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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959화 (960/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959화>

“도토리!”

순간 머릿속 기억이 파파팟-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을 대가로 훔쳐 낸 전생의 경지.

-전생의 경지로 구한 최후식과 한경석.

-최후식 이사에게 받은 개미굴 광산에서 아이템을 가져갈 권리

-좁은 개미굴을 몇 시간 동안 기어 도착한 유령 개미 공동.

-그 공동에서 초절정에 달한 무인의 검혼이 담긴 검편을 얻었다.

천하십절의 검절.

무림맹주, 천검 이세기의 검혼.

오랜 친구의 검혼에 상처가 생길까 봐 마침 눈에 띈 도토리를 주머니에 담고, 그 속에 검편을 담아 들고 왔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도토리가 바로 그 도토리였다.

검혼 롱소드는 무림 던전의 이세기에게 전해졌지만, 완충재로 챙겼던 도토리는 무장 상자에 담긴 모습 그대로 침대 아래 놓여 있었다.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시 만난 친우, 천검 이세기.

젊은 무사 이원과 흑사회주 여량위.

얍삽한 초절정 무인, 단혈철검 주호.

산적 같은 외모의 바라카스 발도 스님.

……

무림 던전에서 만난 사람들과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건들이.

생각해 보면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까마득히 오래전에 일어난 것만 같았다.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무장 상자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역시, 뭐든 있으면 쓸모가 생기는 법이다.

검혼 롱소드는 사라졌지만, 무장 상자와 완충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무장 상자에 헬스장 강철봉을 넣어 남중국으로 가져가면 딱이다!

“시작이 좋은데!”

천문석은 희희낙락 도토리가 완충재로 담긴 무장 상자를 들고 거실을 향해 걸었다.

방에서 거실까지 불과 10걸음.

이 10걸음을 걷는 순간,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하늘의 인과가 이어졌다.

한 인간.

한 다람쥐.

도토리 143개.

인과의 시작은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일족의 어린 하늘다람쥐, 신입 차원 용병이 의뢰를 받으면서였다.

첫 의뢰에서 소환자에게 먹튀를 당한 신입 차원 용병.

신입 차원 용병은 엄청난 빚에 절망한 순간 전설의 도토리 숲을 발견했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도토리 숲을 지키며, 온 정성을 다해 케페니안의 빛이 담긴 보물 도토리를 만들어 냈다.

이 보물 도토리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빚을 갚고,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부는 가장 높은 나무를 사겠다는 어린 하늘다람쥐의 절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 낸 ‘보물 도토리’는 총 143개!

계획대로 빚을 갚고, 높은 나무를 사고, 커다란 숲을 사고도 남을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보물 도토리가 완성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정체불명의 도둑에게 전부 도둑맞았다!

킥, 킼키키킼-!

분노한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는 보물 도토리를 찾기 위해 부하인 하늘 고래와 함께 범인을 추적했다!

하지만 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고 게이트 너머 지구의 한 옥탑방에 떨어져, NiKe 신발 속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먹튀를 당한 신입 차원 용병이자.

열심히 보물 도토리를 만든 황금 다람쥐 일족.

그러나 이 보물 도토리를 도둑맞고 지구에 떨어진 어린 하늘다람쥐.

니케였다.

지금 니케가 잠들어 있는 거실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보물 도토리 143’개가 담긴 무장 상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보물 도토리를 가져간 범인, 천문석의 손에 의해서!

니케와 보물 도토리 143개.

천문석과 도토리 완충재 143개.

143개의 도토리로 이어진 인과.

단 하나의 우연도 없었다.

원인과 결과, 인과.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의 인과의 사슬이 예비한 필연의 순간이 마침내 찾아왔다!

한 인간, 천문석.

한 다람쥐, 니케.

도토리 143개, 보물 도토리 143개.

이 셋이 마침내 같은 공간, 옥탑방 거실에 모였다!

쿵-

니케가 잠든 거실 바닥에 무장 상자가 놓이고.

툭-

손을 뻗어 텔레비전 옆에 기대 둔 강철봉을 든다.

“이거 들어가려나? 길이가 좀 애매한데?”

천문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무장 상자를 열고 강철봉을 넣었다.

두르륵-

강철봉에 부딪힌 도토리가 구르는 순간, 잠들어 있던 니케는 번쩍 눈을 떴다.

긴 세월 도토리 숲의 악마로 나무와 도토리를 지켜 왔기에 생겨난 본능!

‘도토리 구르는 소리다!’

저절로 시선이 돌아가고 길쭉한 상자가 옆에 놓인 게 보였다.

‘저 안에 도토리가 있다!’

이 순간 몸에 새겨진 반응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 단숨에 하늘로 펄쩍 뛰어오른다!

이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조차 정지시키는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내가 엄청난 발견을 했어! 이거 봐봐!”

‘대두목!’

니케는 구르던 자세 그대로 죽은 듯이 축 엎드렸다.

