속만으로 하이브리온의 이름을 이은 할머니가, 아버지가, 아들과 딸들이 그 피를 뿌리고 생명을 바쳤다.
그리고 지금 타 대륙이 아닌 이세계 지구에서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불의 서약으로 영육을 태워 재의 기사가 되어도 하이브리온은 하이브리온!
그 이름에 새겨진 맹세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더 물을 필요는 없다.
“이세기. 그 롱소드를 받아라. 마력 폭풍을 터트린다.”
* * *
천문석은 빛으로 타오르는 롱소드를 잡았다.
순간 심상 공간으로 열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한순간에 재가 될 듯 엄청난 화력!
그러나 오욕칠정을 태우는 천마의 불꽃으로 극에 올랐던 천문석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괜찮냐? 버틸 수 있겠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한다!”
김철수는 큐브를 꺼내 천천히 마력을 밀어 넣었다.
수많은 직선과 곡선, 원과 도형이 표면에 새겨진 한 면이 3x3, 9칸으로 나뉜 정육면체 큐브, 머릿돌!
겉으로 보이는 큐브는 통제 장치이자 금고이고, 진짜 머릿돌은 큐브 안에 들어 있었다!
원대륙의 절대자가 놀러 갔다가 우연히 찾았다는 어둠을 뭉친듯한 검은 보석, 제트!
제트가 바로 진짜 머릿돌이다.
원래라면 큐브의 보안 마법 회로 때문에 큐브를 열지 않으면 머릿돌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이 큐브는 보안 마법 회로가 해제된 상태였다!
게다가 서약의 불꽃을 뽑아내기 위한 준비도 필요 없어졌다.
‘바로 서약의 불꽃을 쏘아 올려 마력 폭풍을 터트린다!’
김철수는 마력을 밀어 넣은 큐브를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단숨에 10여 미터를 날아올라 무언가에 잡힌 듯 큐브가 공중에 멈춰 서는 순간 딱- 손가락을 튕겼다.
차르르르륵-
이 순간 3x3 정육면체 큐브 표면의 선과 곡선, 도형이 황금색으로 물들고 빠르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김철수는 한 손에 초고순도 정제 마석을 쥐고 다른 손으로 수인을 짚고 파문을 일으켰다.
파스스스스-
초고순도 정제 마석의 마력이 수인을 거쳐 물결치는 듯한 파문으로 변해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이 파문이 큐브에 닿는 순간 변화가 시작됐다.
파파파파팟-
마력 불꽃이 튀어 오르고 큐브 표면, 2차원의 공간에서 맞물려 돌아가던 황금색 선과 곡선, 도형이 3차원의 공간 허공으로 튀어나왔다!
폭발하듯 허공을 가로지르는 황금빛 직선과 곡선, 온갖 도형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을 이뤘다.
그리고 면과 면이 쌓여 입체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2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빛의 마력 회로가 그려지고 그 위로 다시 마력 회로가 그려졌다.
1층, 2층, 3층, 4층……!
대형 빌딩을 짓듯 마력 회로가 엄청난 속도로 층층이 쌓이기 시작했다!
* * *
“……!”
“……!”
숲 곳곳에 자리한 모두는 경외 어린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천문석도 마찬가지였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에 직경 20미터가 넘어가는 황금빛 마력 회로가 생겨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위로 계속 쌓여 올라가고 있다.
1세대 마력 각성자 추이린이라도 불가능한 위용!
김철수는 아이가 장난감 블록을 쌓는 것처럼 순식간에 마력 회로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과연 초월자!
천문석은 새삼 아니 처음으로 감탄했다.
몰래 숨어 돌멩이를 던지고!
뽀미와 뒤엉켜 구르며 드잡이질하고!
만들지도 않은 회사 지분 계약서를 내밀고!
뭘 하려고 계획만 세워도 줄줄이 문제가 터졌다!
초월자 김철수는 뭐든지 잘하는데 어째선지 계속 사건이 터지는 불운한 철수 형과 너무나 비슷했다.
잘생긴 얼굴과 엄청난 마력만 빼면 철수 형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새 초월자라는 건 잊고 그냥 친구, 동료처럼 대했다.
지금 새삼 깨달았다.
김철수는 진짜 초월자가 맞았다!
직경 20미터가 넘는 마법 회로가 벌써 15층이 넘게 쌓였다!
1세대 마력 각성자! 아니 재금 연구소의 모든 마력 각성자를 동원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김철수는 이 불가능한 일을 정제 마석과 큐브 하나만으로 해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김철수가 만든다는 회사가 갑자기 끌렸다.
‘혹시 모르니 지금이라도 지분 계약서 달라고 할까? 이 정도 능력이면 진짜 20년 후에는 엄청난 성공…… 어, 잠깐?!’
이 순간 번쩍 무언가 머리를 스치고 생각이 날락말락 간질간질거리는 뇌리!
뭔가 놓쳤다!
‘뭐지?! 김철수? 초월자 김철수? 검은 로브 김철수?!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머리가 불꽃을 튀기며 돌아갈 때 문득 상념을 끊어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세기! 준비 다 끝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허공에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빛의 탑! 마력 회로가 완성된 모습이 보였다.
우선 마력 폭풍부터!
천문석은 바로 질문했다.
“뭘 하면 되냐?”
“간단해. 저기 마력 회로 중앙 평평한 바위 보이지? 거기 서서 마력 회로 올려다보면 십자 표시 보일 거다. 마력 폭풍 터질 때까지 롱소드로 그 십자 표시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바로 마력 폭풍을 터트리고 의문을 풀고 집으로 돌아간다.’
