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868화>
어느새 대청소가 모두 끝난 옥상.
장민 대표와 한경석은 침구를 탁탁 털어 잘 개어 평상에 쌓고 있었다.
“알바씨 왔어요?”
[친구 왔어?]
“알바! 내 아아는!?”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달려와 외치는 특급 헌터.
“너, 아아가 뭔지는 알아?”
“당연히 알지. 아아 비서 누나! 아아란 이름 내가 지어 준 거야!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먹어 본 적은 있고? 그거 엄청 쓰다.”
“당연히 안 먹어 봤지! 그리고 써도 먹어야 해!”
“약이냐 써도 먹게?”
“아아를 먹는 건 꼭해야 하는 일이야!”
특급 헌터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아 비서 누나가 놀러 올 거란 말야! 그럼 ‘아아’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걸 알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먹어 봐야지! 이제 왜 내가 아아를 먹어 보려는지 알겠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끄덕 이는 특급 헌터.
잠시 잊고 있었다.
특급 헌터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했다.
천문석은 옥상 문을 가리켰다.
“커피는 뒤에 느림보 세연이 가져오고 있다.”
“느림보 세연!”
특급 헌터가 다다닥- 뛰어갈 때.
천문석은 평상을 지나 옥탑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장본 건 제가 정리해 넣을게요. 그리고 오늘 저녁도 제가 하겠습니다. 대표님이랑 경석이는 쉬고 계세요.”
“그럴까요?”
[친구가 요리한다고!?]
장민 대표와 한경석이 솔깃한 표정을 짓는 순간.
세연을 찾아 달려가던 특급 헌터는 빙글 몸을 돌려 한달음에 돌아왔다.
“알바! 오늘 알바가 요리한다고!?”
특급 헌터는 종량제 봉투를 바라보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고기! 알바 우리 저녁에 고기 구워 먹는 거지!? 삼겹살 맞지!?”
“야! 점심때 한우 먹었잖아? 또 고기를 먹자고!?”
“점심때 한우 먹었으니까!”
“저녁에는 당연히 삼겹살 먹어야지!”
“한우, 삼겹살, 치킨! 한국 사람은 골고루 먹어야 해! 편식하면 안 돼!”
마치 당연한 진리를 말하듯 당당히 외치는 특급 헌터.
‘뭐지? 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묘하게 설득되는 이 논리는!?’
한우, 삼겹살, 치킨!
한국 사람의 소울 푸드!
그렇다! 한우, 삼겹살, 치킨에 우열은 없다!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한다!
“알바. 평상에 신문지 깔고 불판 가져올까? 앗! 수박 토마토! 내 수박 토마토 씻어 올게. 상추랑 같이 싸 먹자!”
“어, 그래…….”
특급 헌터의 외침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등에서 울려 퍼지는 찰진 타격음!
쫘악-
순간 전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런 등짝 스매시를 날릴 사람은 한 명뿐이다!
“류세연! 복수냐!?”
“삼촌! 정신 차려! 지금 계속 끄덕이고 있잖아!”
‘아차! 특급 헌터에게 말려들었구나!’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 김치찌개다!”
“앗! 알바! 다시 생각해 봐! 김치찌개는 나중에도 먹을 수 있어! 내가 잘 설명할게! 우선 제일 중요한 건 삼겹살이 김치찌개보다 맛있다는 거야! 그리고…….”
특급 헌터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 냈다.
“야, 잠깐 우선 내 말부터 들어!”
“설득이 쉽지 않을 거예요…….”
장민 대표가 고개를 젓는 순간.
한경석이 앞으로 나서서 타협안을 제시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햄 어때? 김치찌개에 햄을 같이 구워 먹으면…….]
특급 헌터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외쳤다.
“햄은 고기가 아냐! 낮아! 낮다고! 좋지 않아!”
번쩍- 머리 위로 올라가는 손!
“한우, 삼겹살, 치킨! 셋은 여기야! 높아! 훌륭해! 아주 좋아!”
쓱- 허리 아래로 내려가는 손!
“햄은 여기야 여기! 낮아! 조금 훌륭해! 조금 약간 좋아!”
특급 헌터는 설명을 끝내고 알겠지라는 표정으로 당당히 외쳤다.
“모두 알겠지? 점심때 한우를 먹었으니까! 당연히 저녁은 삼겹살을 먹어야 해!”
‘1+1 = 2’와 같은 아주 당연한 진리를 말하는 것 같은 표정.
이 표정을 보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삼신기 중 하나가 빠졌다!
“……특급 헌터. 혹시 야식으로…….”
“당연히 치킨이지!”
특급 헌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치고 입가를 쓱 닦아냈다.
