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984화>
유람선 후미 갑판.
마혁진은 방금 이세기에게 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사람을 한 명 찾는데 도와달라는 거지?”
“어, 맞아.”
“그 사람이 지금 난장판이 된 저기 푸저우시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이 유람선을 타고 민장강을 내려가는 항로 중간에 있을 수도 있으며.”
“가능성은 충분해.”
“아예 바다로 나가서 남중국 해안가 취우저우, 샤먼. 바다 너머 대만 타이난, 타이중, 타이페이에 있을 수도 있다고?”
“정확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
마혁진은 이세기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니까 남중국 푸젠성 푸저우에서 대만 타이페이까지. 이 유람선이 정박하는 모든 항구에 내려서, 저기 저 단체 관람객이 움직이는 동선을 훑어 이름도 모르는 20대 여성을 찾으라고?”
“맞아! 제대로 알아들었구나! 찾는 순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딱 보는 순간 감이 올 거야! ‘와, 이거 칼 맞는 거 아냐?!’라고!”
탄성을 터트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
마혁진은 생각했다.
‘뭐지,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남중국의 푸저우, 취우저우, 샤먼!
대만의 타이난, 타이중, 타이페이!
남중국 해안 도시 절반 + 대만의 대도시 전부를 뒤져서 사람을 찾으라고?
그것도 이름, 사진도 없이 나이와 성별! 보는 순간 ‘와, 칼 맞는 거 아냐?!’라는 느낌만 가지고?!
이건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었다!
이 제안대로 움직이려면 철검장과 완전히 갈라서야 했다!
아무리 국가 헌병대의 미친 치와와가 뒤에 있어도 따를 수 없는 지시!
마혁진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제정신……!”
“엄청난 대가를 주겠다!”
순간 말을 자르고 뚝 자르고 튀어나온 대답.
‘엄청난 대가?!’
정신이 번쩍 든 마혁진은 눈앞의 이세기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티셔츠에 청바지.
야구 모자와 운동화.
대학생으로 보이는 복장.
게다가 등에 멘 헬스장 철봉까지.
겉모습만 보면 이 녀석이 엄청난 대가를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이세기를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라면, 각성자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원래 헌터 업계는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 많은 곳!
재산이 조 단위인 이태성도 4계절 하와이얀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를 신고 PC방 죽돌이처럼 다니지 않던가?!
눈앞의 이세기는 1세대 헌터인 자신과 김태우 대령을 물 먹인 실력에, 무려 국가 헌병대의 미친 치와와까지 인맥이 뻗어 있었다!
그런 이세기가 ‘엄청난 대가’를 약속했다!
꿀꺽-
마혁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엄청난 대가. 그게 뭐냐?”
“각자도생!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만나도 아는 척 안 한다! 당연히 국가 헌병대의 추적도 바이바이! 그리고 거기에 ‘내 호의’를 얹어 주겠다!”
이세기는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외쳤고.
마혁진은 뒤로 이어질 말, 대가를 기다렸다.
“…….”
“…….”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말을 들려오지 않았다.
“……끝?”
“어, 끝.”
‘……야, 이 미친 새끼야!’
마혁진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각자도생! 만나도 아는 척 안 하기? 그리고 뭐, 호의? 이세기 새끼의 호의?! 이게 엄청난 대가라고?!
‘이 새끼가 돌았나?!’
눈앞의 이세기 놈이 남중국의 절대자 천검도 아니고 ‘호의’를 사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니, 그전에 앞으로 만나도 아는 척을 안 할 거면, 호의를 사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다른 놈이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했으면 염동 포탄부터 때려 박았을 거다!
그 정도로 이세기의 제안은 말도 안 됐다.
하지만 더 말도 안 되는 건 이 제안에 확 끌리는 자신이었다.
‘하, 시바! 내가 미쳐 가는구나!’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었다.
마혁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이세기를 살폈다.
휘, 휘이-
이세기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던지고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강물 너머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기습하면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허술한 모습!
