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157화>
장철은 천문석의 말을 듣는 순간 행간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염동 대협님.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저 오리배 타고 한강 건너.
장철, 장세린, 장민을 데리고 한강을 건너.
-아내분 만나고.
한자리에 모두 모인 세린이 가족을 만나고.
-오셔야 할 것 같네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돌아간다.
‘염동 대협님. 저 오리배 타고 한강 건너 아내분 만나고 오셔야 할 것 같네요’
자신이 세린이 가족 모두를 만나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장철이 질문하는 순간.
씩 웃으며 손에 쥔 담요를 무장 벨트 고리에 걸고 잡낭을 여는 천문석.
“세린이 가족 모두를 제주도로 보내야 합니다.”
제주도!
게이트 전쟁 유일의 안전지대.
세린이 가족을 안전한 제주도로 보내자는 이야기!
장철도 자동차를 끌고 오며 생각했었다.
광화문에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와 몬스터, 거대 괴수가 튀어나와 서울 강북이 난장판이 됐다.
그러나 시민에서 정부까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연의 장벽 한강이 있고 총화기로 대변되는 현대 무기가 마수와 몬스터에게 먹히기 때문이다.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고, 전 세계에 게이트가 열려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게이트 전쟁이 이어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MP 마력 폭풍이 몰아치기 전인 지금.
제주도의 땅값이 폭등하기 전인 이 시기가 장철 가족이 제주도에 이주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 두 가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장철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울 수복 작전에는 강철 해머 장철 헌터와 장강 유통의 장민 대표가 필요하다.”
천문석은 장철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회사원 장철이 아닌, 강철 해머 ‘장철 헌터’.
학생 장민이 아닌, 장강 유통의 ‘장민 대표’.
장철 헌터는 서울 수복 작전에서 길을 직접 뚫었던 1세대 헌터이고.
장민 대표는 장강 유통의 재력과 유통망으로 서울 수복 작전을 지원했을 거다
장철 헌터와 장민 대표. 두 사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고난과 시련은 사람을 키우는 법!
세린이를 찾기 위한 고난과 시련이 회사원 장철과 학생 장민을 강철 해머와 장강 유통의 대표로 키워 냈다.
가족 모두와 안전지대 제주도로 간다면 강철 해머와 장강 유통 대표라는 미래는 사라질지도 몰랐다.
단, 장민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렇다.
장민은 이미 막연하게나마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챘고, 자신 앞의 장철 헌터는 세린이를 구해 준 은인이다.
즉, 가장 어려운 첫 단계 믿음과 설득이 이미 이뤄진 거나 마찬가지다!
장철 헌터가 할 일은 장민 대표에게 미래 정보를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장민 대표는 보통의 대기업 오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맨손으로 대기업을 일으켜 세운 탁월한 능력.
하지만 그 능력보다 중요한 건 장민 대표의 행동이었다.
엄청난 재력과 인맥을 가지고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이용하면서도, 그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돈은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지녔다.
하지만 돈은 숫자를 쓰고 국가의 도장을 찍은 종잇조각!
돈이라는 종잇조각의 본질은 사람의 욕망이었다.
돈과 권력은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잊고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어느새 목적을 잊고 수단에 끌려다니게 된다.
장민 대표는 행동으로 보여 줬다.
어린 조카를 지키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창을 들고.
한강을 건널 오리배를 지키기 위해 각성자와 처절히 싸웠다.
키즈카페 알바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수십억 가치의 헌터용 무구를 아무 대가 없이 빌려 줬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나이트 아머를 타고 현현체와 싸우고.
특급 헌터의 부가티 헌터 미니를 번쩍 들고 사라졌다.
……
한 번도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런 장민 대표라면 장철 헌터가 전해 준 미래 정보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로 알아챌 거다.
서울 수복 작전의 성공. 그리고 게이트 전쟁 승리!
서울 수복 작전은 걱정할 것 없었다.
하늘님의 설계대로!
천문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좋았습니다.’
뿌연 하늘에서 장민을 거쳐 다시 장철 헌터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입이 열렸다.
“장철 헌터님은 아내분이 계시는 병원으로 가족을 데려가면서 장민 대표님에게만 사실대로 미래 정보를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비효과……!”
장철은 입을 여는 순간 깨달았다.
