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51화>
“…….”
마혁진은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점점 환해지는 부산 시가지를 바라봤다.
시가지가 밝아질수록 머릿속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4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버티는 헌터들, 던전과 균열을 해결하는 헌터들은 헌터 업계의 바닥이었다.
헌터 업계의 최상층부는 강릉, 대전, 울산, 목포…… 전국의 거점을 확보한 거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거물 중에서도 최고의 거물이 국민 대다수가 피난 온 부산을 먹은 칠성파 보스, 마혁진 자신이었다.
이태성과 1세대 헌터 대부분은 서울과 던전에서 구르던 애송이들.
자신의 염동력장과 염동포탄의 포화를 막아 낼 각성자는 한국에 없었다.
한국 최강의 초능력 각성자.
초대형 조폭 길드 칠성파 보스.
준 안전지대 부산의 땅과 부동산.
일본 야쿠자와의 밀수 루트.
엄청난 현금이 쏟아 내는 유통과 유흥.
2004년의 마혁진은 말 그대로 부산의 황제였다.
그리고 부산의 황제가 바로 대한민국의 황제였다.
힘과 세력,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경찰, 검사, 정치인을 눈 아래로 내려다봤다.
이때 하나의 계획이 세워졌다.
서울 수복 작전.
전국의 각성자들을 부산으로 모아 남해, 서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 번에 서울을 탈환한다는 계획.
헌터 업계의 거물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서울은 5개의 마경이 중첩해서 열린 마경 중의 마경이었다!
이 위험한 작전에 참가하는 보상이 고작 몇억의 돈과 서울 땅. 그리고 사면이었다.
이미 자신의 거점, 도시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는 거물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보상이었다.
아니 오히려 서울 수복 작전이 성공하면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서울 수복에 성공하는 순간, 거물들이 장악한 도시에 모이던 물자와 사람이 사라질 테니까.
스스로의 권력과 영향력을 줄이면서까지 서울 수복에 나설 거물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안전지대 제주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재벌과 정치인,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수복 작전에 목을 매는 건 군과 정보기관, 헌터와 일반인들뿐이었다.
당연히 거물 중의 거물, 부산의 황제 마혁진도 마찬가지였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국정원 직원 두 사람이 찾아와 1억 원과 서울 땅, 사면을 보상으로 참전 서약서를 내밀었던 그날 밤이.
“…….”
도박꾼 아버지의 손에 끌려온 언니를 찾아온 어린 각성자가 소란을 피웠고.
빚을 지워 둔 서울대성당 신부가 호남평야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린 각성자는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했고, 걸림돌이던 신부가 사라진 서울대성당은 적당히 밀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신부가 사라진 서울대성당은 겨울을 버틸 수 없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하기도 전에 빚 탕감과 980원을 대가로, 나이 든 수녀와 수십 명의 아이 모두를 내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2005년 서울대성당을 철거하던 그날, 서울 수복 작전이 시작됐다.
거물들은 모두 빠진 헌터 업계의 애송이와 바닥에서 구르던 각성자들로만 이뤄진 작전.
예상대로 7할이 넘는 헌터가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동서남북, 중앙 5개 게이트 봉인에 성공했다.
서울 수복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전국의 거점을 먹은 거물들, 제주도에 성채를 세우던 권력자들이 단단히 움켜쥐었던 힘과 세력, 돈과 권력은 모래처럼 사라지고.
서울 수복 작전을 성공시킨 서울에 거점을 유지하고, 쉴 새 없이 던전과 균열을 해결하던 헌터 업계의 애송이와 각성자들의 시대가 열렸다.
“…….”
마혁진은 문득 스스로를 봤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과 거친 피부.
그 어디에서도 부산의 황제, 한국 최강의 각성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태성이 피와 땀으로 돌을 깎아 기반을 하나하나 다질 때.
자신은 돈과 폭력, 권력으로 빠르게 얼음 성채를 쌓았다.
돈과 권력, 힘과 세력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자 얼음 성채는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이태성.
이름조차 몰랐던 애송이가 비상하는 동안 끝없이 추락했다.
