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797화>
호텔 로비 창가 테이블.
천문석과 아수라 비서는 소파에 특급 헌터와 퐁퐁이, 거복이는 유리창에 찰싹 붙어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급 헌터는 창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알바! 이상해! 기차가 안 와! 혹시 길 잃어버린 거 아닐까? 우리가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냐!?”
“부두에 기차 타려는 사람 많았잖아? 시간 걸리나 보지. 배고프냐? 먼저 밥 먹을까? 아수라 비서님?”
[네 바로 식사 가능합니다!]
특급 헌터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냐!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어! 그렇지?”
구으으-!
기이이-!
바로 대답하는 퐁퐁이와 거복이!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야경이 그대로 보이는 통유리 앞 호텔 로비, 테이블과 소파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마다 인간과 수인족, 이종족이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여 앉아 있었다.
적염성과 항구 도시 바나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랜턴이 아닌 전등이 걸렸고, 나무가 아닌 새하얀 대리석 바닥이 깔려 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너무나 익숙한 물건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전화기.
따르, 따르, 따르릉-
로비 곳곳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뢰 어떻게 됐어!? 뭐…… 놓쳤다고! 야, 이 그걸 놓치면 어떻게 해!”
“……부유석 주문하겠습니다. 30톤 선박을 채울 양! 전액 금으로…….”
“탑 자리 구하고 있습니다. 네, 1층 2번 경험 있고 은패 용병입니다.”
“……바위 굴 성채, 10인 파티입니다. 지금 5인 모여 있습니다. 우선 궁수와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공중 카지노 20명 예약하겠습니다. 기간은 일주일 등급은 VIP로…….”
“추가 연장 힘듭니다. 오늘 은행 마감 시간까지 입금이 안 되면 압류 절차 들어갑니다!”
……
완전무장한 용병, 주판을 튕기는 상인, 담뱃재를 털어 내며 화를 내는 수인.
모든 사람이 전화기를 붙잡고 능숙하게 통화하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한참을 바라보자 아수라 비서의 설명이 들려왔다.
[아까 중앙 통제실에서 보신 반마탑으로 통신망을 일부 복원해 사용이 가능해진 ‘전화기’입니다.]
“‘전화기’라고요?”
[네. 마도 제국에서 사용했던 유물, ‘전화기’와 ‘차원 통신망’에 차원 준위가 낮은 이곳 열사의 사막에서 관측 가능한 ‘천공탑’을 더한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원래 목적은 세계의 나무를 가로질러 세워진 ‘천공탑’을 안테나 삼아, 워커 실트7님의 친구분에게 ‘차원 통신망’과 연결된 ‘전화기’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거였는데…….]
아수라 비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좌표 고정이 안 돼서 경계 너머 ‘천공탑’과 연결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다른 방법을 여러 가지 써봤는데 천공탑이란 ‘안테나’ 없이는 워커7님의 친구분과는 연결할 수 없어서 프로젝트는 취소됐습니다. 그 후 남은 전화기와 내부 통신망을 이 호텔과 도시 몇몇 장소에 설치해서 운용 중입니다.]
전화기, 통신망, 천공탑, 안테나, 구조 신호.
아수라 비서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감은 왔다.
워커7이 이 전화기로 친구라는 사람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려 했다는 것과 그 친구는 워커7을 구할 능력이 있다는 것!
‘그 친구가 누굴까?’
문득 든 의문에 질문하려 할 때.
한발 먼저 끼어들어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앗! 나도 전화기 있어! 아아 비서 누나 보여 줄게!”
특급 헌터는 손목에 찬 헌터용 시계를 내밀며 자랑했다.
“이걸로 부르면 삼촌이 엄청 빨리 달려와!”
구으으-!
기이이-!
퐁퐁이와 거복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앗!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아수라 비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마치 직장 상사의 말에 리액션을 하는 부하 직원들처럼!
‘카카카-’
천문석은 내심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테이블에 놓인 마도 제국의 유물을 봤다.
한국어로 불리는 마도 제국의 유물, ‘전화기’를!
렉카, 에어컨, 말년 병장 그리고 ‘전화기’까지.
이곳 기동 병참 도시에 들어온 이후 한국어단어를 몇 번이나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이세계의 마도 황제가 초거대 기업 재금 그룹의 오너, 한국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러나 눈앞에 놓인 한국어로 불리는, 1에서 0까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진 다이얼 ‘전화기’를 보자 새삼 실감이 났다.
‘마도 황제! 진짜 한국인이었구나!’
순간 이름도 모르는 마도 황제에게 깊은 동질감이 들었다.
한국에서 이세계로 떨어진 마도 황제.
자신도 마도 황제와 같은 일을 겪었다.
공방 도시에서 지열봉을 냉각시키다가 20년 전, 1999년 세기말 대한민국에 떨어진 것이다!