타인인 천문석이 짐작한 걸 친오빠인 장철이 모를 리 없었다.
장민은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머리와 운동 센스를 지녔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성적과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네 불량배를 쥐어박고, 어린 조카와 노는데 그 탁월한 머리를 운동 센스를 사용했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리고 서울, 한국, 세계가 난장판이 되자 그 진가가 드러났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호감을 사는 친화력!
이해관계가 얽힌 헌터와 업자를 중계하는 설득력!
다른 사람이 한 수 앞을 볼 때 수십수 앞을 보는 통찰력!
작은 공업사인 재금 공업에 마석과 부산물을 밀어준 과감성!
장민은 타고난 승부사였다.
게이트 전쟁, 세린이의 실종이라는 위기 앞에 과감하게 베팅했고 성공했다.
그런 장민에게 미래의 정보가 전해진다면?
첫 번째 문제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장민은 어떻게든 서울 수복 작전을 성공시킬 거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문제!
돈, 재원!
제주도가 안전지대라는 건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땅값도 폭등하기 전이다.
하지만 지금 젊은 장철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폭등하기 전인 제주도라고 해도 가족 전부의 생활 기반을 옮길 돈은 없었다.
“가능하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가 있다. 제주도에 생활 기반을 만들려면…….”
천문석은 잡낭에서 꺼낸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반으로 쪼개진 골드바가 놓여 있었다.
“골드바?!”
천문석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로 쪼갠 1kg 골드바!
2004년 부산에서 염동 대협 마혁진과 함께 칠성파 보스 마혁진을 쥐어박고 털어 온 비자금이다!
골드바 3개는 한국 최고의 부동산 전문가가 될 한호석 병장에게 투자했다.
하지만 진품인지 확인하기 위해 둘로 쪼개 놓은 1kg 골드바가 아직 잡낭 안에 들어 있었다.
천문석은 골드바 반쪽을 건네주며 빠르게 설명했다.
“이 골드바로 급한 불을 끄고 제주도에 ‘임옥분 여사님’을 찾으면 됩니다.”
“크게 농사를 짓는 분인데, 어려운 처지의 가족을 절대 외면하지 않을 분입니다.”
“임옥분 여사님은 농사뿐 아니라 사업적 감각도 탁월하십니다.”
“장민 대표와 임옥분 여사님이 만난다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장철은 천문석의 의도를 알아챘다.
미래의 정보.
생활 기반을 옮길 골드바.
임옥분 여사님이라는 조력자.
자신이 생각한 문제점은 모두 해결된다!
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하다. 아, 그런데 꼭 내가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네가 따라가서 설명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것 같은데?”
천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염동 대협이 장철 가족의 은인이잖아요. 그리고 세린이 엄마, 아내분 만나 보셔야죠.”
* * *
“그럼 바로 시작하겠다.”
장철은 과거의 자신, 젊은 장철에게 성큼성큼 걸어갔고.
천문석은 이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을까?
2004년 부산에서도 마혁진과 마혁진이 만났다.
염동 대협 마혁진과 칠성파 보스 마혁진.
검게 타고 바짝 마른 마혁진과 넘치는 부유함이 느껴지던 마혁진.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강철 해머 장철과 회사원 장철.
2020년의 장철과 2000년의 장철.
무장 벨트에 매달린 살벌한 해머와 어색하게 손에 쥔 야구 방망이.
성큼성큼 걷는 장철 헌터에게서 마수를 맨손으로 찢어발기고, 대형 몬스터의 두개골을 으스러트리는 위압감이 치솟았다.
젊은 장철의 얼굴에 당혹감이 생겨나고.
장민이 은근슬쩍 한걸음 비켜설 때.
세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곰 아저씨! 여기는 우리 아빠야!”
순간 위압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장철 헌터는 젊은 장철 앞에 멈춰 섰다.
“…….”
“세린이를 이곳으로 데려와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린이 아빠 장철이라고 합니다.”
젊은 장철은 먼저 깊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
장철은 말없이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훤칠한 몸에 잘생긴 얼굴.
과거의 자신, 젊은 장철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달라진 건 당연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몸과 얼굴 이상으로 달라진 건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웃음과 잘생긴 얼굴.
갈등이 생기는 순간 먼저 양보하는 원만한 성격.
