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092화 (1,093/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92화>

[구라도 낚는 것도 아니니까 꼭 가라!]

돌돌 말린 메모지에 적혀 있는 문장과 그 끝에 적힌 자신의 이름!

천문석.

이세기가 아닌 천문석이다. 그리고 같이 쓰여 있는 이름.

천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정체가 드러났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자신이 천마라는 건 무림 던전에서 다시 만난 절친, 이세기조차 알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세기가 있는 무림 던전은 자신이 천마로 이름을 떨치기 전의 세계였으니까!

지구에 열린 무림 던전의 천마는 황당한 방법으로 마도 쟁투에 승리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굴에 들어갔을 상황.

마도 18문의 지존이 아닌, 운 좋게 마도 쟁투에서 승리했지만, 마굴에서 죽을 애송이 취급을 받을 때다.

마도 18문에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2004년 지구에 ‘천마 천문석’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누구야?!

마굴에서 조졌던 마신과 영락한 신?!

시공을 거스르는 대요괴?

이계에서 튀어나온 이물(異物)?

마공에 끌린 기기괴괴한 괴이들?!

……

수많은 이름이 머리를 스치는 매 순간 고개가 저어진다.

전부 아니다!

앞에 적힌 문장!

[해가 뜨기 전에 해운대 앞바다에서 기다려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1년 동안 부산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긴 선을 따라 뒤에 이어지는 문장!

[구라도 낚는 것도 아니니까 꼭 가라. 천마 천문석.]

앞뒤 문장을 읽는 순간 바로 감이 왔다.

이 메모는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적었다!

앞면의 내용처럼 해운대 앞바다에 나가라고만 썼으면 누군가 낚으려 한다는 생각에 몰래 숨어 살폈을 거다!

그러나 뒷면에 적힌 ‘천마 천문석’이란 글자가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누군가 자신을 낚으려 했다면 이름과 정체를 대놓고 밝혀 경계심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머릿속에서 생각의 폭풍이 몰아칠 때 문득 떠오르는 물건이 있었다.

천문석은 바로 헌터용 배낭에 손을 넣어 물건을 꺼냈다.

시곗바늘이 멈춘 회중시계.

남일도 던전에 빨려들 때 워커 실트가 던져 준 ‘앵커’ 마력회로가 새겨진 회중시계다.

이 회중시계에는 버튼이 두 개 있었다.

파란 버튼과 빨간 버튼.

워커 실트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파란 버튼을 눌러 앵커 고정하고, 돌아올 때 다시 파란 버튼을 누르라고 말했다.

지금 자신과 동료들이 있는 곳은 목적지가 아닌 2004년 부산!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빨간 버튼을 누르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워커 실트 녀석은 항상 예측불허였다. 그래서 빨간 버튼을 누르지 않고 망설였다.

그 결과 정신없이 사건·사고가 터지고,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 과거, 현재, 미래가 얽혀 있는 비밀을 알게 됐다.

작업용 앞치마와 공구 벨트.

자신은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조만간 이세영 선생님을 만나 리볼버와 마탄을 건네고 각성시키게 된다.

더는 빨간 버튼을 누르는 걸 미루지 못할 상황이 된 거다.

그래서 장철 헌터, 염동 대협과 오리배 악어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빨간 버튼을 누를 결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아는 누군가의 메모가 튀어나왔고, 그 메모에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적혀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해운대 앞바다에서 기다려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1년 동안 부산에서 살아야 한다.]

원래 하려던 것도 멍석이 깔리면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물며 자신은 전생에서 현생까지 온갖 불운과 사건·사고에 휘말렸다!

스승님께 물려받은 천문사는 마도 18문의 적통이었고!

시간을 벌기 위해 익히는 시늉만 했던 무공은 천마 신공의 입문결!

비밀 통로로 튀다가 전대의 기인 세 사람과 얽혀 마도 쟁투에서 승리까지 했다!

온갖 불운에 구르고 구른 촉과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당장 생각하라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릴 때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언제!’

이세영 선생님이 6층 층계참을 밟고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와 정신을 잃었을 때다!

자신도 모르게 작업용 앞치마 포켓에 메모를 넣을 수 있는 건 그때뿐이다!

그리고 그때 정신을 차린 자신은 진화한 천강흔 랜덤 박스!

심상 공간에 떠오른 천강흔 랜덤 박스 태양에 경악했다!

이게 다음 의문의 답이다!

‘누가!’

-천강흔 랜덤 박스를 태양으로 만든 사람!

