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111화>
“…….”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도 각성에만 정신이 팔려 생각지도 못했다.
초능력 각성자, 제3자의 경악한 외침이 터진 후에야 이세영 선생님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 위로 올라온 피멍!
시동을 걸기 위해 날린 딱밤 때문에 전신에 생겨난 흔적이다!
신체 재구성, 노화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피멍이다.
아니 최소한 딱밤으로 시동이라도 걸렸다면 영광의 상처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시동을 걸기 위해 전법륜인 딱밤을 날린 건 이미 삽질로 밝혀졌다.
결국, 자신의 무의미한 삽질 때문에 전신에 피멍이 든 것이다.
다른 분도 아닌 이세영 선생님.
알바하는 제자를 찾아와 같이 설거지까지 해 주신 은사님에게 1세대 헌터 마혁진조차 맞는 순간 정신줄을 놓는 전법륜인 딱밤을 날렸다.
셀 수도 없이 많이!
“……!”
지금이라도 선생님께 자신의 진심을 알려야 한다.
그러나 이세영 선생님이 깨어났을 때 만나면 과거를 변화시키게 된다. 과거를 바꾸지 않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 변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괜찮다. 과거를 바꾸지 않고 말을 전할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선생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이세영 선생님에게 달라붙어 있는 초능력 각성자.
이 초능력 각성자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면 된다!
천문석은 바로 움직였다.
“선생님은 괜찮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네?”
초능력 각성자가 반문하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확인부터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니, 그보다 옥상에 정찰조를 보낸 그 대장이라는 분…….”
“……!”
임수정은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조금도 이상한 질문이 아니다.
누구나 처음 만나면 그러하듯 이름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나 상대가 이름을 묻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피했던 시선이 위로 움직였다.
작업용 앞치마와 공구 벨트를 지나 곧 마스크를 쓴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마스크에 가려지지 않은 두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번쩍 머릿속에서 섬광이 터졌다.
스승님이 안광을 빛내며 했던 말.
‘이세기는 알아서 널 찾아올 거다. 날 찾아온 것처럼 말이지……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 그 녀석이 이세기다.’
스승님의 말이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뽀미 안전지대의 각성자 중 한 손에 꼽히는 각성자.
상대가 아무리 강자라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처음 봤을 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세기’냐고 이름을 묻고도 이 선생님부터 무사한지 확인했다.
내심 이세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거다.
그러나 이세기가 자신의 이름을 묻고 눈이 마주치는 지금 모든 것이 변했다!
“……!”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쿵,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맥동하고 손발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거대 괴수의 압도적 위압감도, 각성 동물 뽀미의 경외감도 아니다.
지금 느낌은 일요일 아침 식사 후 엄마의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하다.
‘오늘 할 일 없지?’
갑작스러운 대청소의 예고!
그 느낌을 100배쯤 증폭시킨 느낌!
이 감각의 정체는 불안감이었다!
상대가 이름을 묻는 순간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불안감이 전신에서 끓어 올랐다!
“……!”
임수정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이 사람이 스승님이 말한 ‘이세기’다!’
깨달음의 순간 다시 한번 번쩍 떠올랐다.
2, 3, 4. 스승님이 전해 주신 쪽지 3개!
1번 쪽지는 없냐는 물음에 스승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대답하셨다.
‘1번 쪽지 있었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처음 받았을 때 바로 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다시 만났을 때 아예 말도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스승님의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 지금 이 순간 이해됐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수를 맞닥뜨린 느낌!
수없이 생명을 구해 준 육감이 대답하지 말고 당장 도망치라고 외쳤다!
그러나 스승님에게 받은 임무는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임수정이라고 해요. 이세기 님께…….”
임수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순간.
천문석은 잽싸게 말을 끊고 외쳤다.
“아, 임수정 님이셨구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말씀드리는 건데. 저 피멍, 절대 제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닙니다!”
“……네? 피멍이요? 어, 잠깐만! 피멍…… 피멍! 저 피멍 이세기 님이?!”
임수정은 쪽지를 전하기도 전에 경악했다.
* * *
이세기와 임수정이 대화를 시작한 순간 이 모습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아니 나한테는 나비효과 일어난다고 나오지도 못하게 해 놓고, 대화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피하라고 오토바이까지 멈췄는데!”
빌딩 옥상 잔해 사이에 숨은 염동 대협 마혁진은 분통을 터트렸고.
“아니 그렇게 암시를 줬는데…… 쪽지만 주고 바로 튀었어야지. 이름을 밝히고 이제는 대화까지 한다고?! 하아아-”
커튼 사이로 망원경을 내밀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이마에 십자 상처가 난 남자는 탄식했다.
