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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00화 (1,201/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00화>

쿵, 쿵, 쿵-

짙은 노을이 드리워진 숲에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나타난다!”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얼어붙은 나무 사이로 육중한 전신 갑옷이 나타났다.

노을에 물든 전신 갑옷.

검대에 걸린 빛바랜 롱소드.

반쯤 타들어 간 채 불티를 흩날리는 망토.

백운대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인 재의 기사가 나타났다.

“모두 준비됐냐?!”

외침과 동시에 돌아가는 시선에 숲 곳곳에 숨어 있는 동료들의 신호가 보였다.

얼어붙은 나무 뒤!

장철과 마혁진은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 대기 중.

바위가 겹친 동굴 앞!

쿨쿨 잠든 뽀미를 안은 임수정은 국정원과 권 의원 일행 앞을 지키는 중.

숲속 어디인가!

김철수는 기척을 완전히 지운 채 마력 회로 준비 중.

[준비됐다!]

바람을 타고 귓가에 들려오는 김철수의 목소리를 끝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시작한다!”

천문석은 재의 기사의 정면에 섰다.

공방 도시 투영 공간의 결전!

백운대 능선에서의 전투!

이미 두 번이나 싸워 봤기에 너무나 잘 알았다. 재의 기사는 피하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자잘한 기교는 필요 없다!

힘 대 힘, 강 대 강!

만 년 동안 대지를 깎아내며 나아가는 빙하처럼 정면으로 부딪쳐 압도한다!

천문석은 50여 미터 앞 재의 기사에게 마음을 두고 강철봉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느리게, 더 느리게.

둔보(鈍步)!

태산을 짊어진 한 걸음을 내디뎠다!

쿵-

천문석의 한 걸음이 숲을 울리는 순간 격전의 시작을 기다리던 모두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세기는 50여 미터 밖의 적을 향해 장난하듯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분명 뭔가 생각이 있을…….”

“와, 진짜 이 정도면 완전 광신이네! 아예 보증도 서 주지 그러냐?!”

“보증쯤이야. 당연히 서줄 수 있지. 하하-”

마혁진과 장철.

“이세기 선생님? 왜 갑자기 느리게 움직이는 거지?!”

“팀장님! 뭔가 초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 같은 것 아닐까요?!”

“일리가 있다! 신입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전부 기록해라!”

“네! 전부 기록 중입니다!”

“저도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5팀장과 김 대리, 이 대리 청년 마혁진.

“……이세기 일행은 텄다. 저 초능력 고양이를 확보해야 한다.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네 의원님. 난장판이 끝나는 대로 저 학생 신원 조회부터 들어가겠습니다.”

권 의원과 검사.

천문석이 둔보를 펼쳐 재의 기사에게 접근하는 이 순간.

숲 곳곳에 모습을 숨긴 모두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재의 기사는 숲의 초입에 들어왔을 뿐!

서로 간의 거리는 50여 미터!

아무리 강철봉과 롱소드를 뻗어도 근처에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게다가 두 사람의 느린 움직임을 생각하면 1, 2분으로는 전투가 시작되지 않는다.

모두는 긴장을 풀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때 천문석의 둔보와 재의 기사의 육중한 발소리가 합쳐지고 변화가 시작했다.

쿵쿵, 쿵쿵쿵-

기세와 기세가 뒤엉키고, 내력과 오러가 충돌해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

“……!”

“이 진동?!”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허공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이 고조된다!

둥, 둥, 둥-

한 번의 진동에 대지가 요동치고 하늘이 흔들렸다!

전력 질주하듯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몸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태양의 중력이 소행성을 끌어당기듯 어느새 시선이 재의 기사와 이세기에게 고정됐다!

어린아이보다 느린 발걸음에서 산이 흔들리는 현기증과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들썩이고 바짝 마른침을 삼켰을 때.

어느새 10미터!

천문석의 간격에 재의 기사가 들어갔다.

‘지금이다!’

10미터는 강철봉을 아무리 뻗어도 스치지도 않을 거리다.

그러나 둔보를 펼치는 지금은 공격을 시작할 간격이다!

천문석은 상단세로 치켜든 강철봉을 무너뜨렸다!

우르르르르르-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울림과 함께 둔보의 정수를 담은 강철봉이 서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10미터 앞.