“오늘은 엄청엄청 훌륭한 날이야! 한우, 삼겹살, 치킨을 다 먹잖아! 우와! 오늘 내 생일인 거 같아! 카카카카캌-.”
티 하나 없이 순수한 기쁨이 담긴 웃음이 옥상에 울려 퍼질 때.
장민, 류세연, 한경석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천문석에게 모였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남 앞에 서는 자의 숙명!
천문석은 씩- 웃으며 특급 헌터의 손을 잡고 아래로 움직였다.
탁-
허리에 놓인 손이 무릎을 지나 바닥에 닿았다.
“알바씨?”
“삼촌?”
[친구?]
“알바……?”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모이는 순간.
천문석은 특급 헌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게 오늘 저녁이야. 뭔지 알겠지?”
“……!”
특급 헌터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떨림!
“알바…… 설마, 설마……!?”
차마 이어지지 못하는 물음!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량제 봉투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종량제 봉투에서 빠져나온 손에는 통조림이 들려 있었다.
“고등어 통조림 김치찌개…….”
으아아와아아아-
비명 같은 환호성과 함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알바! 생각해 보니까! 돼지고기 김치찌개도 좋을 것 같아!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어야 한다니까! 와! 맛있겠다! 우와! 엄청 기쁘다!”
특급 헌터의 환호와 함께 저녁 메뉴는 결정됐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천문석은 순식간에 식사준비를 끝냈고.
근사한 노을이 펼쳐진 하늘 아래, 휘파람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있는 평상에 상이 차려졌다.
돼지고기가 가득한 김치찌개에 하얀 쌀밥, 포근한 계란말이, 짭짤한 김자반과 할당량이 정해진 콩자반!
평범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곧 상이 치워졌다.
그릇과 공기, 냄비는 식기 세척기에서 돌아가고 모두는 세연이 사 온 커피를 들고 평상에 앉았다.
느긋한 저녁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 특급 헌터였다.
“……그렇게 딱지치기, 구슬치기, 닭싸움 대회를 열었어! 내가 우승할 수 있었는데 엄청 아깝다니까! 그렇지? 알바!?”
[특급 헌터 네가 주최했는데. 네가 우승한다고? 그거 안 되지 않아?]
“뭐? 난 참가하면 안 된다고!?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나도 딱지치고, 구슬치고, 닭싸움 하고 싶다고! 우승해야 한단 말야!”
“당연히 우승한다고? 특급 헌터 자신만만한데? 그럼 누나랑 오래간만에 다시 대결할까?”
“아니. 별로. 세연은 너무 못해.”
“야! 제주도에서는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았어! 저기 세발자전거 경주! 저거 내가 더 많이 이겼잖아! 기억 안 나? 다시 한 번 경주할까!?”
“에휴. 어쩔 수 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나던 특급 헌터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앗! 그렇지! 세연 나 세연한테 줄 거 있어!”
“뭐야? 꼬맹이 누나 선물 사 왔느냐?”
[특급 헌터! 나는 내거는!?]
“좋아! 경주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엄청 좋은 선물을 주겠어! 출발!”
“승부다! 내가 완전히 이겨 주겠어! 크크큭-.”
승부욕에 불이 붙은 류세연과 특급 헌터가 뛰어가고 어쩐지 신난 한경석이 그 뒤를 따라갔다.
[완전 재밌을 거 같아!]
장민 대표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이 모습을 바라봤고.
천문석은 문득 주위를 돌아봤다.
같이 밥을 먹고 마치 한 가족인 것처럼 웃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성긴 나무 위에는 사슴이와 반짝이.
평상 구석에는 아직도 잠자는 탱탱이.
활짝 열린 현관 안 화분에는 거복이가 있었다.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여럿이 더 좋았다.
너무나 눈에 익은 풍경, 낯익은 사람들과 동물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로또도 샀고 크리스털 병도 회수했다.
내일 북한산에서 크리스털 병을 워커7에게 보내 주고 금괴를 회수해 한경석 공방에 가면 당장 할 일은 모두 끝난다.
‘일주일!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노는 거다!’
마음으로 다짐할 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기동 병참 도시, 말년 병장!
인공정령 아수라 비서!
아수라 비서에게 W. S. 인더스트리를 대신해 막대한 물자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사람이 지금 바로 옆에 있었다.
“특급 헌터 화이팅!”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들을 응원하는 엄마, 장강 유통 장민 대표!
기동 병참 도시와의 거래는 양쪽에게 모두 이익인 거래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장민 대표님.”
“네. 알바씨?”
특급 헌터에게 시선을 둔 채 대답하는 장민 대표.
천문석은 차 한잔하자고 말하듯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대표님. 혹시 이세계랑 무역해 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 * *
천문석과 장민 대표가 깊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특급 헌터, 류세연, 한경석 셋의 치열한 승부의 승자가 결정됐다.
