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64화>
“…….”
이세기를 미친놈 보듯 바라보던 칠성파 보스 마혁진이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을 봤다.
똑같은 미친놈 보듯이!
“뭐야? 왜 저런 눈으로…….”
‘아차!’
깃발을 꽂는다는 건 1세대 헌터들! 그중에서도 같은 PC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던 이태성 패거리가 퍼트린 문화다!
그것도 서울 수복 작전이 성공하고 거점을 먹은 조폭 길드들이 몰락한 후에!
즉, 지금 깃발을 꽂자고 말하면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다!
“깃발 꽂자는 건 그러니까…… 온라인 게임에서 유래한 건데, 일종의 다이다이 한판 붙자는 말…….”
염동 대협 마혁진은 재빨리 설명했다.
이때 툭 튀어나온 말이 설명을 끊었다.
“하, 너희 겜돌이 새끼들 동료였냐? 그래 한판 붙자!”
“…….”
2004년의 자신은 게임 하는 녀석들을 싫어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각성하기 전 모시던 보스가 혈맹 온라인 폐인이라 매일매일 경험치 먹인다고 개고생을 했으니까!
처음 이태성 패거리를 좋지 않게 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런 거 아니다.”
재빨리 설명하려는 순간.
이세기의 외침이 들려왔다.
“야! 시간 없다니까! 얼른얼른 대충 처리해! 빨리 안 하면 내가 정리한다!”
순간 염동 대협과 칠성파 보스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이세기 새끼.”
“시바 새끼.”
두 사람은 염동력장을 끌어올리며 동시에 한 걸음 내디뎠다!
아득한 인과의 그물이 날아오는 이 순간.
염동 대협과 칠성파 보스의 결전이 시작됐다.
최강의 각성력이라 불리는 염동력자 간의 대결.
그러나 그 실체는 겉모습 이상이었다.
2020년 마혁진 vs 2004년 마혁진.
서로 다른 시공의 두 마혁진은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염동력장을 펼치고!
우르르르르르-
공기가 요동치고 사방에 널린 가구와 집기가 들썩였다.
그리고 서로의 염동력장이 닿는 순간.
콰르르르릉-
의자, 그림, 조각상, 테이블, 소파! 온갖 가구와 집기가 모조리 역장으로 끌려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칠성파 23층 펜트하우스에 순식간에 염동력장의 태풍이 몰아쳤다.
* * *
“염동력장!”
“이세기 준장님! 막아야 합니다! 혹시 치명상이라도 입으면 작전에 엄청난 영향이…….”
김 대리와 최 팀장의 경악한 외침.
천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준장 아니라니까! 됐어. 금방 끝난다. 그보다 저기 당구대! 기절한 애들 챙겨. 빨려 들어가면 치명상 입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최 팀장은 깜짝 놀랐다.
그르르르르륵-
당구대가 기절한 칠성파 중간보스들을 밀대처럼 밀고 역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무리 조폭이라도 자신은 국가 공무원이다. 눈앞에서 역장에 끌려 들어가 아작 나는 꼴을 볼 수는 없다.
“김 대리! 특무대! 저기 조직원부터 빼낸다!”
“넷! 가자, 호석아!”
“아니, 난 왜 계속……?!”
“저도 도와드릴게요!”
최 팀장, 김 대리, 한호석에 유희연까지 모두가 기절한 중간보스들을 구하러 달릴 때.
천문석은 마혁진의 책상 위를 훑었다.
쓰으윽-
기감을 일으킨 손이 흑단으로 만든 묵직한 책상의 옆을 훑자 바로 감이 왔다.
‘여기다!’
탁- 버튼을 누르자 책상 위가 열리고, 마이크와 버튼이 잔뜩 달린 콘솔이 나왔다.
방송용 설비!
염동 대협 마혁진이 결자해지를 끝내면 바로 2단계로 넘어간다.
칠성파 빌딩에 모여들어 약탈 중인 헌터와 짐꾼의 해산!
빌딩 전체에 방송할 수 있는 마이크가 손에 들어온 이상 어렵지는 않을 거다.
진심을 담은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건 자신의 특기니까!
“카캬카카카- 그럼 전투 구경을 해 볼까? 마혁진 확실히 실력이 늘었네!”
천문석은 염동력장이 뒤엉키는 전투를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무인, 헌터의 싸움과는 판이한 양상!
우르르르르릉-
역장이 충돌하는 매순간 우렛소리가 울려 퍼지고!
쾅쾅, 콰지지직-
태풍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회전하는 의자, 조각상, 책상이 충돌해 조각난다!
산산조각 난 잔해는 여전히 역장에 잡힌 채 회전했다.
염동 대협과 칠성파 보스는 위성을 거느린 항성처럼. 역장의 태풍을 두르고 접근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며 기회를 노렸다.
염동 대협 마혁진.
검게 탄 얼굴과 바짝 마른 몸.
칠성파 보스 마혁진.
젊은 얼굴과 탄탄한 몸.
같은 사람이지만 겉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전투 스타일은 큰 차이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염동력장을 두르고 염동포탄을 쏘아 보낼 타이밍을 잡았다.