타다다다닥-

거실을 달려오는 발소리와 이어지는 다급한 외침.

“앗! 니케?! 방금 움직인 거 같았는데?”

‘……!’

니케는 보육원 시절 점호 때처럼 숨소리조차 죽이고 죽은 척했다.

콩콩, 콩콩콩-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마음을 졸일 때.

두두두두둑-

다시 한번 도토리 구르는 소리와 대두목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알바! 지금 뭐 하는 거야?!”

“강철봉이 좀 길어서 대각선으로 상자에 들어가는지 확인…… 너 손이 왜 그래?!”

천문석은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깜짝 놀랐다.

특급 헌터의 양손이 봄날의 새순처럼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에 닿은 시선을 느끼는 순간 자랑스레 녹색 손을 내미는 특급 헌터.

“완전 멋지지?! 대발견이야! 내가 랩으로 약초 싸다가 알아냈어! 바로 보여 줄게!”

척-

주머니에서 나뭇잎을 꺼내 양손 사이에 놓더니.

이야아아압, 얍얍얍-!

기합을 지르며 미친 듯이 양손을 비비는 특급 헌터.

“다 됐다! 보이지?!”

특급 헌터가 자랑스레 손을 펼치는 순간, 파릇파릇한 녹색 덩어리가 된 나뭇잎이 모습을 드러냈다.

풀물!

특급 헌터의 양손은 나뭇잎에서 새어 나온 풀물이 들어 파릇파릇한 녹색이 된 거다!

‘나뭇잎이 물감도 아니고 이렇게 선명하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거야?!’

황당하고 어이없었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천문석은 바로 확인했다.

“신기하긴 한데. 그걸 왜 하냐?”

“……!”

순간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얼굴.

특급 헌터는 자명한 진실이 부정당한 사람처럼 녹색의 손을 흔들며 말을 쏟아 냈다.

“뭐? 이걸 왜 하는지 모른다고?! 알바! 왜 모르는데?!”

“이 약초 저기 저 현관 옆에 화분! 앙꼬 대장 막대기에서 딴 나뭇잎이잖아!”

“그냥 먹어도 엄청 써서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이렇게 파파팟- 비비면 파릇파릇 초록색이 되잖아!”

“바르면 엄청 시원해! 그리고 이걸 이렇게 먹으면……!”

핥짝-

손에 놓인 나뭇잎이었던 잔해를 핥는 순간 터져 나오는 괴성!

“끄어억- 써! 엄청 쓰잖아! 우웩- 맛없어! 비비니까 10배는 더 쓴 거 같아! 앙꼬 대장은 이걸 어떻게 먹는 거야?! 으으윽- 그냥 버릴까? 안 돼! 지피지기! 나도 먹어야 해!”

핥짝-

으어억-!

핥짝-

끄어어억-

특급 헌터는 나뭇잎 덩어리를 할짝이며 마치 독을 핥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한참 후 파릇파릇 녹색으로 물든 혀를 내밀고 자랑스럽게 외쳤다.

“아바! 이에 어마나 애아아지 아게지?!”

“…….”

천문석은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알바! 이제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너무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가 없어서!

특급 헌터는 원래 이해하기 힘든 아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듣고 보면 그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방금 행동은 뭘 보여 주려는지 그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문지르면 물감처럼 파릇파릇한 녹색 물이 들고, 핥으면 괴성을 지를 정도로 쓴맛이 난다!

‘이게 뭐가 대단하단 말인가?!’

여기서 반문하는 순간 특급 헌터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질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뭐가 대단한데? 녹색 물이 들고 엄청 쓰다고?! 이해가 안 되잖아! 나뭇잎을 왜 비벼서 핥아야 하는 건데?!”

“어, 어어? 이걸 왜 모르지?!”

특급 헌터는 연신 고개를 갸웃하다가 돌연 탄성을 터트렸다.

“앗 그렇지! 내가 직접 시범 보여 줄게! 하늘 이은 다음에 이거 바르고 먹이면 바로 알아볼 거야! 친구들 알바한테 시범……!”

특급 헌터는 신나게 외치며 돌아봤지만, 주위에 동물 친구들은 없었다.

“사슴이? 반짝이? 거복이? 냠냠이! 아, 냠냠이는 집에 갔지. 탱탱이!”

다다닥 달려 베란다와 창문 너머로 옥상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탱탱이도 없잖아! 전부 어디 간 거야?! 앗! 니케!”

특급 헌터의 시선이 무장 상자 옆에 축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는 니케에게서 멈췄다.

“니케! 부두목 니케가 있었지!”

환한 얼굴로 달려와 녹색 손을 들고 외쳤다.

“알바, 잘 봐! 지금부터 내가 이 약초 효과 보여 줄게!”

“아니, 잠깐 뭘 하려고? 설명부터 해 봐!”

