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070화 (1,071/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70화>

“설마, 그 이지광 검사?!”

“이지광 검사님을 아시나 보군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잇는 최 팀장이 보였다.

“하긴 이지광 검사님 유명하죠. 각성도 하지 않은 일반인이 서울에서 검찰을 유지하고 있으니…… 아마 나중에 총장까지 올라갈 겁니다. 어떻습니까? 신뢰도가 막막 올라가지 않나요?! 이런 분이 확신을 담아 녹음한 겁니다! 하하하-.”

최 팀장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방금 전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호탕하게 웃으며 녹음기를 꺼내 들던 최 팀장!

‘아뇨. 공정하고 중립적인 유희연 학생은 부를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보는 순간 납득할 증거가 여기 있거든요.’

‘보는’ 순간 납득할 증거!

그렇다! 분명 녹음기를 꺼내며 ‘듣는’ 순간이 아니라 ‘보는’ 순간 납득할 증거라고 말했다!

녹음기에 들어 있는 음성은 미끼였다.

진짜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명함이다!

[이지광 검사]

그리고 명함이 끝이 아니다.

명함 한 장으로 어떻게 믿냐고 말하는 순간, 줄줄이 증거가 튀어나올 거다!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리고 다른 증거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지광 검사]

눈앞의 명함을 보는 순간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강릉행 KTX 열차를 탔을 때 특급 헌터가 보여 준 빛바랜 명함!

검사 할아버지의 명함과 눈앞의 명함은 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 똑같았다.

16년의 세월의 흔적!

그렇다. 두 명함은 같은 명함이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은 이지광 검사, 특급 헌터와 박스 성을 만들 때 리어카를 빌렸던 검사 할아버지다!

현직 검사가 참전 계약서 뒷면에 사인하는 거로는 계약 성립이 안 된다고 확인했다.

즉, 참전 서약서 뒷면에 사인을 유도했다는 것으로 사기의 의도가 있다는 걸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제대로 급소를 찔렸다!

이 상황을 모면할 가장 쉬운 방법은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이다.

하지만 논검의 도의상 명백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럼 왜? 도대체 왜?! 참전 서약서 뒷면에 사인을 받으려 한 거야?!’

처음 말한 대로 정말 가보로 삼으려고?!

말도 안 된다!

최 팀장 이 녀석은 몇 번이나 낚시질을 했다!

분명 참전 서약서 뒷면에 사인을 받은 것도 서울 수복 작전에 참전시키기 위해서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최 팀장의 ‘그 계획’을 알아내는 거다!

경찰이 23층에 도착해 칠성파 조직원들을 정리하고 강화 철문을 두들기기 전에!

‘생각해라! 생각해!’

파파파팟-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릴 때.

최 팀장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기 선생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제 슬슬 사인하셔야죠?”

하하하하하-

천문석은 우선 웃음부터 터트렸다.

그러나 상대는 희대의 낚시꾼,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하하하- 이세기 선생님께서는 웃음도 멋지시군요. 자, 그럼 얼른 사인부터 하시고, 웃음은 나중에 터트리는 거로 하시죠!”

‘궤변, 억지, 아무 말을 쏟아부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그 틈에 허점을 찾는다!’

“잠깐 기다려! 나도 변호사랑 통화해야…….”

“23층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설득해야 한다면서요?”

“……!”

순간 말문이 컥 막혔다.

그랬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난 왜 그렇게 말했을까?!

당연히 궤변과 억지, 아무 말을 막기 위해서다!

스스로 발등을 찍은 상황!

어떻게든 최 팀장의 ‘진짜 계획’이 뭔지 알아내야 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최 팀장의 진짜 계획!

법적 효력이 없는 참전 서약서 뒷면 사인을 유효하게 만드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슬슬 준비하겠습니다.”

최 팀장은 천문석이 잡고 있던 참전 서약서를 쏙 뽑아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좀 남은 것 같긴 한데. 별 의미는 없는 것 같네요? 자, 그럼 한국 최강의 각성자 마혁진에게 아슬아슬하게 패배한 염동 대협의 동료!”

최 팀장은 씩 웃으며 상의 포켓에 꽂혀 있던 펜을 뽑아 공손하게 내밀었다.