염동 대협은 작은 역장에 수비적으로.
칠성파 보스는 거대한 역장을 두르고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수비적인 염동 대협은 전진하고, 공세를 펼치는 칠성파 보스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
염동 대협이 2보 전진하고 1보 물러설 때, 칠성파 보스는 3보 전진하고 4보 물러섰기 때문이다.
천문석의 무혼에는 무인, 도사, 신선, 요괴, 마물, 괴물, 이족……! 온갖 적들과 수천수만 번 싸운 경험이 새겨져 있었다.
보는 순간 두 사람의 실력과 노림수가 보이고, 앞으로 전개될 전투 양상이 그려졌다.
2020년의 염동 대협 마혁진 vs 2004년의 칠성파 보스 마혁진.
16년의 세월이 놓여 있지만, 전투 스타일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2004년에 이미 전투 스타일이 확립됐기 때문이다.
“하, 새끼. 날로 먹었구나!”
역장에 잡힌 물체가 거대한 믹서처럼 소용돌이치는 살상공간, 염동력장!
염동력장으로 갈아 버리고, 버티는 적은 염동포탄을 쏟아부어 힘을 깎아 낸다!
심플한 만큼 마수와 몬스터, 각성자 모두에게 먹히는 전투 스타일이다.
아직 각성력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2004년에는 이 압도적인 화력을 누구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당연히 염동력은 최고의 각성력이라 불리고, 염동력자 마혁진은 한국 최강의 각성자로 꼽혔을 거다.
극상성, 메인 탱커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가장 먼저 돌진해 가장 늦게 나왔다.
단 한 번도 동료 뒤에 서지 않았고, 단 한 번도 포기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공격이 집중되는 선두에 방패를 세우고 버텼기에 붙은 이름.
철벽 이태성.
안전한 원거리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쏟아부었던 각성자.
가장 위험한 선두에서 모든 공격을 받아 낸 각성자.
창과 방패의 승부는 뻔했다.
모든 것을 갈아 버리는 살상공간, 염동력장?
무엇이든 깨트리는 초음속 탄환, 염동포탄?
믹서에 쇳덩이를 돌리고, 거대한 암반에 총탄을 쏟아붓는 것과 같다.
결코, 꺾이지 않는 철벽 앞에 염동력장의 칼날은 부러지고 초음속 탄환은 튕겨 나갈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염동 대협 마혁진과 칠성파 보스 마혁진의 차이였다.
16년의 세월.
반도 안 되는 각성력.
개고생에 폭삭 늙고 상한 몸.
2020년의 염동 대협 마혁진은 모든 면에서 2004년의 깡패 두목 마혁진에게 밀렸다.
그러나 염동 대협 마혁진만 가진 게 있었다.
철벽 이태성 길드장과의 일대일 승부, 깃발전 패배.
그리고 신동대문, 지하 터널, 열사의 사막으로 이어지는 연속된 패배.
수많은 패배의 경험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냈다.
원래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이다.
당연했다. 승자는 방심해도 패자는 방심할 겨를도 없다.
패배했는데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빡세게 굴러야 하니까!
염동 대협 마혁진은 빡세게 굴렀고 잘생긴 얼굴과 젊고 건장한 몸을 잃는 대신 실력을 얻었다.
이 승부 염동 대협 마혁진이 이긴다.
압도적으로!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나겠는데.”
천문석이 말하는 순간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허억!…… 부탁드립니다!”
국정원 최 팀장이 숨을 몰아쉬며 절절한 감정을 담아 외쳤다.
“이세기 준장님! 대한민국의 앞날이 걸린 작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부디 힘을 보태 주십시오!”
* * *
‘와, 이걸 벌써 다했어?!’
어느새 30여 명의 칠성파 중간 보스 전원이 바닥에 고정된 책상 주위에 눕혀 있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는 네 사람이 보였다.
“전부 옮겼습니다. 헉-.”
“헉, 흐억- 난 왜?!”
“하, 하아-.”
김 대리, 한호석, 유희연.
그리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자신을 향해 외치는 국정원 최 팀장!
“부디 도와주십시오! 이세기 준장님!”
세기말 대한민국에서도 느꼈지만, 최 팀장 이 녀석 보통 끈질긴 게 아니었다.
구인창으로 쥐어박아 2, 3일쯤 재우면 간단히 꼬리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 팀장은 사익이 아닌 국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쥐어박았다가 나비효과라도 일어나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얼렁뚱땅 넘어간다!’
“야, 나 이세기 준장이 아니라니까!”
“아니, 아까 동료분도 분명 이세기라고…….”
“이세기가 아니라, 이 새끼라고 한 거야!”
“네? 이 새끼요?”
“이 새끼 빠르게 말해 봐! 이새끼, 이세끼, 이세기? 어때? 이세기로 들리지?!”
“…….”
불신 어린 시선!
전혀 믿고 있지 않다!
천문석은 재빨리 단어를 바꿨다.
“야, 따라 해 봐. 햄버거 님!”
“갑자기 그게 무슨?”
“따라 해 보라니까! 햄버거 님!”
