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894화>
쿵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핏핏-
한경석은 반사적으로 점멸 이동해 강화 철문에 귀를 붙였다.
철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한두 명이 아니다!
각성력을 끌어올리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인기척이 없어.”
“확실히 해야지. 이름 불러봐.”
“내가 두들겼잖아! 부르는 건 네가 해야지!”
……
처음 듣는 목소리.
후식이 삼촌이 아니다!
긴장이 탁 풀리는 순간 보안 카메라가 보였다.
아차!
한경석은 바로 보안 카메라를 확인했다.
강화 철문 뒤 복도에 늘어선 완전무장한 헌터들이 보였다.
강화 전투복, 헌터용 헬멧!
포획용 그물 총에 진압용 방패!
레이드용 간이 방벽과 스턴봉까지!
‘후식이 삼촌이 보냈구나!’
한경석은 직감하는 순간 바로 움직였다.
이미 장비와 소지품은 옮겨 둔 상황.
친구들에게 줄 물건만 챙기면 된다!
헌터용 배낭에 골드바를 쓸어 담고 벨벳 주머니에 반지, 이름표를 챙겼다.
쿵쿵쿵-
다시 한 번 문이 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계시나요?”
핏-
한경석은 배낭을 메고 점멸 이동 보안 카메라를 다시 확인했다.
헌터들이 수신호를 보내며 움직이고 있다.
복도에 간이 방벽을 엇갈려 세우고, 사이사이 방패와 그물총, 스턴봉을 든 헌터들이 선다!
마수 포획 대형!
문을 뚫고 강제로 진입하려는 기색은 없다.
후식이 삼촌이 올 때까지 자신을 공방 안에 붙잡아 둘 생각이다!
‘하- ’
한경석은 소리 없이 웃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꼼짝없이 잡혔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칠 구멍이 생겼다!
‘친구 덕분에!’
한경석은 재빨리 펜을 들어 종이에 휘갈겨 쓰고 공방 안을 돌아봤다.
전기 고로와 환풍기, 전동 해머 모두 전원이 들어간 상태.
선반 위에는 프레스로 찍어 내고 남은 금붙이와 세공 도구가 널려 있다.
잠깐 자리를 비운듯한 모습. 언제 돌아와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떠날 준비는 끝났다!
한경석은 성큼 재배실로 들어가 선인장에 종이를 붙이고 거대한 화분을 창고 문을 향해 밀었다!
그르르르륵-
거대한 선인장 화분이 문 앞을 가릴 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화분을 끌어당겨 완전히 막았다.
자신의 경고장이 선인장에 붙은 상황!
오리온 길드에 자신의 경고장이 붙은 선인장을 건드릴 간 큰 헌터는 없을 거다!
한경석은 씩 웃으며 창고 안의 선반을 끌어당기고 비품, 서류 박스를 층층이 쌓아 문 앞을 완전히 가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좁은 선반 사이를 지나 사무실 입구로 걸었다.
곧 좁은 공간에 모여 있는 책상과 한 사람이 보였다.
새벽 3시가 지난 시간.
휑한 얼굴의 최설이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문이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최설과 눈이 마주쳤다!
* * *
“…….”
“…….”
잠시간의 정적.
최설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순간 생각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나 못 본 거다. 잠깐 편의점 갔다 오는 거 어때?”
뜬금없는 이야기!
하지만 한경석이 입은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보는 순간 이 뜬금없는 이야기에 담긴 의도가 바로 짐작됐다.
“네! 편의점 갔다 오겠습니다!”
최설은 대답 즉시 사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순간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뒤집어쓴 한경석이 최설 뒤에 바짝 붙었다.
탁, 탁, 탁, 탁-
최설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릴 때.
은신한 한경석은 그 뒤에 바짝 붙어 소리 없이 걸었다.
최설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천천히 보안 게이트를 통과했다.
순간 휘이- 보안 게이트 위로 불어오는 작은 바람!
탁탁, 탁탁탁-
최설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드문드문 사람들이 자리한 로비를 가로질렀다.
이때 빌딩 입구에서 우르르 들어오는 헌터들이 있었다.
중앙의 남자를 중심으로 무장한 헌터들이 뛰듯이 다급히 걸어왔다.
최설은 무장한 헌터들 중앙의 남자를 바로 알아봤다.
오리온 길드, 최후식 이사!
그리고 최후식 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경석이! 사고뭉치 녀석! 지금 상황이 어떻다고?”
