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29화>
임제원 실장이 항구로 달려가는 즉시.
아리엘과 에코는 바로 가짜 무림 던전을 열 준비를 시작했다.
시드의 존재 여부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의뢰인이 선택했으니 계약대로 움직여야 한다.
쿵쿵, 쿵쿵쿵-
아리엘은 암반에 마력 회로를 고정할 앵커를 박아 넣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말했다.
“야, 에코! 생각해 보니까. 만약 시드가 있으면 분기점으로 통로 열 수 있잖아? 우리 둘이면 될 거 같은데?”
“이론상으로는 가능한데 ‘분기점’이 뭔지 모르잖아요?”
아리엘은 에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말싸움하다가 헤드락을 걸고 연속 꿀밤까지 때려 박았지만 자신과 에코의 의견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일치한다.
마법의 시작은 상상이다.
열기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세계에 투영하여, 세계가 동조하는 순간 마력은 열기를 뿜어낸다.
이 과정의 핵심은 세계가 동조할 정도의 선명한 상상, 구현(俱現)!
그리고 열기, 냉기, 불꽃, 눈보라, 은하수. 무엇을 구현하던 그 시작은 선명한 상상이다!
단 한 번도 은하수를 본 적 없는 사람이 밤하늘을 가로지른 별의 강을 선명하게 그려 낼 수 없듯이.
‘분기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던전에 심상을 투영할 수는 없었다.
즉, 이 섬에 던전 시드(seed) 가능성을 향해 자라나는 세계의 나무의 새순이 존재하고.
가짜 던전을 여는 순간 공명한다 해도 ‘분기점’을 향해 가지를 뻗게 만들 수는 없었다.
27개의 마탑을 먹고 마도 전생 승리 직전까지 갔던 자신.
시공과 차원을 넘나드는 시간 오류 수정자 에코.
자신과 에코의 힘을 합친다고 해도 모르는 것을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역(逆), 반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선명한 상상과 바람, 소망이 있다 해도 그걸 투영해서 던전을 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세계의 나무를 키워 낸 그분의 기원이 담긴 돌, 운명을 사는 화폐, 마탑과 머릿돌을 모두 지닌 마도왕급의 구현력이 필요하다.
아니면 수십 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간절히 바라고 바라서 영혼육백 존재의 본질에 새겨질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아리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생각해 보니까 괜한 걱정한 거 같다.”
“네? 그게 무슨.”
“우연히 찍은 섬에 던전 시드가 있고? 던전 시드에 심상을 투영할 정도의 바람을 가진 사람까지 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흐흐흐-.”
“하긴 그렇긴 하죠! 하하하-.”
에코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엘과 에코의 웃음소리가 암반을 지대 능선을 타고 숲으로 퍼져 나갈 때.
남일도를 향해 질주한 세 그룹 중, 첫 번째 그룹이 항구에 도착했다.
* * *
쿠우웅-
거대한 페리선이 중앙 항구에 정박하고 다리가 내려지자.
부아아앙-
장갑 SUV들이 줄줄이 항구로 쏟아져 나와 일렬로 도열 했다.
장갑 SUV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예 각성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갑 SUV에서 내리는 한 남자.
한 자루 검을 보듯 날카로운 인상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모으는 카리스마.
각성자들이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설 때.
항구를 감시 중이던 마혁진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철검장! 철검장주가 정예를 끌고 직접 왔다!’
순간 철검장주의 섬뜩한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
“……!”
“……!”
찰나의 순간 인파에 스며드는 마혁진과 칠성파 조직원들.
신동대문 이후 지구와 이세계를 넘나들며 개고생을 한 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철검장주의 칼날 같은 시선이 지나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마혁진의 머리가 파파팟- 불꽃을 튕기며 돌아갔다.
타깃을 쫓아 도착한 섬 남일도!
항구를 감시하며 의뢰인이 도착하길 기다리는데 의뢰인보다 철검장주가 먼저 찾아왔다!