“내가 알바한테 배운 대로 하늘이었잖아? 그래서 니케가 이렇게 꼴까닥했잖아?!”

꼴까닥?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을 뿐.

니케는 엄연히 살아 있었다!

아니, 사실은 기절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말의 문맥.

“그렇지.”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특급 헌터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꼴까닥한 니케가 이 완전 멋진 약초를 바르면 어떻게 될까?!”

“……어?”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었다.

이야아아압-

귀에 익은 기합이 터지는 순간!

싸사사사삭-

춤을 추는 파릇파릇한 녹색의 손!

으깨진 나뭇잎이 가득한 끈적끈적한 손이 지나가는 순간 녹색으로 변하는 털!

마치 녹색 페인트를 바르는 것처럼 니케의 새하얀 털과 황금빛 줄무늬는 빠르게 사라졌다!

황금빛 줄무늬가 멋졌던 어린 하늘다람쥐는 초록색 털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잠시 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한 기괴한 녹색 털의 다람쥐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니케였다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뒤집어엎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녹색 칠을 한 사람은 대두목 특급 헌터였다.

“…….”

천문석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할 때.

쓱쓱-

이마의 땀을 닦아낸 특급 헌터가 외쳤다.

“아, 힘들었다! 약초 발랐으니까. 이제 열까지 세면 니케가 벌떡 일어날 거야!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여기서 뭐가 또 있다고?!’

“그냥 여기까지만 하는 게…….”

“당연히 안 되지! 이 약초는 바르는 거로는 1이야 1! 먹으면 10! 아니, 27이야! 알겠지? 효과가 훨씬 크단 말이야! 니케. 얼른 일어나서 약 먹자!”

‘핥기만 해도 괴성을 지르는 약초를 먹이겠다고?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나?!’

오늘 하루 니케가 친 사고가 떠오르고 멈칫하는 순간.

이야아아압-

특급 헌터는 나뭇잎을 양손에 가득 쥐고 손을 비비며 외쳤다.

“하나둘셋! 빨리! 빨리 일어나 니케!”

“넷다섯여섯! 한국 다람쥐는 빨리빨리 일어나야 해!”

“일곱여덟아홉! 니케! 얼른 일어나서 엄청 쓴 약초 먹자!”

특급 헌터는 손에 가득한 약초를 내밀며 외쳤다.

“열!”

그러나 녹색 다람쥐가 된 니케는 여전히 축 엎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 어? 이상하네? 왜 안 일어나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특급 헌터.

천문석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니케는 기절한 게 아니었으니까!’

기감에 잡히는 콩, 콩, 콩- 뛰는 심장 소리!

니케는 장갑 SUV에서 그러했듯이 잠든 척하고 있었다.

전신을 녹색으로 물들이더니 이제는 더럽게 쓴 약초를 먹이려는 대두목의 폭거를 피해서!

이 순간 새삼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특급 헌터 >>> 니케]

태성 빌딩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전술 헬기마저 이태성 길드장의 자택에 떨어뜨리더니.

막을 수 없는 우레 폭풍 마수가 수백의 헌터와 군인들을 압도한 니케!

그런 재앙급 마수 니케조차 특급 헌터 앞에서는 평범한 부하일 뿐이었다.

반항할. 아니,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죽은 척 엎드려 있을 뿐인.

“니케! 니케 얼른 일어나! 이 약초 먹어 보라니까!”

“이상하네? 원래 이거 바르고 열까지 세면 벌떡 일어나는데…….”

“혹시 모자라서 그런가? 앗! 그렇구나! 더 발라야 하는 거구나! 잠깐만 내가 더 발라볼게!”

싸사사사삭-

특급 헌터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이고.

처덕처덕-

으깨진 나뭇잎이 겹겹이 층을 이뤄 발렸다.

니케는 빠르게 녹색의 덩어리로 변해 갔다.

“…….”

천문석은 오늘 태성 빌딩을 공포로 물들인 재앙급 마수의 최후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 약초, 이렇게 많이 발라도 괜찮은 거야?”

“걱정 마! 엄청 많아! 내가 열심히 물 줘서 키웠거든! 알바 가방에 넣어 줄 거 충분해! 앗! 다 했어! 이제 먹을 차례야!”

다다다닥-

특급 헌터는 짐을 싸는 류세연을 피해 현관 옆에 놓인 화분으로 달려가더니.

파파파팟-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한 무더기의 나뭇잎으로 따서 돌아왔다.

그리고 광기마저 느껴지는 번뜩이는 눈으로 말했다.

“이제 니케가 이 약초를 먹을 거야! 잘 봐! 알바! 니케 벌떡 일어날 테니까!”

이야얍, 얍얍-

기합과 함께 순식간에 으깨지는 나뭇잎 잔해!

핥는 순간 고통스러운 괴성이 터져 나왔던 녹색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죽은 척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는 니케의 작은 입을 향해서!

콩콩, 콩콩콩콩-!

니케의 작은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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