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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01화 (1,202/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01화>

바위 위에 우뚝 선 검은 로브.

그 앞에 무릎 꿇은 전신 갑주의 기사.

그리고 울려 퍼진 경외 어린 외침에 숲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

김철수는 한참 동안 재의 기사를 바라보다 손을 움직였다.

왼손의 정제 마석에서 마력광이 흘러나오고, 오른손의 수인에서 물결치듯 파문이 퍼져 나왔다.

파스스스스-

파문이 퍼져 나오는 오른손이 무릎 꿇은 재의 기사의 머리로 향했다.

재의 기사의 머리를 감싼 어둠이 돌멩이를 던진 호수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인을 짚은 손이 어둠에 닿는 순간.

팟-

어둠은 물방울이 터지듯 사라지고 감춰진 얼굴이 드러났다.

도자기 같은 피부.

곧은 눈썹과 붉은 눈.

불티를 흩날리는 적금색의 머리카락.

선이 가는 얼굴에 담긴 강철 같은 신념!

스무 살 남짓.

아름답다기보다는 늠름한 여기사.

“제국 기사.”

쾅-

재의 기사는 롱소드를 바위에 박아 넣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섬전 같은 눈빛이 날아오는 순간.

김철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검, 타이탄 나이트.”

쿵, 쿵-

재의 기사는 마치 대답하듯 강철 건틀릿으로 땅을 두 번 두들기고 깊이 고개 숙였다.

기사가 황제 앞에서 충성 맹세를 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이 순간 김철수의 머릿속에선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파파파팟-

불꽃이 튀고 찰나의 순간 수백 가지 생각이 이어진다.

‘……!!’

지구로 귀환한 후 개같이 고생하길 몇 달!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2000년 1월 2일 세기말 대한민국!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었다.

보석과 강철의 황제!

생각지도 못한 존재에게서!

재의 기사!

어둠의 장막을 찢고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마도 제국의 기사라는 걸 알아봤다.

허공에 그려진 열십자 불꽃은 제국 기사, 그중에서도 타이탄 나이트의 군례였으니까!

문제는 그 뒤에 울려 퍼진 사념파다!

‘보석과 강철의 황제 폐하!’

눈앞의 제국 기사는 자신을 정확히 보석과 강철의 황제라고 불렀다.

자신을 ‘보석과 강철의 황제’라고 부른 것!

그게 바로 문제였다!

타 대륙도 아닌 이세계에서 보석과 강철의 황제를 만났다.

경의를 바친 제국 기사가 다음에 할 일은 뻔했다.

‘진짜 보석과 강철의 황제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강철의 기사, 타이탄으로 타 대륙에 가득한 악신, 허신, 초월종을 갈아버린 제국 기사, 타이탄 나이트!

신성에 닿은 악신, 허신, 초월종과 싸운 타이탄 나이트는 뼛속까지 의심을 새긴다.

초월종이 마도 황제로 위장해 기사를 타락으로 유도하고 타이탄을 노린 건 수없이 일어난 일이니까!

자신이 진짜 마도 황제인지 확인하는 건 필수 절차다.

당연히 보석과 강철의 황제의 두 상징!

돌과 철! 최초의 머릿돌과 타이탄 강철을 확인하려 할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 최초의 머릿돌과 타이탄 강철은 없다.

당연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구르는 이유가 잃어버린 돌과 철을 회수하고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였으니까!

자신이 마도 황제라는 걸 증명할 최초의 머릿돌과 강철을 분실하고 기억마저 구멍이 뻥뻥 뚫린 상황.

재의 기사는 자신을 알아보고 군례까지 올렸는데, 정작 군례를 받은 자신은 재의 기사가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스스로의 이름까지 잊은 채 김철수란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타이탄 나이트를 잃고 본인의 이름까지 잊은 마도 황제라고?

자신이라도 가짜라고 생각할 거다!

여행 중 경찰을 만났는데, 여권을 잃어버린 채 이름까지 까먹어 불법 체류자로 의심받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경찰이 더럽게 끈질긴 제국 기사 중에서도 독종!

대륙전쟁에서 악신과 허신, 초월종과 싸운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타이탄 나이트라는 것이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경외와 충성, 신의를 외쳤다고 절대 착각해선 안 된다.

저 경외와 충성, 신의는 ‘김철수’가 아닌 ‘마도 황제’에게 바친 것이다!

자신이 마도 황제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날리고 최후의 순간에는 자폭까지 할 게 분명하다!