-이세영 선생님의 금이 가던 그릇을 고치고 말라 가던 각성력을 채워 준 사람!

-자신에게 해운대 앞바다로 가라는 메모를 남긴 사람!

이 세 가지 일을 한 사람은 동일인이다!

천문석은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은 ‘호의’를 가지고 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서울 대성당에 돌아오는 즉시 오리배 악어를 바다에 띄우고 떠나려 했으니까.

메모를 받고 변한 건 오리배 악어를 띄울 장소가 해운대 앞바다가 된 것뿐이다!

호의를 가진 사람이 남긴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1년 동안 부산에서 살아야 한다.]

‘우선 해운대 앞바다로 움직인다!’

천문석은 결심하는 순간 배낭을 짊어지고 꼬맹이들에게 보낼 편지를 적어 협탁에 놓았다.

[요플레 고맙다! 모두 잘 있어라!]

그리고 바로 의무실로 내려왔다.

* * *

의무실 안의 모습은 올라갔을 때와 변한 게 없었다.

염동 대협 마혁진은 창밖 마당을 바라보고.

유희연, 유희명 자매는 깊게 잠든 이세영 선생님과 김철수 꼬맹이를 살폈다.

그리고 한호석 병장은 통조림 봇짐에 앉아 골드바를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천문석은 성큼 다가가 만년필을 내밀었다.

“이거 최 팀장 만년필이다. 다시 만날 때 돌려줘라.”

“아, 그 마도구!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호석 병장이 만년필을 받는 순간, 천문석은 골드바 3개를 내밀었다.

“어, 이건 왜?”

“받아 투자다.”

“투자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한호석 병장.

이 모습을 보는 순간,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한 내용이 머리를 스쳤다.

2004년 부산에서는 1kg 골드바 하나가 3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 골드바를 2020년 한국으로 가져가면 그 가치는 1/4 토막이 난다.

게이트 전쟁에 승리하고 게이트 안정화 장치가 전국의 게이트에 설치되면서 금값은 폭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폭등하는 자산도 있었다.

부동산.

이제 떠날 자신이 부동산을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 앞에는 한국 최고의 부동산 전문가가 되는 사람이 있었다.

한호석 병장.

바로 지금이 한호석 코인에 몰빵할 때였다!

“좋은 땅 나오면 이 골드바로 투자해 줘. 나중에 찾으러 갈 테니까.”

“네? 아니 저를 뭐를 믿고 그런 투자를…… 앗! 아까 말씀하셨던 부동산 컨설턴트?!”

깨달음의 탄성을 터트린 한호석 병장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 대학원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입니다. 부동산 컨설턴트 안 할 겁니다. 전 반드시 교수가 돼서 제 논문 꿀꺽하려던 교수에게 복수할 겁니다!”

한호석 병장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미래 계획을 밝혔다.

천문석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인생 계획이 있는 법이다.

냉혹한 현실에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산속 사당의 고아 소년에서 천문사의 주지를 거쳐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가 됐다가, 무의 극을 넘어 천강의 불꽃에 한 방에 훅 간 게 전생의 자신이다.

그런 자신도 상상도 못 했다.

건물주가 되기 위해 입대를 꿈꾸던 자신이 1년도 되지 않아 2004년 부산에서 구르게 될지는!

인생은 예측불허!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고 삶이었다.

“야, 그냥 넣어 둬. 혹시 부동산 컨설턴트 안 하게 되면 나중에 찾으러 갔을 때 돌려주면 되잖아? 혹시 필요하면 그냥 쓰고 채워 놔도 되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천문석은 한호석 병장의 통조림 봇짐에 골드바를 끼워 넣고 염동 대협을 봤다.

“트럭 준비됐냐?”

“오리배 올리고 밧줄로 고정하고 있다.”

“이제 슬슬 나가자. 챙겨라.”

염동 대협이 장철 헌터를 둘러업을 때.

천문석은 깊게 잠든 이세영 선생님과 김철수 꼬맹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꼬맹이, 너도 잘 있어라.”

그리고 일행 모두는 마당으로 나갔다.

부으으으응-

어느새 준비를 끝낸 트럭이 다가오고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끝났어. 바로 출발할까?”

이때 등 뒤에서 영희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단단히 묶인 보자기를 받는 순간, 확 올라오는 고소한 냄새.

“이건 어제?”

영희 수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밥 쌌어요. 가면서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천문석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순간.

영희 수녀의 웃음기 어린 얼굴이 염동 대협에게 향했다.