피하지도 멈추지도 않는 재의 기사를 향해서!

보통의 공방이었다면 스치지도 않았을 꼬맹이도 쉽게 피할 수 있는 한없이 느린 일격이었다.

하지만 천문석은 미래를 보듯 확신했다.

1.68미터!

재의 기사가 19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태산 같은 무게가 담긴 강철봉이 투구를 향해 떨어진다!

아무리 강한 일격이어도 피하면 그뿐!

하지만 재의 기사는 멈추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강기를 막았던 것처럼 오러가 담긴 일곱 번의 검격, 칠성검을 펼쳐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검 한 자루로 산사태를 막을 수는 없는 법!

아무리 칠성검이라도 둔보의 정수가 담긴 강철봉을 막는 순간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는다!

자신의 승리다!

‘잽싸게 서약의 불꽃을 뽑아내 김철수에게 전하고, 어떻게 칠성검을 알고 있는지 확인한다!’

천문석은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우며 마음과 내력을 움직였다.

느리게, 더 느리게!

태산이 무너지는 무게와 기세를 담아 일격에 압도한다!

파스스스-

강철봉 안의 모래가 움직이며 봉 끝에 실리는 엄청난 무게!

손에서 팔을 거쳐 어깨, 등, 배, 다리를 타고 발에 걸리는 압축된 내력!

우르르르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대기가 요동치며 서서히 간격이 줄어들었다.

6, 5, 4, 3미터!

그리고 마침내 2미터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재의 기사는 떨어지는 강철봉의 궤적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천문석의 예상 그대로!

‘잡았다!’

“미친! 저게 된다고?!”

천문석이 환호하고 모두가 경악할 때.

재의 기사의 투구 속 불꽃과 시선이 마주쳤다.

“……!”

[…….]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이성의 불꽃!

‘무언가 달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재의 기사는 천천히 내딛던 발로 가볍게 땅을 밟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제대로 카운터를 맞을 상황!

그러나 재의 기사는 롱소드를 뽑지도 오러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탓, 타타탓-

태산 같은 무게를 담고 떨어지는 강철봉과 둔보를 펼치는 천문석을 빙 돌아.

쿵-

다시 육중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절대 멈추지도 피하지도 않던 재의 기사가 공격을 피했다!

*   *   *

“야……!”

둔보에 무리에 따라 한없이 느린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 마음속에선 경악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 미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왜 그렇게 느리게 걸어 다닌 건데?!’

천문석은 절절한 마음으로 외쳤다.

그러나 재의 기사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쿵-

육중한 발걸음 소리만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

둔보의 정수를 담은 강철봉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떨어지고.

재의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우회해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적을 쓸어버릴 산사태를 일으켰는데 그게 엉뚱한 산인 황당한 상황!

느껴졌다.

국정원, 검찰, 경찰의 어이없어 하는 시선!

마혁진의 그럴 줄 알았다는 혼잣말!

장철 헌터님의 깊은 한숨 소리!

뽀미의 즐거워하는 울음소리!

김철수의 당황한 표정이!

‘마력 폭풍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망하게 생겼다!’

방법은 하나!

무너지는 산의 방향을 바꾼다!

‘으아아악-!’

천문석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무너지는 산사태의 방향을 바꿨다.

180도 뒤!

자신을 빙 돌아 걸어가는 재의 기사를 향해서!

와드드득-

강철봉에 실린 엄청난 힘과 무게에 육체가 뒤틀리고 내력이 가닥가닥 끊겨 흩어졌다.

간신히 방향 전환에 성공했지만, 둔보로 쌓아 올린 무게와 강철봉에 실린 힘과 기세는 모조리 날아갔다.

휘이이-

힘과 기세를 잃은 강철봉이 재의 기사의 투구를 향해 날아갔다.

오러 없이 검만 세워도 막을 수 있는 일격!

지금 칠성검이 날아오면 완전히 주도권을 잃고 끌려다니게 된다!

그냥 싸우니만도 못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괜찮다.

자신에게는 동료가 있었으니까!

진흙탕 개싸움은 자신의 특기!

더럽게 질척이는 펄처럼 찰싹 달라붙어 시간만 끌면 된다.