“이세기 선생님. 사인 부탁드립니다.”

펜이 스르륵- 다가오는 순간, 수십 가지 감정과 수백까지 번뇌가 몰아쳤다!

당장 도망칠까?

반사적으로 딱밤을 갈기면?

염동 대협에게 처치하라고 신호하면?

……

어떤 방법도 불가능하다.

참전 서약서와 신원 보증을 걸고 논검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

천문석은 다가오는 펜을 바라보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나비효과, 타임 패러독스?

괜찮다. 어차피 지금까지 친 사고만 벌써 수십 번이다.

게다가 세기말 대한민국에 도착하면 대형 사고를 칠 예정이다!

‘서울 수복 작전에 참여하는 정도는 큰 사고가 아닐…… 리가 없잖아! 빌어먹을 젠장!’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국정원 최 팀장!

최 팀장에게는 분명 자신을 낚을 ‘계획’이 있다!

‘생각해 내라! 분명 단서가 있을 거다! 할 수 있다!’

마음으로 외치는 순간 문득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공손히 펜을 내미는 최 팀장!

전혀 이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이것만 아니라면.

만년필.

그렇다!

자신의 손에는 이미 만년필이 있다.

그냥 만년필도 아닌 최 팀장이 준 만년필이!

그런데도 최 팀장은 다시 펜을 꺼내 내밀고 있었다!

‘왜?!’

의문이 떠오르는 한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최 팀장은 자연스럽게 마석이 박힌 만년필을 건네며 참전 서약서 뒷면에 사인을 부탁했다.

‘만년필에 박힌 마석!’

반사적으로 만년필을 보는 순간, 만년필에 박힌 투명한 돌이 마석이 보였다.

그냥 마석도 아닌 마력 회로의 에너지원, 정제 마석이다!

“이세기 선생님……?”

최 팀장의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이 만년필로 한 사인, 잉크에 마력이 담겼다면?!

그래서 뒷면에 한 사인이 앞면으로 이동한다면?!

잠깐 그렇게 이동하면 좌우 반전될 텐데?

천문석은 잡념을 떨어 냈다.

가능성을 검증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직접 해 보는 거다!

천문석은 만년필 뚜껑을 열고 참전 서약서 뒷면에 이름을 썼다.

[마혁진]

“이세기 선생님! 갑자기 칠성파 보스 이름은 왜?!”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최 팀장과 염동 대협의 기겁한 외침이 터져 나올 때.

“잠깐 기다려 봐!”

천문석은 참전 서약서를 뒤집어 앞면을 확인했다.

깨끗한 앞면!

설마, 내 가설이 틀렸나? 아니, 아직 모른다!

“할 수 있다!”

외침과 동시에! 참전 서약서에 적힌 사인에 훅훅- 입바람을 불고, 쓰스슥- 손으로 문지르고, 이야얍- 기합을 터트렸다!

“……!”

그러나 마혁진 세 글자가 참전 서약서 앞면으로 옮겨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염동 대협의 황당해 하는 외침과 최 팀장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만 들려왔다.

“또라이 녀석! 너 뭐 하는 거야? 당장 그 이름 지워!”

“하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뒷면에 한 사인은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마지막 가설은 무너졌다.

* * *

“이세기 선생님.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처음부터 낚시 같은 건 없었다니까요! 하하-.”

“제가 가보로 보관하려고 사인받는데 실수로 참전 서약서를 꺼냈던 겁니다.”

“자, 이제 오해도 풀렸으니 얼른 여기다가 사인하시고 우리도 한몫 챙기러 가죠?!”

국정원 최 팀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펼쳤다.

[참전 서약서]

‘뭐, 실수?!’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나온 ‘새 참전 서약서’만 봐도 실수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최 팀장 이 녀석이 처음부터 낚시질한 거라는 데 류세연 통장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심증일 뿐,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마지막 가설은 무너졌고, 패배자는 이제 참전 서약서에 사인해야 했다.

천문석은 비통함을 삼키며 책상 위 참전 서약서에 손을 뻗었다.