철검장주가 남일도에 찾아온 목적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쿵, 쿵, 쿠쿵-
쉴 새 없이 항구에 접안하는 배와 배에서 쏟아지는 각성자들과 같은 목적이다!
무림 던전!
남일도에 나타났다는 무림 던전 때문이다!
그리고 철검장주의 계획도 감이 왔다.
남일도의 유일한 항구에 알을 박을 생각이다!
‘하필이면 남일도에 무림 던전이 나타나서!’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 절로 분통이 터지는 상황!
이대로 항구에서 기다리면 철검장주에게 걸리는 건 시간문제다!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은 각성자들을 쏟아 내는 배를 타고 튀는 거다!
그러나 배를 타고 튀면 의뢰 대가로 받기로 한 ‘사면’은 물 건너간다!
간신히 얻은 재기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무림 던전을 찾아 남일도 안으로 흩어지는 각성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흩어지는 것!
마혁진은 항구에서 시작해 동서로 뻗은 도로를 가리켰다.
“인원을 나눈다. 너, 너 2명은 항구를 감시한다. 남은 인원은 반으로 나눠 저 도로를 타고 동서로 나눠 이동한다. 혹시 타깃을 발견하면 절대 접근하지 말아라! 의뢰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명령을 내리는 즉시 칠성파 조폭 헌터들은 강물로 흘러드는 냇물처럼 각성자들 틈으로 스며들었다.
마혁진은 부하들이 흩어지는 즉시 동쪽으로 이동하는 각성자들 틈으로 끼어들어 움직였다.
항구가 멀어지고 남일도 남동쪽 고지대가 천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마혁진은 연신 항구와 남동쪽 고지대를 번갈아 봤다.
어째서일까?
분명 합리적인 판단을 했는데…….
늑대 굴을 빠져나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괜한 생각이다!’
마혁진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버리고 남일도 남동쪽 고지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이때 장철 헌터는 남일도 동쪽 고지대의 정상,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파탑이 우뚝 서 있는 공사 중인 건물.
무림 던전을 위장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었다.
* * *
“와! 본격적으로 공사 중이네!”
장철 헌터는 산 아래 능선과 해안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했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중장비가 도로를 뚫고, 해안가에는 항구가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나무와 능선에 절묘하게 가려져 섬 남동쪽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공사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중국 최고 권력자를 배경으로 두고도 이렇게 치밀한 위치 선정이라니!
과연 추진력과 치밀함을 동시에 갖춘 장민다웠다.
하지만 장민은 풀 수 없는 난제를 만나 서울로 날아간 상황이다.
특급 헌터!
대형 사고를 쳐 엄마를 소환한 꼬맹이!
엄마를 보고 경악한 특급 헌터와 엉덩이를 팡팡 때리는 장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크크킄- 힘을 내라 특급 헌터!”
웃음을 삼키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옥상에 전파탑이 우뚝 서 있는 건축 중인 건물!
장철은 옥상 전파탑을 향해 외쳤다.
“야, 후식이네 꼬맹이! 문 열어! 나다!”
핏, 피피핏-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아지랑이 같은 투명한 덩어리가 벽을 타고 이동 3층 높이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지랑이에서 튀어나온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쓴 한경석!
[…….]
곧 의심스러운 시선이 전신을 쓱 훑더니 기계음이 돌아왔다.
[누구? 친한 척 곤란.]
“야, 나야! 장철! 너희 삼촌 선배! 기억나지?!”
[…….]
여전한 의심스러운 시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야, 우리 얼마 전에 부산 고깃집에서 같이 한우 구워 먹었잖아?!”
[부산 고깃집? 기억이 잘…….]
한경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와! 야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잖아! 아 그렇지! 그때 너 바로 옆에서 한우 흡입하던 꼬맹이 기억나지? 내가 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경석의 깜짝 놀란 외침이 돌아왔다.
[특급 헌터!]
“어, 맞아! 내가 특급 헌터 삼촌이다!”
이 순간 경악한 외침이 쏟아졌다.
[삼촌? 특급 헌터한테 삼촌 있었어?! 어, 잠깐 그럼 장민 대표님이랑 관계가……?!]
