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145화>
잃어버린 별, 내 딸 장세린.
수없이 꿈꾸고 상상했던 순간이 마침이 왔다.
하지만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수없이 그러했듯 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다.
“…….”
장철은 돌이 된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창문 너머에 나타난 곰 인형을 바라봤다.
“확실해? 곰곰이 잘 좀 찾아 봐! 벌써 100까지 하나둘셋다섯일곱열…… 스무 번도 넘게 셌잖아!”
다시 한번 세린이가 외치는 순간 무언가 톡- 건드린 듯 곰곰이의 머리가 움직였다.
“아빠……?!”
반가운 외침과 함께 곰 인형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아이.
털실 모자 아래 발갛게 달아오른 작은 얼굴과 두툼한 담요를 돌돌 두른 작은 몸.
그 숨결에 창문에 하얀 김이 서렸다.
단 한순간도 잊지 않은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가슴이 욱씬 아려오고 세상이 물에 젖은 듯 일그러졌다.
“…….”
가슴속에 쌓인 말이 너무 많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장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톡-
손이 유리창에 닿는 순간 아이의 얼굴이 쏙 창문 아래로 사라졌다.
“앗! 아니잖아!”
깜짝 놀란 외침과 함께 담요로 작은 몸을 가리고 좌석 아래로 웅크리는 아이.
창문에 닿은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온기.
놀란 표정과 목소리, 작은 행동 하나까지.
이 모든 것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장철은 웃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울지 않도록, 추워하지 않도록, 무서워하지 않게 그 작은 손과 몸을 꼭 안아 줄 수 있다.
톡, 톡, 톡-
장철은 깨질 듯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창문을 두들기고 꿈속에서 수천수만 번 되뇌었던 이름을 불렀다.
“세린아…… 왔어.”
목이 잠겨 흐릿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
그을린 곰 인형이 불쑥 올라오고 씩씩한 외침이 돌아왔다.
“세린이요? 아닌데요?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얼른 저리 가세요! 우리 아…… 고모! 우리 고모 엄청 무서워요! 세찬이도 엉엉 울었어요!”
세린이 친구 세찬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입이 열렸다.
“세린아. 아빠야…….”
“아빠?!”
담요를 뒤집어쓴 몸이 파팟- 번개같이 일어났다.
창문 위로 살금살금 올라오는 털실 모자와 까만 눈.
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아빠 왔어. 너무 늦었지? 미안…….”
순간 얼굴이 쏙 내려가고 단호한 외침이 돌아왔다.
“아빠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뭐? 아, 마스크! 잠깐만 마스크 벗을게!”
재빨리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가까이하자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으아아앗-”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아이.
그리고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이 보였다.
핏발 선 눈과 수염이 가득한 험상궂은 얼굴이!
* * *
‘아차’
세린이에게는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벌써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장철은 20년 동안 헌터로서 수없이 싸웠다.
각성자로 노화가 느려졌지만, 세린이가 못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며 슬금슬금 물러서는 장세린!
장철은 다급히 말을 쏟아 냈다.
“……잠깐 아빠 맞아! 얼굴은…… 라면! 어젯밤에 라면을 먹어서 부은 거야!”
“아, 그렇지! 그 곰 인형 이름 곰곰이 맞지?!”
“고모가 아파트 헌 옷 수거함에서 주워 와서 고쳐 준 곰 인형!”
“사는 아파트는 102동 1301호!”
“제일 친한 친구는 같은 유치원 다니는 옆집 세찬이!”
……
“앗!”
“아앗!”
“아아앗!
……
말이 쏟아지는 매 순간 탄성과 함께 점점 다가오는 장세린!
‘됐다, 먹히고 있다!’
직감하는 순간 결정적인 외침을 터트렸다.
“제주도 여행! 아빠, 엄마, 고모, 세린이까지 전부 같이 제주도 여행 가기로 한 거 기억나지?!”
[@ㅁ@!!]
경악으로 부릅뜬 눈과 확 벌어진 입!
