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869화>
돌멩이!
류세연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전생의 어린 시절의 이름!
이름에 돌 석(石)자가 들어가기에 현생의 학창 시절에도 흔히 불리던 별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류세연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돌멩이라고 불렀다가 분노의 딱밤 응징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눈물을 쏟으며 환하게 웃는 세연.
이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무언가가 뭉클 전해졌다.
그리고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알고 있는데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는 단어처럼 뿌옇게 흐려져 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이!
“……!”
잊었는지도 몰랐던 기억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가며 불렀다.
“적예?”
이 순간 환하게 웃던 류세연은 무너지듯 쓰러져 내렸다.
“세연!”
특급 헌터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을 때 천문석은 한달음에 달려가 쓰러지는 세연을 부축하고 있었다.
* * *
류세연은 침실 안을 돌아봤다.
창밖에선 휘이잉- 거센 바람이 달리고.
침대 위에는 만져질 듯 차가운 달빛이 드리워진 밤.
어린 여자아이가 삐뚤빼뚤한 팔다리와 짝짝이 눈코입을 가진 곰 인형을 안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류세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생처음 바느질을 해 본 사람이 만든 것 같은 비웃는 표정을 짓는 곰 인형에서는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가 누군지는 뻔했다.
어린 시절의 자신, 어린 류세연이다.
문득 지금 보고 있는 이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무서운 꿈을 꿨던 밤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더라?
‘아! 그랬지!’
류세연이 내심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
어린 류세연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문고리를 돌리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휑하게 보이는 커다란 거실을 살금살금 가로질렀다.
차가운 달빛과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흔들리는 그림자뿐. 거실에도 방에도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류세연은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올랐다.
별이 가득한 옥상을 지나 야광 스티커를 붙여 둔 현관문을 열자 너무나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달빛이 드리워진 익숙한 거실.
두툼한 담요가 깔려 있는 익숙한 소파.
그리고 텅 빈 소파 아래 바닥에서 잠든 익숙한 얼굴.
‘텅 빈 소파!’
얼굴이 환해진 어린 류세연은 살금살금 익숙한 거실을 지나.
두툼한 담요가 깔린 익숙한 소파 위로 소리 없이 스르륵- 올라갔다.
그리고 깔려 있던 담요를 머리 위로 푹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웃었다.
우흐흐흐-
‘오늘도 성공했다!’
어린 류세연은 살짝 담요를 들추고 그 틈으로 몰래 봤다.
매일매일 그렇듯 오늘도 소파에서 자다가 거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옥탑방 오빠의 얼굴을!
어느새 차가운 달빛은 포근하게 변했고, 무섭게 울리던 바람 소리도 노래하듯 울려 퍼졌다.
어린 류세연은 한참을 소리 죽여 웃다가 비웃는 곰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웃으며 잠들었다.
류세연은 소파에서 잠든 어린 자신과 그 아래 바닥에서 잠든 사람, 마찬가지로 어린 옥탑방 오빠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소파에 항상 담요가 깔려 있던 이유를.
옥탑방 오빠가 매일 소파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서 잠든 이유를.
그리고 어린 류세연은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이어졌다.
옥탑방 오빠는 소파 아래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얼굴을 덮은 담요를 내리고 작은 베개를 머리에 받히더니 소파 끝에서 양말을 꺼내 어린 류세연의 발에 능숙하게 신겼다.
그리고 하압- 하품을 하며 다시 누워 잠든다.
“…….”
류세연은 한참 동안 웃으며 잠든 아이와 소년을 바라보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베란다 창을 바라봤다.
거울처럼 거실을 비추는 베란다 창에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소파 위 비웃는 곰 인형을 안고 잠든 어린 류세연.
그 아래 담요를 덮고 잠든 옥탑방 오빠, 천문석.
그리고 우두커니 서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자신.
세 사람은 모두 웃고 있었다.
몸이 가난해지면 마음도 가난해진다.
부모님의 실종과 재산을 노린 친척들.
어렸던 옥탑방 오빠는 빈 몸으로 집에서 나와 알바를 몇 개나 돌리며 힘들게 살았다.
그렇게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고 미처 깨닫지 못한 수많은 호의를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베란다 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돌멩이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류세연은 고개를 들어 베란다 창을 바라봤다.
거울처럼 거실을 비추는 베란다 창에는 허리에 닿을 듯 작은 아이가 비추고 있었다.
반짝이는 검은 머리에 은사로 문양이 새겨진 붉은 비단옷을 입고 손에는 곧게 뻗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는 아이.
처음 보지만 어쩐지 익숙한 모습의 아이.
이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바닥을 깊게 판 산속 사당.
다닥다닥 무와 배추를 심은 밭.
개울가에 돌을 쌓아 만든 작은 보.
피리 소리를 내는 나뭇가지 검을 들고 달리는 아이들.
천하를 떠돌다가 깊은 산으로 흘러들어온 갈 곳 없는 아이들 사이.
나뭇가지 검을 들고 달리는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붓을 들어 등과 발에 이름을 적고.
애써 키운 버섯을 멧돼지에게 뺏기고.
겨우살이를 캐려다 높은 나무에 고립되고.
벌집을 번쩍 들고 번개같이 산을 달려 오며 외친다.
‘돌멩이! 도와줘!’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달려오는 소년.
얼굴도 체형도 다르지만 어째선지 알 수 있었다.
‘옥탑방 오빠.’