부산의 황제.
칠성파 보스.
한국 최고의 초능력 각성자.
서울 수복 작전에 빠진 겁쟁이.
사냥터나 통제하는 퇴물.
깡패 두목.
현상 수배자.
도망자.
……
수많은 아이가 자라나던 서울대성당을 밀어 버리면서까지 가지려던 돈과 권력, 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건 이름뿐이다.
이태성 길드장에게 찍힌 1세대 헌터 염동력자 마혁진.
점점 환하게 밝아지는 부산 유흥가에 있는 2004년의 마혁진.
흐릿한 가로등 아래 어두운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2020년의 마혁진.
“…….”
마혁진은 이 거대한 간극에 멍하니 시가지를 바라봤다.
이때 어둠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배! 진짜로 내 일당 떼어먹으려고?!”
“야! 기름 만땅으로 채워 준다니까!”
“와! 이런 게 어디 있어! 전투 수송단 드라이버를 누가 기름값으로 부려 먹어!”
“김밥 먹었잖아! 영희 수녀님 김밥 한 줄에 100만 원짜리야! 네가 나한테 돈을 줘야지!”
“와! 이제 갈취까지! 나 돈 받을 때까지 절대 안 나가! 여기서 살 거야!”
“잘됐네! 영희 수녀님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시는 것 같은데. 잘 부탁한다! 하하하-.”
“와, 와! 할배! 진짜 이러기야!”
판자촌 방향 어둑한 도로에서 노신부와 트럭 운전사가 나타났다.
마혁진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노신부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왜 밖에 나와 계십니까? 오늘 힘드셨을 텐데 쉬고 계시지!”
빠르게 걸어와 호의 어린 얼굴과 목소리로 말을 붙이는 노신부.
“…….”
마혁진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노신부를 바라봤다.
“쌀쌀하니까. 얼른 들어오세요. 손님방에 제가 전기장판 넣어 놓겠습니다.”
노신부는 씩 웃으며 속삭이듯 말하고 정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아라.”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캔맥주가 잡혔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용히 있다가 떠나라는 뇌물이다.”
문득 고개를 들자 운전기사의 날카로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난 물렁한 할배랑 수녀님이랑은 달라. 조금이라도 헛짓거리하면 머리에 마탄을 박아주겠다.”
트럭 운전기사는 재킷을 슬쩍 걷어 리볼버를 보이고는 정문으로 달려갔다.
“할배! 같이 가!”
“…….”
마혁진은 멀어지는 신부와 운전기사를 멍하니 바라봤다.
신동대문에서 천문석과 얽히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16년 전 과거로 오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게다가 원래라면 호남평야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신부와 트럭 운전기사가 무사히 돌았다.
자신이 염동력장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던 마수와 몬스터를 갈아 버려 무사히 쌀을 가지고 서울대성당으로 돌아왔다.
산처럼 쌓인 생필품과 아직 많이 남은 쌀 포대들.
서울대성당의 모두가 겨울을 나기 충분한 식량과 생필품이 준비됐다.
자신이 과거를 바꿨다.
던전 속 과거를 바꿨으니 2020년 현재도 바뀌는 건가?
노신부와 나이 든 수녀, 트럭 운전사, 수십 명의 아이는 서울대성당, 이곳에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바로 고개가 흔들렸다.
서울대성당은 이미 찍혔다.
지금은 서울 수복 작전으로 군과 각성자 모두 정신없는 시기. 군과 각성자의 도움을 받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곳 서울 대성당을 찍은 깡패 두목은 부산의 황제 마혁진이니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
마혁진은 손에 쥐어진 캔맥주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움직였다.
희미한 웃음이 날아오는 서울대성당.
능선을 따라 줄줄이 이어진 허름한 판잣집.
서울대성당, 판잣집과 달리 점점 환하게 밝혀지는 부산 유흥가.
부산 유흥가에 시선이 멈추는 순간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마혁진은 환하게 밝혀진 유흥가를 향해 걸었다.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길을 헤매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
호남평야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신부가 돌아온 오늘.