특급 헌터와 판박이, 이모티콘 같이 놀란 표정으로 자동차 창문에 찰싹 얼굴을 붙이고 외쳤다.
“진짜 아빠? 라면 먹어서 얼굴이 부은 거야?! 나랑 고모랑 엄마 몰래 편의점에서 라면 먹었을 때는 그렇게 붓지 않던데……?!”
엄마 몰래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어?!
어쩐지 장민과 심부름을 갈 때면 신나 하던 게 이상했었다!
방금 외침으로 수많은 의문이 풀렸지만, 지금은 설득하는 게 우선이다!
‘뭐라고 설득하지?! 뭐라고……?! 아!’
장철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외쳤다.
“특이 체질이라 그래!”
“특이 체질! 앗! 세찬이 김치 못 먹어! 그런 거였어?! 우리 아빠는 라면 먹으면 붓는 거였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
‘거의 다 넘어왔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장철은 재빨리 맞장구치고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가리켰다.
“눈, 코, 입 잘 봐봐. 부었어도 아빠 맞아. 세린이 아빠, 장철이야.”
“아빠!”
반사적으로 문손잡이에 손을 뻗다 멈칫하는 장세린.
“아빠가 사 오기로 한 게 있는데……?”
세린이가 말끝을 흐리며 힐끗 손을 보는 순간 파팟 불꽃이 튀고 기억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기억!
1999년 12월 31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가족 여행을 떠나는 날, 갑작스러운 바이어의 연락에 회사에 출근했다.
꼭 아빠와 함께 가겠다는 세린이의 고집에 제주도 가족 여행 출발이 하루 미뤄졌다.
그때 세린이와 통화하며 약속했다!
“치킨! 맞아! 아빠가 치킨 사 오기로 했지?!”
환희 어린 얼굴로 대답하자 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치킨 어디 있는데?”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깜빡…….”
“…….”
말없이 스르륵 창문 아래로 내려가는 얼굴.
“……맡겨 놨어! 아빠 친구들이 가지고 있어!”
다급히 말을 바꾸는 순간 내려가던 얼굴이 올라오고 다시 한번 질문이 돌아왔다.
“몇 마리야?!”
“……뭐?”
“치킨 몇 마리 사 오기로 약속했어?”
“……!”
세린이에게는 2일 전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겐 20년 전 일이었다!
20년 전 치킨을 몇 마리 사 오기로 약속했는지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장세린의 초롱초롱한 두 눈과 굳게 닫힌 입술, 꼭 움켜쥔 손에서 느껴졌다.
아빠라면 당연히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장철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치킨이 몇 마리였지?
하나, 둘, 셋, 네 마리?!
치킨에 진심인 세린이에 장민까지 있었다!
한, 두 마리일 리가 없다!
아내는 치킨보다 떡볶이와 순대, 특히 염통, 오소리감투를 좋아했다. 20년 전 자신이 치킨만 샀을 리 없다!
분명히 떡볶이와 순대, 부속을 같이 샀을 거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산 치킨의 마릿수는 셋, 아니면 넷이다!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셋이다!
“세…….”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힐끗 눈치를 살피는 순간 얼굴에 드리워지는 실망감!
“넷! 네 마리 사 오기로 했어!”
얼굴이 활짝 피어나고 곰곰이를 든 손이 번쩍 들렸다.
장세린은 환한 얼굴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땡땡, 땡땡땡! 틀렸습니다!”
“그래, 아빠……! 뭐?”
“세린이 아빠가 사 오기로 약속한 치킨은 네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였습니다! 땡땡, 땡땡땡! 아빠가 아니었어! 난 절대 속지 않아!”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가 반사적으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방금 셋이라고 말하려니까 실망했잖아!”
순간 작은 손가락 세 개가 창문에 착 달라붙었다.
“당연하지! 치킨이 세 마리면 고모랑 내가 둘! 아빠랑 엄마가 하나! 아앗- 내일 먹을 치킨이 없잖아! 엄청 슬퍼! 그런데 네 마리면?! 아앗! 맛있는 치킨을 다 먹었는데! 우와! 내일 먹을 치킨도 있어! 훌륭해! 엄청 훌륭해!”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환호하는 장세린.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특급 헌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장세린은 특급 헌터와 친남매인 것처럼 똑같은 아이라는 것을!