류세연은 어느새 미소 지으며 베란다 창에 비춘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옥탑방 오빠, 천문석, 돌멩이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이 순간 베란다 창에 비춘 아이의 모습이 일렁이는 수면처럼 사라지고 다른 모습이 생겨났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인.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한 보패.
천잠사로 짜낸 붉은 비단옷과 별은(星銀)을 녹여 수놓은 천문(天文)!
천하를 내려다보는 오연한 기상!
그러나 허리춤에 꽂힌 나뭇가지 검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같은 사람이다!’
이 순간 천문을 새긴 별은 위로 선연한 푸른빛이 흐르고 산악 같은 위엄을 담은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완전히 몸을 돌리는 순간 섬광이 번뜩이는 두 눈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두 눈이 구리반지에 닿았다.
‘마침내!’
거대한 외침에 흠칫 놀라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번쩍- 쏘아진 번갯불이 영혼육백! 존재의 본질을 때렸다!
이 순간 류세연은 다시 한 번 꿈을 꿨다.
꿈속의 꿈.
일어나는 순간 잊어버릴 거품 같은 꿈을.
* * *
다시 만나기 위해 수많은 금기를 범했다.
신에게서 운명을 사는 화폐, 전설로 내려오는 흑전을 찾기 위해서 다시 인연을 잇기 위해 수없이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흑전은 찾을 수 없었고 금기를 범하면서까지 이으려던 인연 또한 이어지지 않았다.
천의(天意)는 아득하여 짐작조차 되지 않고 금기를 범한 영안(靈眼)은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게 흐려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혼돈에 그어진 선,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세계의 나무 위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세계의 나무를 키워내신 그분은 얼마나 잔인하신지. 희망을 주셨지만, 그 희망은 하늘의 달처럼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길고 긴 시간이 흘러 너무나 지쳐 모든 것이 시작된 무림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새 장년인이 된 옛 인연을 만났다.
무림 맹주, 천검 이세기.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됐다.
자신이 그토록 오랜 시간 수없이 경계를 넘어서까지 찾으려 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무림에 있었음을.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 천문석!
돌멩이 오빠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천마가 돌멩이었다!
한달음에 마도 18문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들려온 이야기.
승천.
천마 천문석, 돌멩이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영혼육백 존재의 본질로 하늘의 천기와 대지의 용맥을 하나로 잇고.
하늘, 사람, 대지. 천지인을 잇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승천했다.
이 순간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고 더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바람에 귀를 기울이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눈을 감으면 바로 앞에서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당장이라도 씩 웃으며 나타나 말할 것만 같았다.
‘뭐야? 왜 이리 울상이야!?’
세계의 비의에 닿아 아득한 삶을 손에 넣었으나, 금기를 범한 이 몸으로는 아무리 경계를 넘는다고 해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인연이 끊어졌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삶은 유한하나 본질은 영원히 이어지니.
이번 생의 인연이 끊겼다면 다음 생에서.
다음 생이 안 된다면 다시 그다음 생으로.
‘반드시 다시 만나리라.’
명운을 모두 걸고 가장 강력한 대주술을 펼쳤다.
그리고 다음 생의 인연을 잇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허공도의 계단을 걸어 도착한 황무지에 거대한 도시, 적염성을 세웠다.
이 적염성 성주 장원에 높게 솟은 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언젠가 올 인연에 전해지도록 소중한 반지가 들어 있는 종루를 세웠다.
그리고 넘어서는 안 될 마지막 경계를 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한걸음이 모자랐다는 것을.
자신이 천하를 훑고 있을 때.
돌멩이 오빠는 마도 18문의 지존이 되어 무저갱의 마굴을 걸었고.
자신이 인연을 쫓아 경계를 넘었을 때.
돌멩이 오빠는 무저갱의 마굴에서 나왔다.
자신이 수많은 세계를 헤매고 있을 때.
돌멩이 오빠는 마공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온갖 방법을 모두 시도하고 있었다.
“하- 저 불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는 순간.
류세연은 꿈속의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돌아온 꿈속 옥탑방.
류세연은 소파에서 잠든 어린 세연과 그 아래 옥탑방 오빠를 보며 웃었다.
아득한 세월이 지나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만났다.
그러나 그 본질은 같으니 돌멩이, 천문석은 옥탑방 오빠였다.
오래전 수없이 경계를 넘으며 기원하고 기원하던 일은 마침내. 아니, 이미 이뤄졌다!
류세연은 문득 시선을 내려 손을 봤다.
손에는 긴 세월이 지나 돌아온 붉은 구리반지가 놓여 있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꾸는 꿈은 이 붉은 구리반지가 일으킨 환몽이라는 것을.
이 환몽에서 깨어나는 순간 모든 기억은 거품처럼 잊혀지리라는 것도.
하지만 상관없었다.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이 모든 것이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
기억이 사라져도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사람을 찾아 걸었던 수많은 날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 마침내 다시 만났다는 사실.
류세연은 이제야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다.
삶은 끝이 정해져 있으나.
그 본질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 말은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류세연은 미소 지으며 베란다 창을 바라봤다.
베란다 창에는 익숙한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고생이 비치고 있었다.
류세연은 거울 같은 베란다 창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적예(赤芮).”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 * *
문득 눈을 뜬 류세연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리고 가슴속에선 간질간질 감정이 차오른다.
아침 햇살은 온화하고 포근한 이불에선 잘 말린 짚단 냄새가 났다!
어째선지 미소와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무언가 좋은 일이 있었는지 행복감이 차오르는 완벽한 아침.
지금 당장 옥탑방 오빠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오빠! 천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