“아, 그 서약서는 이름이 적혔으니.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최 팀장이 새로운 참전 서약서를 손으로 펼쳤다.

“…….”

참전 서약서에 서명하기 직전 문득 보이는 게 있었다.

바로 옆에 놓인 문서 뒷면에 적힌 세 글자.

마혁진.

그리고 세 글자를 적은 정제 마석이 박힌 만년필.

“만년필에 정제 마석은 왜 박아 놓은 거야?”

탄식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필요하니까.”

“필요하다고? 잉크에 마력이 담기는 것도 아닌데 정제 마석이 왜 필요하지?”

“잉크가 아니면 만년필 본체에 마력이 담기나 보지…… 어!”

만년필 본체!

머릿속에 가득한 안개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최 팀장의 얼굴을 스치는 경악!

‘이거다!’

감이 오는 순간 만년필을 든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데구루루르-

만년필이 참전 서약서 위를 구르는 순간 ‘마혁진’ 세 글자는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거!”

염동 대협의 경악한 외침과 최 팀장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와! 엄청 신기하네요? 이세기 선생님, 마술도 하시나 보네요? 얼른 사인부터 하고 마술 보여 주시죠!”

다급히 만년필을 향해 손을 뻗는 최 팀장!

“염동 대협!”

최 팀장의 손이 염동력에 잡혀 만년필 바로 앞에서 멈추는 순간, 말이 쏟아졌다!

“아악! 안 돼! 정지! 잠시만요! 절대 만지면 안 돼요! 위험합니다! 그 만년필 1급! 아니, 특급 비밀입니다! 이세기 준장님! 선생님! 제발 잠시만! 제 말부터 좀……!”

천문석은 멈추지 않았다.

참전 서약서를 뒤집고 그 앞면에 정제 마석이 박힌 만년필을 굴렸다.

데구루루륵-

만년필이 참전 서약서 앞면을 구르는 순간, 사라졌던 이름이 나타났다.

[마혁진]

뒷면에 적은 서명이 참전 서약서 앞면으로 옮겨졌다!

“야, 방금 그거?!”

염동 대협의 경악한 외침이 터졌을 때.

천문석은 다시 한번 글자 위로 만년필을 굴렸다.

데구루루-

만년필이 위를 구르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혁진!

데구르륵-

다시 만년필을 굴리자 정확히 그 아래 나타나는 세 글자!

마혁진!!

데구루루-

글자 위로 만년필을 굴리면 사라지고.

데구루루륵-

빈 종이 위로 다시 굴리면 사라진 글자가 나타난다!

데구르륵, 데구루루륵-

‘마혁진’ 세 글자는 만년필을 굴릴 때마다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아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만년필에 붙었다가 다시 떨어진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정제 마석이 박힌 이 만년필은 예상대로 마도구였다.

법적 효력이 없는, 뒷면에 한 서명을 앞면으로 옮길 수 있는 마도구!

“부산 헌터들! 걔들을 이걸로 낚았구나! 와, 미친!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네!”

염동 대협의 외침대로였다.

-돌돌 말린 종이.

-품에서 나온 만년필.

-검사의 목소리가 녹음된 녹음기.

-그 검사의 명함.

-포켓에서 튀어나온 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참전 서약서 뒷면에 사인을 받다가 걸린 것 자체가 2중 함정이자, 미끼였다!

진짜는 맨 처음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만년필!

자유롭게 ‘사인’을 옮길 수 있는 ‘마도구 만년필’이었다!

천문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최 팀장을 봤다.

“……이세기 선생님…….”

최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여는 순간.

천문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와, 미친!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최 팀장! 미친 새끼! 와, 너 함정을 몇 개를 파 둔 거야?!”

천문석의 탄성이 가슴이 뻥 뚫릴 듯한 통쾌한 웃음에 실려 울려 퍼졌다.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하하하-.”

최 팀장이 웃음을 터트릴 때.

염동 대협 마혁진은 탄식했다.

“……도망쳐야지. 멍청한 녀석…….”

“네? 지금 뭐라고?”

문득 고개를 돌리는 순간 뚝- 웃음소리가 그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라 치다 걸렸으니까 대가를 치러야겠지? 자, 최 팀장 이마 까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