그때 느꼈던 황당함과 어이없음, 정신없이 달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데 마도 황제는 20년도 아닌 수백 년 전! 그것도 지구도 아닌 이세계에 떨어졌다!
자신과 동료들처럼 20년 존버 한다는 대안도 없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상황!
그러나 마도 황제는 절망하지 않았다!
이세계에 현대 문명을 전파해, 거대한 마도 제국을 세우고 마침내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와 몬스터로 엉망진창이 된 한국으로!
‘뭐가 이렇게 재수 없어!’
하-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세계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돌아오니, 게이트가 열려 전쟁터가 된 한국이라니!
연이은 불운과 시련에서 느껴지는 이 익숙한 짠 내!
그러나 마도 황제는 이번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마탄과 게이트 안정화 장치를 개발해 인류가 게이트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연이은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초거대 기업, 재금 그룹을 세웠다!
이 놀라운 근성이라니!
마도 황제, 재금 그룹 오너를 만나면 꼭 한번 고기라도 같이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압도적인 세계 1위 부자.
전 세계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
이세계에 마도 제국을 세운 신화적인 황제.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사람이 재금 그룹의 오너다.
지구와 이세계의 그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초월적 존재!
그런 초월적 존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고기라도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니! 절로 실소가 터져 나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렉카, 에어컨, 말년 병장, 전화기…….
그 초월적 존재가 남긴 흔적을 보고 있는 지금, 머릿속에 그려지는 인상은 절대자가 아니었다.
40도가 넘어가는 지하에 통신선을 깔고.
전신 방호복을 입고 대형 하수관을 청소하며.
커다란 생맥주 기계를 짊어지고 축제의 인파 속을 걷는.
그런 평범히 빡세게 사는 알바의 모습이 그려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
피식 웃음이 지어지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학창시절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옛날에는 전화기가 모두 다이얼 식이었거든. 다이얼식 전화기는 가장 끝 숫자 0을 돌리면 돌아가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어. 그래서 긴급 전화번호는 모두 앞자리 숫자를 빠른 번호로 만들었어. 지금 긴급 전화번호 첫 자리가 ‘1’인 건 그 흔적이란다.’
시선을 내리자 한국 사람인 게 분명한 마도 황제가 만든 통신망과 연결된 전화기가 보였다.
‘혹시?’
천문석은 바로 수화기를 들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1, 1, 2]
그륵, 그륵, 그르륵-
다이얼이 3번 짧게 돌아가는 순간 바로 수화기를 귀에 댔다.
“…….”
그러나 한참을 집중하고 기다려도 수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에 앉은 특급 헌터의 외침이 들려왔다.
“앗! 알바! 나도 전화! 나 전화로 물어볼 거 있어!”
“자 받아라.”
천문석은 바로 특급 헌터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고마워!”
그륵, 그륵-
특급 헌터가 신나게 다이얼을 돌리는 순간.
호텔 로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다급히 뛰어들어왔다.
“지금 부유석 부두에 엄청난 게 나타났다!”
“렉카 놈들이 초대박을 터트렸어!”
“당장 부두로 가야 해! 빨리 나와라!”
“야,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렉카? 렉카면 표류선 견인해 온 거 아냐?”
“표류선?”
“하! 배 한 척에 호들갑은!”
표류선이란 말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고, 흥미를 보이던 사람들도 시선을 돌렸다.
바로 외침이 이어졌다.
“야, 이거 그냥 표류선 아나!”
“대형 크레인 10대가 모조리 동원됐어!”
“부유석 부두에 정박한 배 모조리 옮기고 있다!”
“이 표류선에 수백 명! 아니, 천 명이 넘는 사람이 타고 있다!”
“천 명!?”
“그런 배가 끌려 왔는데 왜 전화를 안 했어!?”
“야! 부두에는 전화기 없잖아! 은폐 마력장 밖으로 통신 새어 나간다고 아예 설치가 안 됐잖아!”
“지금 부두로 달려간다고 난리야! 빨리 움직여라!”
“……!”
“……!”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동시에 문으로 달렸다.
단숨에 로비를 가로질러 문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사람들.
사람이 가득하던 호텔 로비는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
천문석은 문득 드는 직감에 통유리 앞으로 움직였다.
호텔뿐만이 아니었다!
도로를 달리는 마차와 수레, 인도를 달리는 사람들!
마치 개미 떼가 먹이를 향해 이동하듯 수많은 사람이 부유석 부두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전부 부두로 간다고? 왜!?”
의문을 품는 순간 아수라 비서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물, 음식, 수리용 자재와 공구, 숙박과 경호까지.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러 가는 겁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하늘 고래호가 열사의 사막에 멈춰 섰을 때 사방에서 달려온 렉카와 자해공갈단, 강매상인들!
이 도시는 그들의 본거지였다!
즉, 이 도시는 방심하는 순간 눈탱이를 맞는 마경, 이세계의 드래곤 마운틴이었다!