기회를 노리는 장철 헌터의 해머와 마혁진의 염동력장이 날아오고!

김철수가 스캔을 끝내고 서약의 불꽃을 뽑아낼 때까지!

휘이이이-

강철봉이 재의 기사에 투구에 닿기 직전 천문석은 마음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버틴다!’

강철과 강철이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러가 담긴 검을 때리는 폭음이 아닌, 속이 빈 무언가를 때리는 굉음이!

까아아앙-

힘과 기세를 잃은 강철봉이 재의 기사의 투구를 그대로 직격했다!

“……??”

강철 투구가 허공으로 날아가 숲 바닥에 나뒹굴고, 빛을 삼키는 어둠에 감싸진 재의 기사의 머리가 드러났다!

‘왜 안 막아?! 어떻게 공격이 먹힌 거야?!’

머릿속 의문과 달리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쿵-

진각을 밟아 기세를 일으키며 도약!

와득-

넓게 잡은 봉을 어깨에 찔러 넣는다!

콰아앙-

육중한 견갑에 담긴 오러가 강철봉을 튕겨 내는 순간 폭풍 같은 연타를 때려 박았다.

콰카카카카쾅-

쉴 새 없이 폭음이 터지고 내력과 오러의 충돌에 우수수 불꽃이 쏟아졌다.

막힘없이 들어가는 공격에 흩어진 기세가 살아나고, 가닥가닥 끊겼던 내력이 이어졌다!

능선에서 싸웠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대응!

재의 기사는 검을 뽑지도, 칠성검을 펼치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무시한 채 전진하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래?!’

매 순간 불쑥불쑥 의혹과 호기심이 솟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은 멍청한 악당이 아니다!

확인하는 건 완전히 제압한 후라도 늦지 않다!

천문석은 폭풍 같은 맹공을 퍼부었다.

쾅, 쾅, 콰아앙-

어느새 갑옷에 담긴 오러가 옅어지고 제대로 공격이 먹히기 시작했다.

육중한 갑옷이 찌그러지고.

불타는 망토에선 불티가 쏟아졌다.

투구가 날아간 머리의 어둠이 흩어지고.

육중한 갑옷 곳곳에 뚫린 구멍에서 새하얀 잿가루가 흩날렸다.

치명상을 입고 피를 철철 쏟아 내는 듯한 모습!

그러나 재의 기사는 멈추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오직 정면을 바라본 채 육중한 발걸음을 내디뎌 전진할 뿐이었다.

쿵-

장철과 마혁진이 모습을 드러낸 얼어붙은 나무를 지나고.

쿵, 쿵-

뽀미를 안은 임수정과 국정원, 권 의원 일행이 가득한 동굴을 지나쳤다.

[…….]

재의 기사는 주위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정면으로 걸었다.

쿵, 쿵, 쿵-

불티와 잿가루를 흩날리며 멈추지 않고 걷는 모습에서 아득한 갈망이 느껴졌다.

“…….”

천문석은 어느새 강철봉을 멈추고 재의 기사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짙은 노을이 내려앉은 숲속 공터.

공터에는 얼어붙은 눈과 흙, 바위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알 수 있었다.

재의 기사의 갈망이 어디에 닿았는지, 누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

“…….”

“…….”

어느새 숲에는 침묵이 내려앉고 수십 명의 시선이 재의 기사에게 닿았다.

쿵-

이 순간 재의 기사가 멈췄다.

재의 기사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

재의 기사의 건틀릿이 움직여 폭풍같이 쏟아지는 공격에도 단 한 번도 뽑지 않은 롱소드를 뽑았다.

스르렁-

강철 건틀릿이 롱소드 검신을 훑는 순간, 찬란한 빛이 맺혔다.

그리고 빛을 담은 롱소드가 장중하게 두 번 움직였다.

좌에서 우로 한번.

위에서 아래로 다시 한번.

허공에 열 십자(十) 불꽃이 그려졌다.

쿵-

재의 기사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어둠으로 이뤄진 고개를 숙였다.

[대륙에 문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신 위대한 마도의 신.]

[무한한 경외! 영원한 충성과 신의를!]

[보석과 강철의 황제 폐하!]

재의 기사 앞.

아무것도 없던 평평한 바위 위에는 어느새 검은 로브를 입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김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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