호인, 좋은 사람 장철.
호인, 좋은 사람이란 말은 분명 칭찬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다.
호의는 공짜가 아니다.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 자신의 등을 보고 있는 가족들도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물러서고 물러서다 절벽에 몰리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호의, 양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은 맞서 싸우지 못한 비겁함이었고.
이전투구의 난장판에 뛰어들지 않고 좋은 사람이란 말에 도취한 자신을 대신해 진흙탕에서 구르던 가족이 있었음을.
장민.
게이트가 열리고 서울이 난장판이 된 지금.
감당하지 못할 호의로 오리배를 날린 장철을 대신해 장민이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워 오리배를 구해 왔다.
혼자라면 얼마든지 양보하고 좋은 사람이 돼도 괜찮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가장이 되는 순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생긴다.
가족.
가장의 호의와 양보, 친절은 자신의 의무를 떠넘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이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 버렸다.
하지만 젊은 장철은 아직 늦지 않았다.
바로 잡을 기회를 천문석이 마련해 줬다.
장철 가족과 함께 한강을 건너 20년 전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
20년 동안 실패를 곱씹은 자신이 젊은 장철에게 가르쳐 주면 된다.
그 전에 꼭 풀어야 하는 염원이 있었다.
이때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곰 아저씨! 악수! 우리 아빠 손 내밀었어!”
문득 고개를 돌리자 보였다.
웃으며 손을 내민 젊은 장철.
한 걸음 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민.
장민 바로 옆 환하게 웃으며 외치는 세린이.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장철은 마주 손을 뻗어 과거의 자신, 젊은 장철의 손을 잡았다.
“염동 대협입니다.”
“염동 대협이시군요. 만나서…….”
젊은 장철이 대답하는 순간.
20년 동안의 쌓이고 쌓인 염원!
세기말 대한민국을 재현하는 던전을 찾아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꼭 하겠다고 맹세한 염원을 풀었다.
와드드득-
“반가브아아악-!”
맞잡은 손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힘!
젊은 장철은 허리를 굽히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
하지만 장철 헌터는 과거의 자신과 맞잡은 손을 통해 각성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육체 각성자의 각성력을 이용한 인위적인 신체 활성화가 시작됐다.
각성력으로 지방을 태우고 뼈, 근육, 신경을 강화해 오감과 근력, 민첩성 신체 능력 전반의 포텐이 대폭 상승하는 육체 각성자의 비기!
그러나 이 비기에는 사소한 부작용이 있었다.
상급 이상의 육체 각성자가 필요했고 엄청난 정신력과 각성력이 소모됐다.
당연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비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아주 아팠다!
“끄아아악- 손! 손 좀!”
젊은 장철이 비명을 지르고!
“아빠! 곰 아저씨! 손 놔! 손 세게 잡아서 아픈가 봐!”
세린이가 달려오려는 순간.
장민은 세린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괜찮아. 세린아! 곰 아저씨랑 아빠랑 장난치는 거야!”
“장난이라고?!”
“당연하지. 곰 아저씨가 세린이 아빠를 아프게 할 리 없잖아?”
혼란스러운 표정이 된 장세린의 시선이 아빠에게 향했다.
“아빠, 진짜 장난이야?!”
“아니 이거 진짜…… 아아악-“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온 비명이 목소리를 삼켜 버렸다.
“고모! 아빠 진짜 아파하는 거 같은데?!”
“세린아 전에 치킨 숨겨 놓고 아빠가 뭐라고 했지?!”
“앗, 아앗!”
깜짝 놀란 탄성 뒤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치킨 안 사 왔다고 했어! 내가 치킨 엄청엄청 기다렸는데! 졸린데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치킨 안 사 왔다고 거짓말했어! 난 절대 속지 않아!”
크게 외친 장세린이 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니, 잠깐! 갑자기 치킨이라고?! 이거 진짜! 절대 장난이 아닌…… 아악- 장민! 으아아악-“
젊은 장철이 외침과 비명을 번갈아 지르는 순간.
“자 세린아 우리는 먼저 오리배 타자!”
장민은 세린이를 번쩍 안아 들고 장철 헌터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순간 마주친 시선!
장철 헌터가 움찔 시선을 피할 때.
짧은 한숨과 함께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하, 정신 차리게 더 세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