그리고 방금 도착한 표류선은 렉카 견인을 시작으로 연속 눈탱이를 맞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부두를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인파!
하늘 고래호도 까닥 잘못했으면 저 꼴이 될뻔했다!
천문석은 불운한 이방인을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힘내라!”
이때 호텔 로비 입구에서 귀에 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이 호텔이 맞아! 이번엔 확실해!”
“야, 너 방금도 확실하다고 했잖아!?”
“어두워지니까 다 비슷해 보여서 그래! 너도 방금 호텔, 이 호텔이랑 비슷한 거 봤잖아?”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방금 호텔은 이 호텔 반도 안 되겠던데!”
‘이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위신과 소니아가 로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지친 얼굴의 압둘라와 우론!
“야! 왔냐!?”
성큼 걸어가며 손을 흔들자 반가운 외침이 돌아왔다.
“이세기!”
“드디어 찾았다!”
“한참을 찾아다녔어!”
“하아- 겨우 찾았네.”
“뭐야, 왜 너희만 왔어? 파티마랑 오마르 장로는?”
로비 밖을 살펴도 다른 사람은 없었다.
“선원들도 아무도 안 왔네?”
위신은 바로 앞으로 나서 대답했다.
“지금 부두에 있는 배 모두 빼야 한다고 해서 난리야. 선장님과 선원들은 지금 열차에 배 싣고 이동 중이다. 파티마는 배 지킨다고 남았고.”
“배를 이동해? 어디로? 아니, 그보다 왜?”
위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배 빼느라 바빠서 자세한 건 못 알아봤는데. 부유석 부두를 통째로 쓸 정도로 대형 표류선이 들어온다더라. 그래서 부두에 있던 상선, 어선, 교역선 가리지 않고 전부 다 열차에 실어서 반대쪽 부두로 옮기고 있어.”
위신의 손가락이 창문 밖 부유석 부두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게다가 상인, 용병, 노점상까지 모조리 몰려서 지금 부두 완전 난장판이 됐다. 우리도 간신히 빠져나왔어.”
“남은 선원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저기 반대쪽 부두에 접안하고. 오마르 장로? 이 호텔 위치 아는 그 아저씨가 데려오기로 했어.”
천문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했네. 고생했다. 우선 식사부터 하자. 아수라 비서님 식당으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특급 헌터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리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위신과 동료들은 바로 아수라 비서를 따라가고 남은 건 특급 헌터뿐.
“특급 헌터! 밥 먹으러 가자!”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보였다.
특급 헌터, 퐁퐁이, 거복이, 셋이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거복이는 전화기를 등 위에 올렸고.
퐁퐁이는 가슴지느러미로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특급 헌터는 한 손에는 퐁퐁검을 다른 손에는 수화기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특급 헌터?”
얼마나 열중했는지 특급 헌터는 전혀 듣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통화 중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니까! 나도 알바가 사 온 한우 구워 먹고 울뻔해서 잘 알아! 진짜로 울었냐고? 당연히 안 울었지! 울뻔했다고! 울뻔! 진짜 운 게 아니라고! 당연히 진짜지! 어, 김밥? 김밥은 난 별론데……? 뭐? 김밥이 최고로 맛있다고!? 당연히 한우가 더 맛있지! 한우 숯불에 구워서 입에 쏙 넣으면! ‘흐어, 흐어어-!’ 완전 맛있어서 말도 안 나온다니까! 내가 장민이 싸준 김밥 양손에 들고 먹어 봐서 완전 잘 알아! ‘장민 김밥’은 ‘알바 한우’에 비교도 안 돼!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게! 우선……!”
특급 헌터는 한우가 얼마나 맛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마도 제국의 유산, 전화기를 들해!
“……너 뭐하냐?”
“알바! 잠깐만! 나랑 엄청엄청 친한 친구 왔어! 전화 바꿔줄 게 알바한테 물어봐! 알바 이런 거 완전 잘 알아……!”
수화기를 내밀며 외치는 특급 헌터.
“알바! 한우가 더 맛있지! 얼른 말 좀 해 줘!”
“야, 친구들 왔어! 우리 저녁 먹으러 가야 해!”
“앗! 저녁! 깜빡했어! 잠깐만! 나 이제 저녁 먹으러 가야 해! 안녕! 형도 꼭 김밥 먹어!”
특급 헌터는 수화기를 쿵- 내려놓고 퐁퐁이와 별갑 거복이를 번쩍 들고 테이블에서 뛰어내렸다.
“알바! 얼른 와! 우리 빨리 저녁 먹으러 가야지!”
“야! 뛰지 마! 바닥 대리석이라 위험해!”
천문석은 특급 헌터를 낚아채 옆구리에 끼고 엘리베이터 앞 동료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런데 너 방금 누구랑 통화한 거냐? 형이라고?”
특급 헌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이 대답했다.
“돌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