“봤지!? 모두 내가 이기는 건 봤지!?”
땀을 뻘뻘 흘리며 환호하는 류세연이 1등.
“앗! 아앗! 졌어!? 내가 졌어!
충격받은 표정의 특급 헌터가 2등.
[재밌었어!]
손으로 V자를 그린 한경석이 3등 꼴찌였다.
“앗! 세연! 어떻게 그렇게 빨라진 거야!? 비밀이 뭐야!?”
류세연은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히 대답했다.
“노력!”
“노력!?”
특급 헌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대화 중인 천문석을 향해 외쳤다.
“맞아! 노력이야! 알바! 알겠지!?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해! 앙꼬 대장은 엄청엄청 강해!”
“어, 그래.”
갑자기 튄 불똥에 적당히 대답하는 순간.
특급 헌터는 나무 상자를 꺼내 흔들었다.
“그럼 약속대로 선물을 주겠어! 나와랏!”
휙휙, 휙휙휙-
위아래로 흔들리는 나무 상자에서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툭, 투두둑-
먹다 남은 사탕, 끊어진 고무줄, 새하얀 공깃돌과 구슬 주머니.
언제나처럼 잡동사니가 쏟아지더니.
툭-
아수라 조각상이 떨어지고.
통-
작은 구릿빛 물체가 아수라 조각상을 맞고 튕겨 올랐다.
“잡았다!”
특급 헌터는 잽싸게 아수라 조각상과 튕겨 오른 물체를 낚아챘다!
“우선 꼴찌 상! 경석형! 이마 내밀어내가 아수라 도장 찍어 줄게!”
한경석은 바로 카멜레온 후드를 내리고 이마를 드러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 특급 헌터는 하아, 하아- 아수라 조각상에 입김을 불고 꾹- 한경석의 이마에 눌렀다.
“됐어! 경석형은 이제 아수라파천무를 배울 수 있어! 구구국보다는 좀 못하지만, 열심히 연습해!”
“고마워 특급 헌터! 노력할 게!”
로브를 벗은 한경석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특급 헌터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을 봤다.
“다음은 1등 세연 누나!”
“드디어 그 엄청 좋은 선물을 주는 거야?”
특급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꼭 쥔 주먹을 내밀었다.
“세연! 커다란 종 속에다가 반지 넣어 뒀지? 내가 찾아서 가져 왔어!”
“……종 속에 반지를 넣어 뒀다고? 너 던전 갔다 온 거 아냐? 나 그런 적 없는데?”
“세연 이름 적혀 있는 아주아주 훌륭한 9점짜리 반지야! 보면 바로 기억날 거야!”
특급 헌터는 손을 활짝 펼쳤다.
작은 손 위에는 붉은빛이 도는 구리반지가 놓여 있었다.
“세연 기억나지?”
“야! 당연히 기억 안 나지! 반지 잃어버린 적 없어!”
“반지 안에 세연 이름도 있어! 9점짜리 반지라니까! 자세히 좀 봐봐!”
류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구리반지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이지만 반지를 살피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낀 듯 흠집이 가득 난 반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구리반지는 누군가 아주 소중히 오랫동안 간직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
특급 헌터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분명 처음 보는 반지였다.
“안을 봐야지! 안에 이름 새겨져 있어!”
류세연은 내심 웃으며 반지 안쪽 면을 살폈다.
[류세연]
“……!”
아주 오래전에 새긴 듯 흠집이 가득한 한글 이름!
그러나 류세연은 속지 않았다.
‘던전 안에서 나온 물건에 한글이 적혀 있다고!?’
바로 감이 왔다!
특급 헌터 혼자 이런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특급 헌터는 공범!
주범은 특급 헌터와 함께 던전에 간 사람이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한 명뿐이다!
류세연은 이번 사건의 주범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 삼촌! 내가 이런 얕은수에 속을 거 같아!?”
“…….”
“…….”
“…….”
이 순간 장민, 한경석, 특급 헌터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뭐야? 다들 표정이 왜 그래?”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연 괜찮아?”
“괜찮냐고? 갑자기 왜?”
반문하는 순간 후두둑-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비?”
말하는 순간 느껴졌다.
하얗게 변하도록 움켜쥔 손.
터질 듯이 빠르게 뛰는 가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무언가.
“어, 어? 왜 이러지?”
당황해서 고개를 흔들 때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가짜 반지 사건의 범인 옥탑방 오빠.
수없이 봤던 그 얼굴에는 잡힐 듯이 선명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놀람, 당황, 걱정…….’
선명한 감정의 조각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목이 컥 막히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공기가 사라진 듯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류세연은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불렀다.
“돌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