“야, 이거 전부 취소, 취소야! 치킨 몇 마리 사 왔는지로 진짜 아빠인지 어떻게 확인해?! 다른 거 질문해! 아빠, 엄마, 고모 이름! 다니는 유치원 이런 거 말이야!”
“앗! 그러면 되겠다! 알았어!”
장세린은 고개를 휙휙 끄덕이고 바로 외쳤다.
“아빠 장철!”
“엄마 세영!”
“고모 장민!”
“얘는 내 친구 곰곰이!”
“새싹 유치원 몽글몽글 민들레 반 장세린입니다!”
“좋아하는 건…….”
……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질문과 대답.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었다!
“……잠깐, 잠깐! 세린이 네가 물어보고 내가 대답을 해야지!”
“……아.”
탄성과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내가 벌써 다 대답했는데 어떡하지? 물어볼 게 없는데……?”
눈과 눈이 마주치고 긴 침묵이 흘렀다.
“…….”
“…….”
갑자기 3일 연속 야근을 한 듯 급격한 피로감이 밀려오고, 다른 의미로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장철은 재빨리 머리를 털어 심기일전 말했다.
“뭐 다른 질문 없어? 다른 사람은 모르는 아빠만 아는 그런 질문 말이야! 잘 좀 생각해 봐!”
“……아빠만 아는 거. 아빠만 아는 거……! 앗! 있어!”
장세린은 탄성과 함께 창문에 곰곰이를 찰싹 붙였다.
“곰곰이 안에 숨겨 둔 보물! 내 보물 뭐야?!”
“……너 곰곰이 안에 보물! 비밀이라고 아빠한테 한 번도 안 보여 줬잖아?!”
황당함에 자동으로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장세린.
“맞아!”
“……뭐?”
“하지만 우리 아빠라면 내가 안 보여 줬어도 내 보물이 뭔지 알고 있을 거야! 우리 고모도 그랬거든!”
“안 보여 줬는데 어떻게 알아! 무슨 말도 안 돼…….”
‘……지 않았다!’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이고 몇 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엉덩이에 불이 나게 혼난 특급 헌터를 놀려 주러 만사를 제쳐두고 돌아온 서울!
슈퍼 앞 놀이터에서 천문석을 만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 곰곰이를 받았다!
곰 인형 곰곰이에 숨겨진 지퍼를 열고.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세린이의 보물들을 봤다.
화인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
천으로 만든 공깃돌.
한 장이 모자란 치킨 쿠폰.
장민이 찾아준 네 잎 클로버.
가족 모두 놀러 간 놀이공원 티켓.
……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젊은 자신과 아내.
교복을 입은 어린 장민.
곰곰이를 안고 환하게 웃는 아이, 장세린.
세린이의 보물, 가족사진.
“…….”
문득 돌린 시선에 두근두근 기대감 어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웃고 울고 먹고 잠드는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무서워하지 않게 꼭 안아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하고 맹세했다.
장철은 다시금 깨달았다.
자동차 창문 너머의 아이는 수없이 맹세했던 자신이 잃어버린 별, 세린이가 맞았다.
장철은 곰곰이가 놓인 유리창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가족사진.”
“……!”
깜짝 놀란 얼굴로 곰곰이 털 속에 숨겨진 지퍼를 열고 손을 넣는 장세린.
장철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빠야. 세린아 아빠랑 같이 한강 넘어가자.”
이 순간 곰곰이 안에 들어간 세린이의 손이 번쩍 빠져나왔다.
“…….”
“…….”
“……그게 뭐야?”
“내 보물!”
긴 침묵 끝에 장철은 질문했고.
장세린은 확신을 담아 단호히 대답했다.
“…….”
장철의 시선이 우뚝 솟은 작은 손에 꽂혔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물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는 순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물건.
세린이의 손에 들린 보물은 가족사진이 아니라 요플레 뚜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