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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069화 (1,070/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69화>

“…….”

“…….”

천문석은 세기말 서울에서 구를 때 생각했다.

1999년 세기말 서울은 약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하는 야생이라고!

그리고 2004년 부산도 세기말 대한민국 못지않았다!

난장판이 마무리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어떻게든 엮으려는 국정원 최 팀장의 근성!

천문석은 손에 쥔 종이를 흔들었다.

“이면지라고?!”

금박으로 새겨진 무궁화와 봉황.

그리고 선명하게 인쇄된 다섯 글자.

[참전 서약서]

그러나 최 팀장은 확실한 물증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하하하-

웃음이 먼저 튀어나오고 자연스레 말이 이어졌다.

“어? 그게 왜 섞여 있었지? 큰일 날 뻔했네요! 이런 실수라니! 하하하하하-.”

길게 웃음을 터트리며 실수인 듯 은근슬쩍 넘기려 했다.

그러나 최 팀장 앞에 있는 사람은 천문석이었다.

처음 만나면 이세기 이름부터 팔고,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라가 튀어나오는 달인!

온갖 사기, 구라, 협잡, 낚시질의 달인은 바로 알아챘다!

“어디서 개수작을!”

천문석은 최 팀장의 웃음을 끊고 외쳤다.

“이면지에 금박으로 봉황이 새겨졌다고?! 야, 이 봉황 이거 청와대 문양 아냐?! 국정원 직원이 청와대 문양이 새겨진 종이를 실수로 내밀었다고? 너 이거 낚시질 맞지?!”

“아니, 국정원 직원은 사람 아닙니까? 당연히 실수할 수도 있죠! 그리고 어느 미친놈이 청와대 문양이 새겨진 종이로 낚시질을 해요? 당연히 실수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반박하는 최 팀장!

천문석은 마찬가지로 무호흡으로 재반박했다!

“이거 서류 사이에 껴 있던 것도 아니고! 네 정장 안주머니에서 꺼냈잖아! 그것도 돌돌 말린 채로 자연스럽게…… 어, 잠깐!”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

촉이 왔다!

방금 자신의 말속에 한 방 먹일 단서가 있다!

‘뭐지? 뭐가 촉을 건드린 거지?!’

파파팟-

머릿속에서 방금 전 최 팀장의 행동이 재생됐다.

품에서 자연스레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펼치고, 마석이 박힌 만년필을 두 손으로 자연스레 건네며 뒷면에 사인을 부탁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동작!

그렇다! 너무나 모든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

한두 번으로 이런 자연스러움이 몸에 새겨질 리 없다!

무공으로 따지면 초식의 극에 달해 형(形)을 버리는 경지!

10년의 세월 동안 박스를 접은 생활의 달인처럼, 수 없는 반복 연습만이 이런 자연스러움을 가능하게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천문석은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야, 이 낚시꾼 녀석! 너 이거! 참전 서약서 낚시질 처음 아니지! 너 이걸로 몇 명이나 낚은 거야?!”

“……!”

순간 최 팀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최 팀장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최 팀장도 만만치 않았다.

눈빛이 흔들린 건 찰나!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한 태도로 외쳤다.

“아니. 낚기는 누굴 낚아요?! 실수라니까 실수! 제 명예를 걸고 절대 아닙니다!”

진짜 억울한 듯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고!

“뭐야? 진짜 억울한 건가?! 라고 넘어갈 줄 알았냐? 하, 이 새끼 얼굴 두껍기가 얍삽한 주호 새끼보다 더하네! 너 이리 와! 딱밤 맞자! 하늘, 아니 땅을 대신해 넌 좀 맞아야겠다!”

전법륜인 딱밤 자세를 잡는 순간.

최 팀장은 정말로 억울한 사람처럼 가슴을 두들기며 말을 쏟아 냈다.

“와, 와! 이런 중상모략이라니!”

“평생! 국가 공무원으로 명예와 품위를 지키며 살아왔는데!”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입니까?!”

“아니면! 진짜로 아니면 어쩔 겁니까?! 사인이라도 하시겠습니까?!”

……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는 최 팀장의 파르르 떨리는 손이 참전 서약서를 가리켰다.