재의 기사가 자폭하는 순간 자신, 천검 이세기와 동료들, 뽀미 그리고 마력 폭풍까지 모든 게 끝장난다!

불의 서약을 뽑아낼 재의 기사가 자폭도 서슴지 않는 제국 기사, 핵폭탄으로 밝혀진 상황!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생각해라! 생각해! 누군지 떠올려라!’

김철수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제국 기사가 왜 불의 서약을 하고 재의 기사가 된 거야? 아니 그보다 지구에는 어떻게 나타난 거야? 설마 내 뒤를 쫓았냐?! 그럴 리가! 제국에선 내가 빛의 길을 올라 승천한 줄 알고 있을 텐데?! 앗! 워커 실트! 설마 워커 녀석이 사고를 쳐서 차원 수배가 떨어진 건가? 그럴 리가! 워커 녀석이 내 친구인 건 군단장, 마도왕 중에는 모르는 녀석이 없는데?! 전능 옥좌라도 날려 버린 게 아니라면 차원 수배가 떨어질 리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름은커녕 단서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만 줄줄이 이어졌다!

원인 불명의 사고로 세계의 나무에 새겨넣은 자신의 이름마저 까먹었다.

타이탄 나이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대놓고 누구인지 물어볼까?!’

힐끗 시선을 내리자 느껴졌다.

[…….]

바위에 박힌 롱소드 뒤!

미동도 하지 않은 재의 기사의 돌처럼 단단한 신념이!

타이탄 나이트의 신념은 양날의 검이다.

마도 황제라는 걸 증명하는 순간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낌새만 느껴도 자신에게 검을 날릴 거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머릿돌과 정제 마석, 천검 이세기라면 재의 기사를 제압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제압당한 재의 기사, 제국 기사의 선택은 하나뿐이다.

자폭!

어떻게든 제국 기사의 이름을 기억해 진짜 마도 황제란 확신을 주고 서약의 불꽃을 얻어 내야 한다!

‘시바, 시바시바! 생각나라! 생각나!’

김철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억을 쥐어 짜낼 때.

숲 곳곳에선 경외 어린 시선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도의 신?”

“황제 폐하라고?!”

“광화문 게이트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당연히 이유가 있어야지!”

“드디어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통신은 아직인가? 이 정보를 당장 전해야 한다!”

“바로 접촉하는 게 어떨까요?!”

“분위기가 우호적입니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 몸을 들썩이며 밝은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들.

‘나대지 말라니까! 지금 그런 상황 아냐! 계획 변경이야! 너희 지금 당장 튀어야 해!’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 눈앞에는 자신을 주시하는 핵폭탄 재의 기사가 있다.

조금만 낌새가 수상해도 터진다!

‘빌어먹을 젠장! 뭐가 이렇게 재수가 없어!’

마음으로 외치는 순간 불쑥 등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잠시 대화 좀!”

*   *   *

천검 이세기!

로브에 손이 닿는 순간 단숨에 10여 미터를 물러나는 몸!

김철수는 재빨리 말했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 아냐. 저 녀석 핵폭탄…….”

“알아.”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반문하는 순간 재의 기사를 등진 이세기의 심각한 얼굴이 보였다.

“지금 사고 터진 거 맞지? 재의 기사는 널 아는데 넌 쟤를 모르는 거냐? 그래서 재의 기사가 난장판을 만들기 직전인 거냐?”

‘뭐야, 이세기 이 녀석! 사람 마음도 읽는 거야?!’

“야, 뭔 생각 하는 거야? 당연히 사람 마음은 못 읽어. 상황, 분위기를 보고 찍은 거다. 정신 차려! 지금 중요한 건 사고를 수습하고 마력 폭풍을 터트리는 거야! 이제 진짜 시간 없어!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

번쩍 정신이 든 김철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에 구멍이 뚫렸어. 제국 기사, 타이탄 나이트라는 건 알겠는데 이름이 전혀 기억 안 나.”

“방금 무릎 꿇고 외치는 거 보니까. 9할 이상 확신한 거 같은데 얼렁뚱땅 적당히 넘어갈 수 없을까?!”

“안 돼. 쟤들 증거 없이는 절대 안 믿는다. 무릎 꿇은 것도 떠보는 걸 수 있어. 최소한 ‘이름’이라도 기억해야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어.”

“그냥 기습공격으로 제압하고 불의 서약만 뽑아내면?”