“대답은 없지만, 공방 안에 있는 거로 추정됩니다. 전력 확인 결과 공방 안 설비가 가동 중입니다! 길드에 대기 중이던 레이드 3팀을 동원해 복도를 봉쇄했습니다! 언제든 진입할 준비 끝났습니다.”
최후식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지시했다.
“좋아! 우선 대화부터. 바로 설득을 시작한다! 경석이 난동 부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강제 진입은 설득이 실패했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설득에 실패해 강제 진입하게 되면 나 혼자 공방으로 치고 들어간다! 3팀과 다른 인원은 복도를 철저히 봉쇄한다.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봉쇄한 복도에서 놓치고 연속 점멸 시작하면 절대 못 잡는다!”
“지원팀 마력 각성자는 메즈기 준비하고 전원 그물총과 스턴봉 준비한다! 복도 봉쇄 중인 3팀은……!”
최후식 이사가 가까워지며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등 뒤로 바짝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은신 중인 암살검 한경석!
바로 감이 왔다!
암살검 한경석은 오리온 길드의 최후식 이사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다!
‘하필 이렇게 맞닥뜨리다니!’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격이다!
그렇다고 몸을 돌리거나 피할 수는 없다!
고위 각성자의 날카로운 감은 예지나 마찬가지!
약간의 어색함, 이상만 느끼더라도 바로 자신을 주목할 테고 곧 은신한 한경석을 찾아낼 거다!
최설은 생각 했고 바로 움직였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입구를 향해 직선으로 걸었다!
최후식 이사가 가까워지자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빠르게 울렸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일어나고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가려 한다.
상대는 대형 길드의 이사.
게다가 레이드 메인 탱커다.
암살검 한경석만큼은 아니지만, 한국 헌터 업계 상위 1%의 실력자다!
최설은 피곤에 찌든 졸린 표정, 피로에 질질 끌리는 다리로 무심히 걸었다.
그리고 최후식 이사 무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어?”
최후식 이사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들켰나?’
바짝 긴장해 마른침을 삼기며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톡톡, 톡톡톡-
최후식 이사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쏟아졌다!
“또 야!? 어떤 놈이 내 아이디를 해킹한 거야! 대환단 올린 적 없다니까! 뭔 메시지가 이렇게 쏟아져! 야, 헌터 나라에 전화해서 다시 한 번 항의해! 어떤 놈이 해킹했는지 꼭 잡으라고! 그리고 메시지 보낸 애들한테 대환단 올린 적 없다고 답장 보내라! 회원 등급 깎이니까 친절하게 답장 보내라.”
최후식 이사는 비서에게 스마트폰을 건네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왠지 눈길이 가던 피곤에 쩐 각성 헌터.
각성 헌터는 빌딩 입구를 지나 편의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최후식 이사는 알 수 없는 직감에 헌터를 잠시 바라봤다.
헌터는 바로 편의점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컵라면과 맥주를 들고나와 테이블에 앉았다.
하-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새벽에 성채 빌딩에 있는 각성 헌터라면 최소 억대 연봉자.
억대 연봉의 각성 헌터가 피곤에 쩐 모습으로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에 맥주를 먹는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광화문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 계속 대기만 하다 보니 나도 감이 죽나 보네.”
“네? 이사님?”
“아무것도 아냐. 바로 올라가자. 경석이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100kg이 넘는 금이라고? 무슨 돈으로 그 금을 다 산 거야. 하아-.”
최후식 이사와 오리온 길드의 헌터들은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 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
최설은 재금 빌딩을 나온 후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일정한 걸음으로 인도를 가로질러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과 캔맥주를 사 들고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컵라면에 캔맥주를 먹었다.
잠시 후 따끔따끔한 시선이 사라졌을 때 등 뒤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신세 졌다. 기억할게. 최설.]
최설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휘이이-
돌연 불어온 바람이 뒷골목으로 이어졌다.
이 순간 최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해 냈다는 성취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김철수 사무실에 붙어 있는 이유가 지금 같은 상황을 기대해서였다!
상해의 암흑가, 한국 헌터 업계.
어디나 마찬가지다.
누구를 아느냐.
그리고 누가 나를 아느냐.
이게 시작이자 전부다!
암살검 한경석은 천문석 부사장, 특급 헌터와는 친구처럼 동네 누나처럼 격의 없었지만 다른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암살검 한경석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시작이다!
장강 유통!
재금 그룹!
이태성 길드장!
하얀 번개 추이린!