“……햄버거 님?”
“더 빨리! 계속해서!”
‘아니, 이게 뭔 지랄이야?’
최 팀장은 마음과는 달리 빠르게 말을 반복했다.
“햄버거 님, 햄버거 님, 햄버거 님, 햄버거 님……!”
수십 번 반복하고 이세기 준장을 보는 순간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행보관님으로 들리지? 이세기도 그랬던 거야!”
“…….”
‘……이 새끼 이거! 미친 거 아냐?!’
동료가 한국 최강의 각성자와 격전을 펼치고 있는데, 이런 고이다 못해 썩은 농담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고 주먹을 휘두를 뻔했다.
이세기 준장의 동료, 염동 대협이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라고 외쳤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니까!
이런 녀석은 게이트가 열린 후 난장판이 된 한국! 아니 전 세계 어디서도 본 적 없었다!
마음속에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늘은 왜 이런 녀석한테 이런 재능을! 놀라운 천재성을! 몰빵 했단 말인가!’
황당함과 어이없음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미쳤건 또라이건 상관없다.
작전 성공률을 올리기 위해 깡패 두목 마혁진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작전 성공률이 올라가고 인명 피해를 줄일 수만 있다면 백 번이건 천 번이건 허리를 숙이고 설득한다!
최 팀장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비비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역시 이세기 준장님! 유머 감각도 탁월하시군요! 하하하-.”
최 팀장이 잽싸게 아부하는 순간.
천문석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이세기 준장 아니라니까! 야, 내가 알아듣게 잘 설명했잖아!”
최 팀장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귀에 쏙쏙 박히는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세기 준장님이 아니셔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엄청난 작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 방에 서울을 수복하고 전 국토를 탈환할 작전! 이세기 준장님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썩은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끝까지 이세기 준장이라고 부르는 이 모습!
‘와, 이 녀석 강적이네!’
국정원 최 팀장의 끈질김의 이유는 말 속에 담겨 있었다.
한 방에 서울을 수복하고 전 국토를 탈환할 작전, 서울 수복 작전이다!
최 팀장은 서울 수복 작전에 자신과 염동 대협이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 수복 작전을 도와주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과 마혁진은 장철 헌터가 깨어나는 즉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서울 수복 작전을 성공시키고 포텐을 터트릴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검은 폭풍 이세영.
이태성, 장철, 추이린…….
피와 생명으로 길을 열었던 1세대 헌터들.
물론, 이 작전에서 1세대 헌터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었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서울 수복 작전은 역대 최고의 전투 예지 능력자 검은 폭풍이 직접 참여해, 모든 힘을 쏟아부어 성공시킨 작전이다.
자신이 아는 검은 폭풍, 이세영 선생님은 누군가 희생해야 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을 희생할 분이셨다.
많은 피가 흐르고 생명이 스러졌다.
하지만 이세영 선생님이 선택하셨다면 그게 최선이었다.
“…….”
천문석은 문득 밤하늘을 봤다.
산속 사당의 고아 소년.
동네잔치를 싹쓸이한 천문사의 주지.
마도 18문의 지존.
전생을 기억하는 알바.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고, 하늘을 찢을 힘을 손에 쥐었다.
그럼에도 하늘의 인과는 아득하여 그 끝을 헤아릴 수 없고, 원하는 것을 얻는 건 쉽지 않았다.
하늘의 인과의 끝을 보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건 신을 자칭하는 마신과 천년을 산 요괴선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게 가능한 건 오래된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그분뿐이리라.
영혼육백을 태운 빛으로 세계를 키우고, 기원이 담긴 돌로 혼돈에 금을 그어 질서를 세웠다.
커다란 은혜로 세계를 키워 냈으나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으니.
삼천세계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모든 세계를 유랑하신다는 상(上).
상이 나타난 세계에서 비극은 희극으로, 눈물은 웃음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런 상조차도 가지 않은 세계에 웃음을 울려 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
천문석은 문득 손을 뻗어 흔들었다.
염동력장의 폭풍이 충돌하며 날아온 대리석 조각을 튕겨 내며 고개를 저었다.
“서울 수복 작전은 내가 도와줘서는 안 된다.”
“……!”
최 팀장은 말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대번에 깨달았다.
‘도와줄 수 없다가 아니라 도와줘서는 안 된다고?!’
순간 광화문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 퍼졌던 목격담들이 떠올랐다.
-불꽃의 기사.
-인간형 거대로봇.
-하얀 날개를 가진 신의 사자.
-황급 갑옷을 입은 외계 종족.
……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목격담이지만, 국정원과 CIA가 공동조사로 이 모든 게 사실이란 걸 밝혀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세기 준장의 행적도 있었다.
예언자란 이름으로!
최 팀장의 머릿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번쩍 떠올랐다.
“……!”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세기 준장을 보는 순간 벼락 치듯 깨달았다.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예언자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일을 해냈다.
그리고 땅으로 꺼지듯 홀연히 사라졌다가 4년 후 지금 부산에 나타나 서울 수복 작전에 자신이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말이 되는 설명이 하나 있다.
이세기 준장이 예언자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