“내가 장민 친오빠야!”
[…….]
마치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긴 침묵 속에 어이없어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구라즐!]
“아니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유행어야? 그런 말은 어디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빙글 몸을 돌리는 한경석.
장철은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번쩍 하늘로 들어 올렸다.
“잠깐! 가지 마! 여기 증거 있다!”
한경석이 멈춘 순간 잽싸게 앨범을 실행해 사진을 띄웠다.
특급 헌터, 장민과 함께 찍은 사진.
[진짜였어?!]
피피피핏-
한경석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가.
기이이익-
육중한 강화 철문을 열며 뛰어나와 외쳤다.
[특급 헌터 삼촌!]
[얼른 들어오세요!]
[바로 던전 입구로 안내할게!]
[연구원들 아직도 고정 못 했어!]
……
한경석은 앞장서 계단을 오르며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냈고.
장철 헌터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너무나 생경한 기분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경석!
어린 시절 몇 번이나 봤고, 몇 주 전 부산 고깃집에선 바로 옆 테이블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런데 특급 헌터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는 자신을 장철이 아닌 특급 헌터 삼촌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결론은 명확했다!
[1세대 헌터 장철 <<< 특급 헌터]
장강의 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나듯.
자신의 시대는 저물고 특급 헌터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1세대보다 특급이 높았으니까!
“역시 특급 헌터는 이길 수 없는 건가? 하하하-.”
[당연하지! 특급이잖아! 흐흐흐-]
장철 헌터와 한경석은 웃으며 계단을 오르고, 사방에 자제가 널린 사무실을 지나, 위장 벽으로 가려진 공간에 도착했다.
[여기야!]
한경석의 외침에 장강 연구소 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작은 기척 하나 없이 등 뒤에 나타난 강렬한 인상 곰 같은 체형의 헌터!
연구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설 때.
선임 연구원은 갑자기 나타난 헌터를 바로 알아봤다.
“장철 헌터님? 여기는 어떻게?!”
“…….”
장철은 대답 없이 빛이 일렁이는 바위에 한 걸음 다가갔다.
“이게 무림 던전 입구라고?”
“아직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기 전에 고정하도록…….”
[얘네들 엄청 느려! 특급 헌터 삼촌이 장민 언니한테 말 좀…….]
장철은 연구원의 변명과 한경석이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바위를 살폈다.
고산 마을 인근에 있던 첫 번째 무림 던전을 발견한 사람이 장철 자신이었다.
무림 던전과 같은 고유 파동을 가진 던전을 발견했다는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2000년 1월 1일 대한민국 광화문에 최초의 게이트가 열리고 20년.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10,000개가 훌쩍 넘는 던전에 들어갔다.
개방형 던전, 포켓 차원 던전, 각성 스팟, 무림 던전, 아무 생명도 없는 폐허…… 수많은 던전을 클리어했다.
그런 장철이기에 알 수 있었다.
고유 파장, 수치, 형태를 넘어 각성 헌터의 직감에 걸리는 감각!
지금 눈앞에 있는 던전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던전과도 달랐다!
던전 입구가 아닌 출발 직전 KTX 문을 보는 듯한 느낌!
“이거 진짜 던전 맞나?”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지듯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1세대 마력 각성자.
던전, 균열, 게이트 전문가.
재금 공업 창립 멤버 박혁 이사!
박혁 이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네가 찾는 던전을 어떻게 알아보냐고?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직접 보는 순간 바로 감이 올 거야.’
‘이거 진짜 던전 맞나?’
“이거 진짜 던전 맞나?”
방금 전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반복하는 순간 깨달았다.
마침내 찾았음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고정되지 않은 던전이 그토록 찾아 헤맨 던전이다!
세기말 대한민국!
장세린, 자신의 딸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 줄 던전이다!
14시 29분.
가짜 무림 던전이 열리기 31분 전.
장철은 세계의 나무에 돋아나 새순이자 아직 고정되지 않은 가능성, 던전 시드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