“알았어! 바로 시작할게! 지금 시작할 겁니다!”
천문석은 장철과 마혁진, 몸을 숨긴 사람들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신호하고, 석상처럼 우뚝 선 채 허공을 바로는 재의 기사를 봤다.
“고맙다. 그 갑옷은 미안하다.”
[…….]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가 마력 회로 중앙 평평한 바위 위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우물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듯, 거대한 원통형 마력 회로 너머로 노을이 사라지고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이 하늘의 한가운데 ‘十’ 표시가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한다!”
천문석은 재의 기사의 롱소드로 ‘十’ 표시를 가리켰다.
위이이이잉-
이 순간 거대한 빛의 탑, 3차원 적층 마력 회로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원통의 중심에서 인력이 느껴졌다!
롱소드 검신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인력에 끌려 첨단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끝이 막힌 주사기를 누르듯 압력이 폭증하고, 한점에 집중된 불꽃이 백광을 쏟아 냈다!
김철수가 몇 번이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심상을 넘어 현상의 육체에 쏟아지는 엄청난 열기!
서약의 불꽃은 영혼육백 존재의 본질을 태우는 천강의 불꽃을 닮았다!
천문석은 심상 공간에 방벽을 세우고 육체에 내력의 벽을 세우고 외쳤다.
“오래 버티지 못해!”
“거의 다 됐어! 7초! 아니 5초만 버텨! 3, 2, 1 됐다!”
이 순간 쩡- 롱소드 첨단에서 새하얀 불꽃이 튀어나왔다.
휘이, 휘이이-
새하얀 불꽃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천천히 원을 그리며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十’ 표시에 닿는 순간.
쾅-!
굉음과 함께 천공을 향해 쏘아졌다!
마치 장막을 걷어 내듯 어둠이 내리던 북한산에 다시 노을이 생겨나고.
그 노을의 중심, 아득한 천공에 거대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태양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힘! 허신, 마신조차 찰나에 태워 버릴 극에 달한 힘이 느껴졌다!
너무나 익숙한 힘이!
‘이 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경악한두 사람이 보였다.
장철 헌터와 염동 대협 마혁진!
각성력!
그렇다! 각성력이다!
아득한 천공에 숨겨져 있던 태양에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각성력이 담겨 있었다!
‘어둠을 가르고 천공으로 쏘아진 서약의 불꽃이 각성력의 태양에 닿는 순간 마력 폭풍이 몰아친다!’
천문석은 이 순간 깨달았다.
김철수가 초월자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던 이유를!
2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각성자를 탄생시킨 마력 폭풍이 무엇인지를!
김철수는 하늘의 인과조차 비트는 전지와 전능에 닿은 진정한 초월자가 맞았다.
마력 폭풍은 초월자 김철수가 수십억 인류에게 전한 선물이었다!
* * *
[…….]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어둠을 가르고 아득한 천공의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서약의 불꽃을 바라봤다.
수없이 들었던 제국이 태어난 순간.
지상에서 쏘아진 최초의 마탑의 빛이 하늘과 이어졌던 그 날이 이러했을까?
‘인류를 지킨다.’
마도왕들의 마탑 전쟁으로 마도 제국의 대의가 무너졌을 때.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족…… 모든 지성체, 인류의 약속 대협약은 깨졌다.
대협약이 깨지는 순간 마도 황제의 두 상징, 보석과 강철은 힘을 잃었다.
보석, 무한한 마력을 주던 마탑의 빛이 꺼지고.
강철, 악을 찢어발기던 강철의 기사 타이탄의 엔진이 멈췄다.
마도왕들의 마탑 전쟁은 그때가 돼서야 끝났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마경으로 밀어낸 악신과 허신, 초월종이 대륙에 돌아왔다.
마법과 타이탄을 잃은 마도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대륙에 밝힌 찬란한 문명의 불꽃은 꺼졌다.
일개 기사인 자신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의 서약을 하고 재의 기사가 됐다.
이름과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문명의 불꽃을 지켜 낼 수많은 기사를 길러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너무나 만족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하게 됐다.
타 대륙의 어둠을 걷어 내고 문명의 불꽃을 밝히신 보석과 강철의 황제 폐하.
그분을 직접 만나 다른 세계의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이브리온의 이름에 걸맞은 너무나 만족스러운 마무리다.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아득한 천공으로 나아가는 서약의 불꽃을 바라보며 노래했다.
북부 대산맥에서.
바람 사막을 건너.
판타나우 대습지 너머.
폭풍해의 파도에 닿을 때까지.
죽음으로 길을 열어 준 전우들에게 바치는 진혼가이자, 전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류의 지평을 넓히며 불렀던 진군가.
진혼진군가(鎭魂進軍歌).
영육이 불타고, 이름과 기억 대부분을 잊었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진군한다-]
[죽어 버린 전우여-]
[그대의 검혼은 흩날리고-]
[빛나는 무훈은 바래져도-]
[우리는 진군한다-]
[죽어 버린 전우여-]
[북부 대산맥의 최고봉에서-]
[폭풍해의 바다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진군한다-]
[죽어 버린 전우여-]
……
휘이잉, 휘이이잉-
이름을 잊은 기사의 노랫소리가 휘파람 소리를 닮은 바람이 되어 울려 퍼지고.
파스스스-
구멍 난 전신 갑옷에서 흘러나온 불티와 새하얀 잿가루가 바람에 실려 흩날렸다.
북한산 능선과 계곡 너머 환하게 문명의 불꽃을 밝힌 도시, 서울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