그러나 직접 싸운 마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세기 이 새끼의 더럽게 짜증 나는 전투 스타일과 그보다 더 무서운 불운을!
깃발을 꽂은 광장에 초거대 괴수가 튀어나오는 말도 안 되는 우연!
그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몇 번이나 반복됐고 자신과 부하들이 거기에 휩쓸렸다.
이태성 길드장에게 찍히고도 악착같이 십 년이 넘게 버티던 자신이!
이세기 새끼랑 얽힌 순간,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망해 버렸다!
폭삭, 완전히, 순식간에!
순간 머리를 스치는 기억들!
열사의 사막, 오아시스, 스카라베 징수관!
그리고 숨 쉬는 것도 돈을 받는 스카라베 강철 도시!
강철 도시에서 개 같이 구르다가 간신히 탈출!
스카라베 징수관들을 피해 고물을 주워 팔며,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열사의 사막을 배회했다!
이렇게 개같이 구르다가 이세기를 만나 환호하기도 잠시.
미친 맹공을 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나니 개같이 버려진 후였다!
‘시바시바! 이세기 시박 새끼!’
기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끓어 올랐다.
마혁진을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호흡을 고르며 스스로 외쳤다.
‘난 예전의 칠성파 조폭 마혁진이 아니다!’
‘깨끗이 손을 씻은 칠성 길드 마혁진이다!’
……
간신히 진정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신동대문에서 이세기 놈을 만난 이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이세기와 앞으로 얽히지 않는다는 제안은 솔깃했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여기에 더해진 모순되는 제안, 이세기의 ‘호의’에도 끌렸다.
이세기의 인맥은 생뚱맞게 국가 헌병대의 미친 치와와, 김태희 대령에게도 닿아 있었으니까. 어쩌면 만에 하나지만 먼 미래에 티끌 같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마혁진은 냉철한 이성으로 깨달았다.
결정적인 순간. 앞으로의 인생 전부를 바꿔 버릴 선택의 순간이 왔다!
이세기의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여기서 척을 질 것인가?
문득 오래전 이태성과 완전히 척을 지는 선택을 했을 때가 기억났다.
2020년 1월 1일.
최초의 게이트가 열리고 나타난 최초의 각성자, 1세대 헌터들!
자신도 1세대 헌터였다.
아니, 자신이 한창 이름을 떨칠 때 이태성과 다른 1세대 헌터들은 PC방 죽돌이 출신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놈들과 자신의 처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벌어졌다.
이태성 길드장.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나간 이름!
1세대 헌터들이 엄청난 부와 명예, 권력과 영향력을 얻는 동안.
자신은 전 재산을 날리고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남중국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이 결정적 차이를 만든 건 한 번의 선택이었다.
서울 수복 작전!
수없이 실패했던 그 말도 안 되는 자살 임무에서 빠진 선택!
예상대로 참가한 헌터 대다수가 갈려 나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서울 수복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모든 것이…….
마혁진은 문득 고개를 돌려 강 너머 도시를 바라보는 헌터를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사기꾼, 선동가, 미친놈, 불운을 몰고 오는 더럽게 재수 없는 새끼.
이세기.
이놈한테서 오래전 서울 수복 작전에 참여한 동료들과 비슷한 느낌이 왔다.
실패 확률 100%.
죽음이 예정된 전장.
게이트가 중첩된 마경, 서울.
수없이 실패한 서울 수복 작전에 웃으며 참가했던 동료들…….
‘이번엔 내 차례네.’
‘그럼, 꼬라박으러 갔다 온다.’
‘하- 이제 드디어 혁진이 새끼 서울 수복 작전 이야기 안 듣겠네!’
‘아니지! 이번에 갔다 오면 반대로 우리가 한 10년은 우려먹어야지!’
‘당연하지! 마혁진 저 깡패 새끼 그동안 얼마나 우려먹었냐?!’
‘하! 술을 몇 번을 샀는지! 새끼야, 나 돌아오면 이번엔 네가 술 사라!’