“……!”

천문석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전생에서 현생까지 수많은 사기꾼, 약장사, 협잡꾼, 구라쟁이를 말과 논리로 박살 냈다!

그런 자신이 보기에도 국정원 최 팀장, 이 녀석은 한 손에 꼽히는 사람을 낚는 낚시꾼이었다!

최 팀장 이 녀석이 무림 던전에 떨어졌으면 얍삽한 주호 녀석은 눈탱이를 열 번도 더 맞았을 거다!

-핏발 선 두 눈!

-붉게 물든 표정!

-가슴을 두들기는 손!

-깊은 떨림이 담긴 목소리까지!

온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쉴 새 없이 쏟아붓는 말속에 슬쩍슬쩍 숨겨 둔 낚싯바늘!

‘사인하시겠습니까?!’

손, 말, 시선 모든 게 자신의 손에 들린 ‘참전 서약서’를 가리키고 있었다!

최 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낚시질이 들통 난 지금도 일발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언제 전법륜인 딱밤이 날아와 정신줄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인 지금!

‘와, 미친 여기서 낚시 각을 본다고?!’

천문석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최 팀장, 이 녀석은 진짜다!’

한 방에 칠성파 보스의 뒤통수를 깨고!

말 한마디로 염동 대협을 오체투지 하게 만든!

이곳의 절대 강자 자신을 상대로 낚시 각을 보고 있다!

참전 서약서에 서명하게 만들어.

서울 수복 작전에 참전시키기 위해서!

최 팀장의 이런 모습을 보는 순간 피가 끓어 올랐다.

이것이야말로 무리(武理)를 겨루는 무림의 논검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논검(論劍)이다!

논리에서 밀리는 순간 당연히 패배한다!

거기에 더해 상대를 열받게 만드는 순간 아작 난다!

초딩 꼬맹이가 오락실에서 고딩 형과 붙는 것과 같다!

약발 연타를 갈기면 승률은 올라가지만, 고딩 형의 분노 게이지도 동시에 올라가는 것이다!

만장단애에 걸쳐진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한 승부!

최 팀장은 논리와 분노, 이성과 감성, 논박과 아첨을 아우르는 진정한 논검(論劍)을 걸어왔다!

바로 자신, 천문석에게!

산속 사당의 돌멩이에서, 천문사의 주인을 거쳐,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단 한 번도 논검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할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만!”

천문석은 손을 들어 말을 끊고 참전 서약서를 내밀었다.

“좋다! 그 논검 받아들인다! 이 참전 서약서가 실수란 걸 납득시킨다면, 여기에 사인한다!”

“약속하신 겁니다!”

최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고.

천문석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기! 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시간 제한은 저 문밖에 경찰들이 도착할 때까지! 조건은 23층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실패하면…….”

“무엇이든 말하십시오! 이세기 광장! 계약금 1,000억! 이세기 길드에 30년 면세 혜택! 무엇이든…….”

“됐어. 나랑 쟤, 저기 마혁진한테 패배한 염동 대협 신원 보증만 해 주면 된다.”

“그 논검, 받아들이겠습니다!”

쿵, 쿵-

주먹이 맞부딪치는 순간 ‘참전 서약서 사인과 신원 보증’을 건 논검이 시작됐다!

천문석 vs 최 팀장.

논검에 임하는 두 사람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논리를 세웠다.

“……!”

“……!”

이 순간 모든 대화를 들은 사람.

여전히 죽은 척 엎드린 염동 대협은 탄식했다.

‘논검이라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구나…….’

* * *

천문석은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선수를 양보한다!”

“감사합니다!”

최 팀장은 대답 즉시 몸을 돌려 외쳤다.

“야, 김 대리! 김 대리, 나와 봐라!”

“네! 팀장님!”

기다렸다는 듯 유희연, 한호석 병장이 들어간 문에서 튀어나온 국정원 김 대리.

최 팀장은 참전 서약서를 손으로 가리켰다.

“김 대리. 참전 서약서 뒷면에 사인하면 효력 있냐 없냐?”

“당연히 효력 없죠! 계약서 뒷면에 사인했다고 효력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하-.”