탄식하는 순간 지난 며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뽀미의 안전지대를 나오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한강과 접한 압구정에서 서초구까지 몬스터를 정리하고.
청계산에 자리를 잡은 암석 트롤이 몬스터 무리를 몰고 서초구에 올라오도록 세팅했다.
그리고 텅 빈 광고판이 보이는 건물 중 하나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나무를 숨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숲!
멀쩡한 건물과 빌딩, 아파트마다 부동산 점유 취득을 하겠다고 20년 존버 중인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 사람들 사이에 은신처를 만들고 겹겹이 옷을 겹쳐 입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썼다!
자신이 걸릴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로 살짝 내민 망원경만으로 주위를 살폈다.
-고지식하게 이름을 밝힌 임수정.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기절한 검은 폭풍.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며 입을 터는 이세기.
세 사람을 지나친 망원경이 멈춘 곳은 이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빌딩 옥상이었다.
무너진 철탑과 콘크리트 잔해가 곳곳에 쌓인 빌딩 옥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누구인지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세기와 임수정이 대화하는 지금 자신의 운명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염동력 각성자.
염동 대협, 마혁진!
저 빌딩 옥상에는 마혁진이 있었다.
“…….”
남자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빌딩 옥상을 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손을 펼치자 딱지 모양으로 접힌 칼로리바 포장지가 나왔다.
그리고 이 칼로리바 포장지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
2달 전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건네준 4개의 딱지 중 1번 딱지.
1번 딱지!
이 쪽지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혁진이 있는 빌딩으로 달려가 진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검은 폭풍은 전신에 피멍이 든 채 기절했고.
마혁진은 각성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가 이마가 깨졌다.
이세기에게!
이세기 녀석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미친 듯한 잔머리와 번개 같은 눈치!
더럽게 질척질척 얍삽하고 짜증 나는 전투 스타일까지!
그러나 진정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지금도 커튼 사이 망원경으로 보였다.
이세기와 대화 중인 임수정!
불과 2, 3분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처음 바짝 긴장했던 표정은 풀리고 어느새 경계심마저 사라진 채 몰입하고 있다!
‘놀라운 설득력!’
이것이 이세기 녀석이 진짜 두려운 이유였다!
원래 사람은 뭔가 싸한 느낌이 들면 피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엮이기 전에 피하면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세기 녀석과 대화를 하면, 입을 터는 것을 들으면!
싸한 느낌은 사라지고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려 꼭 해야 할 것만 같아진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난장판에게 개같이 구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임수정은 그런 이세기와 만났다.
그토록 암시를 줬는데도 이름을 밝히고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다.
스스로 이세기와 얽혀 재앙의 구렁텅이로 발을 들인 것이다!
아니 이세기와 얽힌 건 임수정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피멍이 든 채 기절한 검은 폭풍.
-검은 폭풍의 리볼버에 한 방에 침묵한 최상급 몬스터 암석 트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에 부동산 점유 취득 20년 존버를 풀고 도망친 사람들.
-도망친 사람들을 데리고 바지선이 기다리는 압구정으로 달리고 있을 뽀미 안전지대 소속의 오토바이들.
-빌딩 옥상에 숨어 몬스터 무리를 흩어 버리고 임수정의 오토바이를 멈춘 마혁진.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가 이세기와 얽혔다!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가 정해진 역에 차례차례 멈추는 것처럼 일어날 사건이 순서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사건의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난장판에서 개같이 구른다.
그러나 자신이 기차를 멈추겠다고 선로에 몸을 던지는 순간 일어날 결과는 뻔했다.
질주하는 열차와 충돌하듯.
이세기의 무자비한 응징을 당할 뿐이다!
그럼에도 마혁진이 숨어 있는 빌딩 옥상으로 망원경을 움직이며 거울을 꺼냈다.
정해진 운명이 뒤틀리기를,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잔해가 쌓인 옥상을 향해 거울로 신호를 보냈다.
“…….”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빌딩 옥상을 살펴도 거울 신호를 본 염동 대협 마혁진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2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아아-
결국, 남자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망원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1번 쪽지에 적힌 다음 임무를 위해 움직일 때였다.
마지막 인사말과 함께 여의도를 향해 출발했다.
“힘내라 마혁진. 곧 개 같이 구르겠지만…….”
* * *
천문석은 어느새 말을 놓은 초능력 각성자, 임수정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러니까. 네가 저 광고판이 있는 건물 옥상에 정찰조를 보낸 대장이 맞다는 거지?”
“하- 그놈의 대장. 맞아 정찰조를 보낸 건 나야.”
“그런데 정찰조가 외친 내용은 몰랐다고?”