“핵폭탄이라니까! 질 거 같으면 자폭한다. 자폭하면 백운대가 통째로 날아간다. 마력 폭풍이고 뭐고 전부 끝장나는 거야!”

“……!”

천문석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친! 자폭이라고?! 사람이 살다 보면 질 수도 있는 거지! 무슨 자폭이란 말인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김철수의 계획은 시작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암초를 만났다.

불의 서약을 뽑아낼 재의 기사가 핵폭탄으로 밝혀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천의! 하늘의 뜻이 나랑 함께 하는데?! 아, 그렇지! 이 잡낭 안에 도움이 될 물건이 있을지 몰라! 다시 찾아보면……!”

김철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최초의 머릿돌, 타이탄 강철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소용없어. 설득하려면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시바, 사용하는 검술이라도 봤으면 기억날지 모르는데…….”

검술!

이 순간 번쩍 천문석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능선에서의 격전!

자신의 강기를 막아 내던 재의 기사의 검술!

“재의 기사가 펼치던 검술 내가 안다.”

“……뭐를 안다고?”

김철수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다!’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 했던 수련공, 칠성검.

칠성검은 단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한번 본 이상 그대로 펼쳐 내는 건 간단했다.

칠성검의 근본, 뿌리는 자신의 일기일원공에 있었으니까!

“잘 봐라. 재의 기사 펼쳤던 검술이다.”

휙휙휙, 휙휙휙휙-

단검으로 허공을 찌르며 이어지는 설명.

“이렇게 단검을 일곱 번 찌르고.”

스으으윽-

천천히 움직이는 단검이 허공을 찌른 검격을 하나씩 잇기 시작했다.

“일곱 번의 찌르기를 하나로 연결하면 별이 튀어나온다.”

“별? 검술에서 무슨 별이 튀어나온다고……?”

김철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검의 궤적이 일곱 번째 검격에 닿았다.

파파파파팟-

이 순간 허공에 생겨난 찬란하게 빛나는 일곱 개의 별!

“……!”

김철수의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지고 입에선 비명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칠성, 세븐 스타!”

이세기의 말이 맞았다.

검술을 보는 순간 바로 생각났다.

당연했다.

칠성검(七星劍), 세븐스타 소드는 대사형을 찾아 원 대륙에서 타 대륙으로 넘어온 샤.

마나 심법을 만들어 낸 검성(劍星)의 검술이었으니까!

검성에게 검과 마나 심법을 배운 사람, 집단, 가문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검성의 칠성검, 세븐스타 소드를 배운 가문은 단 하나뿐이다.

가장 위험한 전장의 선두에 서고, 언제나 마지막으로 물러섰던 기사들!

제국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피를 뿌리고 생명을 던진 제국의 첫 번째 기사 가문!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

자신도 모르게 몸이 돌아가 무릎 꿇은 재의 기사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이름이 터져 나왔다.

“하이브리온.”

[……!]

재의 기사의 깊이 숙인 고개가 번쩍 들리고 무릎 꿇은 몸이 일어났다.

두 눈에서 마력광이 이글거리고 적금색 머리카락에서 우수수 불티가 쏟아졌다.

하이브리온 가문의 기사는 바위에 박힌 롱소드를 뽑아냈다.

스르렁-

강철 건틀릿이 검신을 훑는 순간 전신 갑주에서 쏟아진 불티가 롱소드로 빨려 들어갔다.

롱소드에 담기는 빛이 강해질수록.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존재감이 흐릿해졌다!

김철수는 바로 알아봤다.

서약의 불꽃을 롱소드에 담고 있다!

“왜?!”

[…….]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짙은 노을이 드리워진 하늘과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능선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 김철수는 그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 깨달았다.

아득한 천공에 떠 있는 각성력의 씨앗!

지상에 별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도시, 서울!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재의 기사는 하이브리온의 기사가 맞았다.

오래전 타 대륙에 문명의 불꽃을 피워 올렸듯.

이번에는 지구에 펼쳐진 문명의 불꽃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듯 빛바랜 롱소드.

오래전 자신이 건네준 하이브리온 가문의 검으로.

이 순간 재의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인류를 지킨다.”

김철수의 입에서 마도 제국의 대의가 말해지는 순간.

하이브리온의 기사는 미소 지으며 롱소드를 받쳐 올렸다.

자신의 모든 것!

존재의 본질을 태워 만들어 낸 서약의 불꽃이 담긴 찬란히 빛나는 롱소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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