국정원에서 서울 수복 작전 참전 서약서를 가지고 칠성파 두목을 찾아온다.
모든 것이 변한 그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마혁진은 칠성파 보스, 깡패 두목 마혁진의 사무실이 있는 유흥가로 향했다.
2004년 늦은 가을의 부산.
부산의 황제, 칠성파 보스가 있는 장소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도박중독 아빠에게 끌려간 언니를 찾는 여고생.
옆집 여고생에게 길잡이로 잡혀 온 꼬맹이.
서울 수복 작전 참전 서약서를 든 국정원 최 팀장과 김 대리.
캔맥주를 손에 쥔 채 홀린 듯이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마혁진.
그리고 소리 없이 마혁진 뒤를 쫓는 사람이 있었다.
“쟤는 어디 가는 거야?”
공구 벨트를 차고 장갑을 낀 사람.
지붕 수리를 끝내고 내려오다가 마혁진을 본 천문석이었다.
아득한 인과로 이어진 사람들이 움직이는 순간.
인과를 비틀어 운명을 사는 검은 동전이 반짝였다.
천문석의 잡낭 속에서가 아니라.
마혁진의 주머니 속에서.
* * *
“지하 룸싸롱. 1층 고깃집, 2층 원탁 가라오케, 3층 버킹검 노래방, 4층 얼짱 노래방, 5층 에쿠스 노래방, 6층 당구장…….”
고개를 들어 올리며 간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던 최 팀장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아니 얘네들은 뭔 노래방을 층마다 깔아 놨어?”
김 대리는 도로 넘어 건물 입구의 칠성파 조직원들을 눈짓했다.
“쟤들 보스가 노래방을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그 노래방 좋아하는 보스는 언제 오냐?”
“…….”
무엇을 묻던지 바로바로 대답하던 김 대리의 입이 굳게 닫혔다.
당연했다.
칠성파 보스 마혁진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이 있다는 건물에 도착한 게 벌써 몇 시간 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입구를 지키는 칠성파 덩치들에게 컷 당해 건물 안에는 들어도 가지 못하고 화단에 쪼그려 지금까지 기다렸다.
이미 해가 넘어가 깜깜해지고 유흥업소는 영업을 시작, 손님을 받고 있는데 여전히 마혁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혁진, 걔 오늘 오는 거는 맞냐?”
최 팀장의 질문에 김 대리는 기어들어 가듯이 대답했다.
“아마도…….”
“어떻게 조폭 동선 하나 제대로 파악 못 하냐?”
“……상대가 상대니까요.”
“우리 회사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냐. 입구 지키는 조폭 놈들에게 까이고. 조폭 보스 만난다고 몇 시간을 기다리고. 에휴-”
최 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문득 눈에 밟히는 광경이 있었다.
젊은 여자가 중년 남자의 손에 끌려 칠성파 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한 젊은 여자와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 남자.
건물 앞을 지키는 칠성파 조폭들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경멸과 비웃음.
중년 남자의 발걸음이 조급해지고 곧 조폭들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계단에 섰다.
지하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남자가 지하로 잡아끄는 순간, 넋이 나간 여자의 얼굴에 표정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멈췄다.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생생히 보였다.
무너지듯 쓰러지고, 다리를 잡고 애원하고, 눈물을 쏟아 냈다.
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팀장님! 지금 저거!”
김 대리가 당장이라도 뛰어갈 듯 몸을 일으키는 순간, 여자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황당한 표정으로 계단을 보다가 다급히 계단을 뛰어오르는 남자.
멍하니 이 모습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칠성파 조폭들.
“들어가자.”
최 팀장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대형 자동차 3대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웃음을 터트리던 칠성파 조폭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재빨리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달려와 앞뒤 자동차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자동차에서 쏟아진 각성자들이 좌우로 도열하고 중앙의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고급 정장에 구두.
조폭이 아닌 직장인 같은 분위기.
30대 중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순간 좌우로 도열한 칠성파 각성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부산의 황제, 칠성파 보스 마혁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