“애초에 쪽지마다 봉인이 있어서 펼쳐 볼 수 없었다니까. 당연히 난 몰랐어.”
“그러니까 그 봉인을 했다는 사람. ‘만날 사람 있다! 나비효과 없다! 귀인 새꺄 좀 기다려!’ 이 말을 한 사람이……?”
임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방금 말한 것처럼 스승님이야. 평소 스승님 말투와 쪽지 내용이 달라서 이상하긴 한데…… 내가 정찰조에게 준 쪽지. 그걸 나한테 주신 분이 스승님이야.”
“…….”
천문석은 임수정의 확언을 듣는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갑자기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난 초능력 각성자!
이 초능력 각성자가 정찰조를 보낸 모든 의문의 답을 가진 대장이라고 생각했다!
정찰조와 100여 대의 오토바이의 대장은 맞았다.
그러나 모든 의문의 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치 격투 게임에서 보스를 깨니 흑막이 튀어나오듯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스승님!’
임수정의 스승님이 정찰조를 통해 자신에게 외침을 전한 흑막이었다.
그리고 그 스승님이라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만 잘 아는 것이 아니었다.
마수와 몬스터의 생태와 대몬스터전 전술을 가르치고.
각성자들에게 각성력의 훈련법과 기본 전투 기술을 전했다.
거기에 더해 국민대 뽀미의 영역을 늘려 대규모 안전지대까지 만들었다.
‘스승님? 스승님은 또 누구야?!’
마음으로 묻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대장이 여자라는 말에 폐기한 가설!
“혹시 그 스승님 이름이……?”
천문석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장철이냐?”
“장철?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인데…… 아냐. 스승님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거든.”
고개를 가로젓는 임수정.
‘장철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지?!’
다시 머리를 굴릴 때 짧은 탄성과 함께 손이 다가왔다.
“앗! 정작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네! 이거 받아! 이세기, 너한테 전하라는 4번 쪽지야.”
임수정의 활짝 펴진 손에는 포장지를 접어 만든 딱지가 놓여 있었다.
접힌 면에 숫자 ‘4’가 적힌 딱지.
딱지를 받아 뒤집자 이름이 나왔다.
‘– 이세기’
“이거 설마?!”
문득 드는 생각에 묻는 순간 생각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맞아. 스승님이 네게 전하라는 쪽지야. 확인해 봐. 난 선생님 좀 다시 살펴볼게.”
임수정은 몸을 돌려 이세영 선생님에게 성큼 걸어갔다.
천문석은 손에 쥔 딱지 모양으로 접힌 쪽지를 유심히 살폈다.
정찰조 여섯이 옥상 문을 날려 버리고 전했던 외침.
자신을 ‘귀인 새꺄!’라고 부른 임수정의 스승님이 보낸 쪽지다!
여기에 답이 있을 거다!
조심스레 봉인을 뜯고 쪽지를 펼칠 때 문득 깨달았다.
쪽지에 인쇄된 익숙한 그림과 색감…….
“칼로리바 포장지? 이거 왜 이렇게 눈에 익어…… 어?!”
순간 머릿속에서 쾅- 벼락이 터지고 반사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지익-
지퍼가 열리고 잡낭 안으로 들어가는 손!
곧 길쭉한 막대기가 손에 잡혔다.
바로 잡낭에서 손을 꺼내 펼치자 막대기의 정체가 드러났다.
곡물 칼로리바!
임수정이 건네준 딱지는 칼로리바 포장지를 접어 만들었다.
그 칼로리바 딱지와 같은 포장지의 칼로리바가 자신의 잡낭에도 있었다.
“…….”
수제품도 아닌 공장에서 찍어나온 제품이다.
마트, 슈퍼, 편의점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흔한 곡물 칼로리바였다.
똑같은 제품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단, 2020년에서만.
천문석은 잡낭에서 꺼낸 칼로리바 뒷면을 봤다.
[제조 일자 : 2020년 5월 5일]
“…….”
천문석은 알 수 없는 직감에 임수정에게 받은 딱지 모양으로 접힌 포장지를 펼쳤다.
무언가 빼곡히 적힌 뒷면이 아니라 그림과 제품명이 인쇄된 앞면을!
그리고 활짝 펼쳐진 칼로리바 포장지 위에 잡낭에서 꺼낸 칼로리바를 놓았다.
같은 색상.
같은 폰트.
같은 제품명.
그리고 같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제조 일자 : 2020년 5월 5일]
[제조 일자 : 2020년 5월 5일]
임수정이 준 칼로리바 포장지에 적힌 제조 일자와.
자신의 잡낭에서 나온 칼로리바 포장지의 제조 일자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