……
김철수 사장과 천문석 부사장의 엄청난 인맥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반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도 삼합회 따위는 상대도 안 될 거대한 힘을 얻게 된다!
새벽 4시!
최설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캔맥주에 컵라면을 먹으며 야망을 불태웠다!
* * *
한경석은 빠른 걸음으로 종로 뒷골목을 걸었다.
후식이 삼촌을 피해 도망치는 중이지만 한경석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는 헌터용 배낭과 검은 벨벳 주머니를 볼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헌터용 배낭에는 프레스로 찍어 낸 1kg 골드바 112개가!
검은 벨벳 주머니에는 한 쌍의 반지와 동물 모양의 이름표가 들어 있다!
천문석.
류세연.
특급 헌터.
자신이 준비한 물건을 받는 순간 환호할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친구.”
너무나 근사한 울림의 단어가 귀에 들려오자 아득히 오래된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고등학교 6년 동안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자신에게 학교는 마경이었고 이 마경의 포식자 일진들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학폭, 왕따, 등교 거부…….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던 하루하루.
후식이 삼촌, 이태성 길드장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을 거다.
너무나 두렵던 일진들과 그들의 배경은 이태성 길드장 앞에 지푸라기처럼 갈가리 찢기고.
후식이 삼촌이 데려간 각성 스팟, 무림 던전에서는 암살검의 각성몽을 꿨다.
그리고 자신은 변했다.
대인전 랭커, 암살검 한경석.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있었다.
스스로의 이름을 쓰지 못하고 경석, 오빠의 이름을 사용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대화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가.
그런 자신을 친구들이 변화시켰다.
-은근슬쩍 견제하더니 어느새 언니, 언니 친근하게 매달리는 류세연.
-강아지부터 꼬맹이, 학생,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만나는 사람 모두와 친한 인싸 중의 인싸 특급 헌터.
-처음 만난 자신과 후식이 삼촌을 구하겠다고 강철 와이번과 정면으로 격돌했던 헌터 지망생 천문석.
천문석을 생각하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각성몽을 꾼 후 언제부턴가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그 기세를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천문석.
황당한 사건·사고에 정신없이 구르고, 어이없는 불운에 뒤통수를 맞고도 허탈한 웃음 한 번에 털고 일어나고.
처음 보는 꼬맹이, 우연히 만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도 별것 아니라는 듯 웃는 사람.
친구, 천문석.
북한산 워터 파크, 평상에서 구워 먹던 고기, 선착순 계단 오르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순간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만나며 텅 빈 가슴에 무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하고 포근한. 그러나 때로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자 모든 게 변했다!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고, 변조된 목소리가 아닌 평범한 목소리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겐 대인전 세계 랭커라는 명성, 암살검이라는 경외와 공포 어린 호칭, 수십 자루의 단검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은 별것 아닌 일에 같이 웃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노는 사람, 친구였다.
천문석은 자신이 처음 사귄 친구였다.
처음 사귄 친구기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단지 친구가 했던 그대로 돌려줬다.
기절한 자신과 후식이 삼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강철 와이번과 격돌하고, 대가 없이 선뜻 변이된 선인장을 건넸다.
바라는 것 없이 같이 놀고, 밥을 먹고, 같이 웃었다.
이 모든 행동에 담긴 마음은 진심.
그렇기에 한경석은 친구가 했던 그대로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빠른 걸음으로 뒷골목을 걷던 한경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높게 솟은 빌딩이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저 빌딩 뒤에 목적지가 있다.
후식이 삼촌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장소, 안전 호텔 본점!
그곳에 친구에게 줄 골드바, 세연의 반지, 특급 헌터의 이름표를 보관하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고 돌아오면 된다!
어디로 피해 있을지도 이미 정해뒀다.
친구와 북한산 워터파크에 갔다가 알게 된 사람, 장민 언니!
장민 언니의 그늘 아래로 잠시 몸을 피하면 된다.
이미 적당한 일 거리를 소개해 달라고 연락을 해 둔 상황!
장민 언니는 강철 해머 장철의 친동생이자 장강 유통의 대표다.
후식이 삼촌. 아니 오리온 길드가 압박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사람이다!
후식이 삼촌의 황당해하는 얼굴이 떠오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카카카카카-
친구를 만난 후 자신의 세계는 하루하루 넓어지고 있었다!
골드바 112개?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한경석은 묵직한 배낭을 멘 채 안전 호텔을 향해 경쾌하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