빙글 몸을 돌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치는 최 팀장.

“들으셨죠?!”

“하- 너희 둘은 직장 동료인데, 당연히 특수 관계지! 그런 건 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야, 염동 대협!”

“…….”

말이 끝나는 순간 벌떡 일어나 어이없어 하는 시선을 보내는 염동 대협.

천문석은 거두절미하고 참전 서약서를 내밀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때?”

“염동 대협님!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당연히 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 앞뒤를 자르고 외치는 이세기와 최 팀장.

‘이 새끼들……?!’

염동 대협 마혁진은 바로 감을 잡았다.

최 팀장은 이미 자신이 깨어 있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최 팀장이 눈치챘다는 걸 이세기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세기는 지금까지 모른 척 죽은 척을 시키고 있었다!

지금을 위해서!

깨달음의 순간 소름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

이 미친 잔머리라니!

무심코 던진 한마디와 아무렇지도 않게 튕긴 딱밤 하나까지! 모든 말과 행동이 의미가 있었다.

이세기 새끼뿐만이 아니다!

국정원 최 팀장, 이 녀석 바로 그 녀석이다!

온갖 감언이설과 자신도 모르게 서명된 참전 서약서 수천 장을 내밀어 부산의 수많은 헌터를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시킨 희대의 사기꾼!

희대의 사기꾼 최 팀장과 사기꾼 이세기가 붙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실수로 밝혀지는 순간, 이세기는 참전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서울 수복 작전 참전 서약서에!

‘그 미친 난장판으로 이세기를 치워 버릴 수 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당연히 실수……!”

이 순간 보였다.

휙, 휙-

장난스레 허공에 딱밤을 날리며 입 모양으로 말하는 이세기의 모습이.

‘ㅁ ㅁㅁㅁㅁ. ㅁㅁ, ㅁ ㅁㅁ ㅁ ㅁㅁ.’

‘잘 생각해라. 절대, 나 혼자 안 간다.’

머릿속에서 입 모양이 해석되는 순간 말이 이어졌다.

“실수가 아니라 사기지! 분명히 사기 치려는 의도가 있었다! 난 확신한다!”

“그렇지! 야, 봤지? 일대일 무승부다! 더 주장할 거 있냐? 공정하고, 중립적인 고등학생 유희연 부를까? 카캬카캌-.”

염동 대협과 자신의 도움을 받았지만, 공정하고 중립적인 고등학생 유희연!

카캬카카캌-

천문석이 승리의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하하하하하-

최 팀장은 호탕하게 마주 웃으며 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아뇨. 공정하고 중립적인 유희연 학생은 부를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보는 순간 납득할 증거가 여기 있거든요.”

딸깍-

녹음기가 재생되고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법리 검토? 야, 너 이렇게 계속 낚시질하다가 언젠가 제대로 임자 만나면……!]

“앗 죄송합니다! 전에 쓰고 아직 안 감아 놔서 잠시만!”

다급히 테이프를 감고 다시 재생을 누르는 최 팀장.

딸깍-

[……계약서 뒷면에 사인한 건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야, 됐냐 이 또라이…….]

최 팀장은 잽싸게 녹음기를 멈추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들으셨죠?!”

“녹음기? 와, 준비 철저한 거 봐! 그리고 이거,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은데? 야, 아무나 녹음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건 아니지! 그 녹음기 줘 봐. 얼른 가서 녹음해 올 테니까!”

“녹음한 사람 아무나가 아니라, 법률 전문가입니다!”

“변호사? 야, 목소리에 증명서가 붙은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믿어? 전혀! 1도 설득 안 됐다. 이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천문석이 어이없어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갑을 꺼내 펼치는 최 팀장.

“이걸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뭐야? 혹시 변호사 명함이라도……?”

최 팀장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밀었고 예상대로 그 손에는 명함이 놓여 있었다.

“하- 야, 명함 보여 줘도 소용없어. 그게 진짜라는 보증이…….”

[이지광 검사]

피식 웃으며 말을 잇던 천문석은 명함을 보는 순간 굳어 버렸다.

이지광 검사?

특급 헌터 친구!

그 검사 할아버지?!

‘아니, 이분이 여기서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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