하하하하하-
……
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기억 속 동료들의 목소리와 웃음은 당장이라도 나타날 듯 선명했다.
그 선명한 얼굴과 목소리에는 한점의 원망과 서운함도 없었다.
마혁진은 수백 번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그때 동료들과 같이 참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시 동료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았을까?
검은 폭풍, 이태성, 장철과 함께 싸웠을까?
깡패 두목 마혁진이 아닌 1세대 헌터 마혁진으로…….
이때 들려온 목소리가 마혁진의 상념을 깨뜨렸다.
“야, 이 정도면 충분히 생각했지? 어떡할래? 같이 일할래?”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묻는 이세기.
-할 일은 푸저우시에서 타이페이까지 이동하며 한 사람을 찾는 것.
-대가는 각자도생, 앞으로 아는 척 안 하기와 호의.
‘그냥 받아들일까?’
마혁진은 그렇게라도 이세기 새끼와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갑판 구석으로 시선을 보내자, 옹기종기 앉아 자신과 이세기의 대화를 보고 있는 김기철과 부하들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분노, 10%.
또 개같이 구르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50%.
보스라면 뭔가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40%.
이세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부하들은 겉으로는 분노하면서도 내심 안도할 거다.
이세기와 엮여서 개같이 구른 건 부하들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이대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면 기대감은 무너지고 자신의 권위 또한 추락한다.
재산과 기반을 모두 날리고 남중국으로 도망쳤는데, 권위마저 추락하면 남는 것은 없다!
그 순간 칠성 길드는 완전히 사라진다.
지금 이세기는 혼자! 게다가 별다른 장비 없이 평범한 청바지에 티셔츠, 철봉을 메고 있다!
‘그냥 일제히 들이쳐서 싸울까?!’
그러나 싸우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갑갑해졌다.
이세기와 싸우기만 하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고 망했으니까!
그렇다고 이 제안을 그대로 받으면 보스의 권위가 추락하고 결국 망한다!
지금 망할 것인가?
나중에 망할 것인가?!
이세기는 너무나 불합리한 이지선다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마혁진은 수십 번 고뇌한 후 입을 열었다.
“그걸로는 안 돼. 대가를 좀 더 올려라.”
그리고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새끼야! 내 체면이 상하지 않게 조금만 더 대가를 얹어!’
“대가라…… 아, 그렇지!”
알겠다는 듯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
‘됐다! 적당한 양보만 얻어 내도 권위를 지킬 수 있다!’
마혁진이 내심 안도하는 순간.
이세기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혹시 또 미친 치와와한테 전화 거는 거야? 믿는다니까! 그거 말고 다른 걸 좀 얹으라고!”
“걔 아냐. 너랑 저기 칠성파 조폭들 한에 꼭 필요한 걸 가지고 계신 분이다. 번호가 어떻게 되더라. 명함을 받았는데 최설한테 넘겨서…… 앗! 생각났다!”
돌연 탄성을 터트리더니 빠르게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거는 이세기.
‘이 새끼? 또 뭔 사기를 치려는 거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송신음이 7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띠리, 띠리, 띠리리-
철컥-
그리고 스피커폰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 번호는? 아, 간만에 보이스 피싱이냐?
-잘됐네. 지금 내가 집이 무너져서 그 잔해에서 돌 고르느라 개 빡쳤거든?
-너 멘트 잘 생각해서 신중하게 말해라. 참신하고 재밌게!
-아니면 내일 눈뜨면 던전 광산일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친구와 농담하듯 가볍게 툭툭 던지는 목소리.
“……!”
하지만 마혁진은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자신이 서울을 떠나 신동대문으로 도망쳐야 했던 이유!
‘설마, 설마?!’
“이세기! 설마, 지금 전화 건 사람……?!”
경악한 마혁진이 외치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기? 어, 잠깐 이 목소리 귀에 익은……?!
천문석은 돌처럼 굳어 버린 마혁진에게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이태성 길드장님.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