“신부님 도와주신 것. 아이들이랑 놀아 주신 것 감사드려요. 아이들이 정말 많이 웃었답니다.”

그리고 작은 손이 염동 대협의 커다란 손을 덮었다.

“…….”

거칠고 상처가 가득한 손에선 참기름 냄새가 폴폴 올라왔다.

염동 대협 마혁진은 한참 동안 말없이 이 손을 바라보다 고개만 끄덕이고 화물칸에 올랐다.

그런 염동 대협을 향해 작별 인사가 이어졌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이 서류 정말 감사드려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대협! 감사합니다.”

유희연, 유희명 자매.

한호석 병장.

“…….”

천문석은 우두커니 서 있는 염동 대협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럼 잘 지내고, 모두 나중에 보자.”

“투자금은 잘 보관했다가 다시 돌려 드릴게요. 이세기 선생님!”

“선생님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천문석은 운전석 지붕을 두들기며 외쳤다.

“출발!”

“네, 고객님!”

부아아아앙-

트럭에 시동이 걸리고 정문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드르르륵-

이때 깜깜한 2층 창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졸린 눈을 비비는 꼬맹이.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아이였다.

아이는 트럭 위에 실린 오리배 악어를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외쳤다.

“아앗! 오리배! 요플레 오빠! 놀이기구 할아버지! 일어나! 모두 빨리 일어나! 지금 가고 있어!”

창문이 줄줄이 밝혀지고 드륵, 드르륵 열리는 순간, 작은 얼굴들이 나타나 소리를 질렀다.

“오리배 잘 가!”

“염동 대협 할아버지!”

“할배 헌터 안녕!”

“요플레 형 잘 가세요!”

“김밥 맛있었어요!”

“앗! 요플레랑 사이다 감사합니다!”

“방방이 엄청 재밌었어!”

“바이킹! 완전 멋졌어!”

“목욕 완전 최고였어요!”

“신부 할아버지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봐요!”

“끼요요요욧-!”

……

졸린 얼굴을 내밀고 힘차게 손을 흔들며 크게 외치는 아이들.

“…….”

염동 대협 마혁진은 대답하지도 마주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화가 난 것처럼 잔뜩 굳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소리치는 서울 대성당의 아이들을 노려봤다.

그러나 아이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손을 흔들고 외쳤다.

같이 김밥을 먹고, 마당에서 목욕탕에서 같이 놀았기에 염동 대협의 잔뜩 굳은 얼굴 아래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천문석은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야, 뭐야? 꼬맹이들, 나한테는 감사 안 하냐?!”

“사이다 고마워요!”

“요플레! 정말 맛있었어!”

“요플레 형 감사합니다!”

“잘 가세요!”

“안녕. 안녕. 안녕!”

……

부아아앙-

트럭은 꼬맹이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 잠깐만 멈춰……!!”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온 철수 신부님.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골드바를 발견했구나!’

“정지, 멈춰! 야! 영희! 차 세워!”

철수 신부님의 외침에 운전석의 영희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고객님? 어떻게 할까? 멈출까?”

당연히 안 된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김밥도 맛있었고요! 침대 위에 놓은 것, 염동 대협이 내는 김밥값입니다!”

천문석은 김철수 신부에게 외치는 동시에 운전석을 두들겼다.

텅-

“당연히 바로 튀어야지! 목적지는 해운대다!”

“해운대! 알았다!”

부아아아앙-

트럭은 정문을 향해 가속했다.

환하게 밝혀진 창에 얼굴을 내민 아이들의 외침이 멀어지고.

현관에 선 영희 수녀님, 유희연과 유희명, 한호석 병장이 작아졌다.

“멈추라니까! 야, 영희 너 당장 세우라고!”

김철수 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지만, 트럭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트럭과 김철수 신부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질 때.

염동 대협 마혁진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노 신부를 말없이 바라봤다.

“…….”

과거를 바꾼다고 일어났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상한다고 이미 저지른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용증을 찢고 비자금으로 모아 둔 골드바와 빼돌린 안전지대 제주도의 부동산을 넘겼다.

“…….”

철수 신부님과 영희 수녀님.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엄마와 함께 안전지대 제주도로 떠날 유희연, 유희명 자매.

마혁진은 모두를 바라보며 누구도 듣지 못할 말을 마음에 새겼다.

‘…….’

부아아아앙-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

천문석, 장철 헌터, 염동 대협 마혁진과 오리배 악어를 실은 트럭은 서울 대성당 정문을 통과해 해운대를 향해 달렸다.

천문석은 서울 대성당의 모두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모두 잘 있어!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