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784화>
“기억상실이 아니라? 반 기억상실!?”
천문석이 되묻는 순간 밝은 목소리로 외치는 엘프.
“이세기님! 기억상실 아시는구나! 그럼 설명이 간단하겠네요! 지금 ‘워커 실트7’ 님은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잃었던 기억을 되찾은 반(反) 기억상실 상태예요! 이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시겠죠!?”
찬란한 빛이 뿜어지듯 환하게 웃는 엘프.
엘프의 이런 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월적 외모.
겉모습, 외모만 사람 같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 대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뜬금없어요! 전후 설명이 있어야지! 반 기억상실이라고만 말하면 어떻게 이해합니까!?”
“네? 반(反) 기억상실이라니까요? 기억상실 반대! 잊었던 기억이 팟-! 하고 다시 생각난 거예요!”
엘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이걸 못 알아듣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로 열이 확 치솟았다!
위신, 파티마, 오마르는 왜 내보낸 거야!?
그냥 말해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
이때 문득 기억나는 게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백곰권 꼬맹이가 자기소개를 직접 하겠다고 말한 것!
‘이래서 엘프에게 안 맡기고 직접 하겠다고 했구나! 차라리 백곰권 꼬맹이에게 물어보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보였다.
잔뜩 쌓인 뭔가에 앉아 다리를 휙휙 움직이는 특급 헌터와 퐁퐁이, 거북이.
그 앞 땅바닥에 딱지를 놓고 스패너로 미친 듯이 두들기는 백곰권 꼬맹이.
“더 빳빳하게! 더 압축해야 해! 이야야약-!”
퍽퍽, 퍽퍽퍽퍽-!
백곰권 꼬맹이는 완전히 광기에 물들었다!
‘……재는 텃다! 어떻게든 이 엘프에게 사정을 들어야 한다!’
천문석은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릿속에 얽힌 실마리를 찾아 질문했다.
“그러니까. 지금 엘프님 말은 초거대 기업의 오너 ‘워커 실트’와 도시 관리인 ‘워커 실트7’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건가요?”
“아뇨! 당연히 같은 사람이죠!”
‘아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서로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해!?’
머릿속에서 불쑥 의문이 튀어나왔으나 이건 지금 할 질문이 아니다!
차례차례!
우선 던져야 할 질문이 따로 있다!
“그럼 두 사람이 다른 건 반 기억상실로 찾은, ‘기억’뿐이란 건가요?’
“네 맞아요! 오너와 의장님의 차이는 ‘기억’이에요!”
“W, S. 인더스트리의 오너에게 없는 ‘기억’을 저기 의장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 맞습니까?’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시는군요! 네 맞아요!”
엘프 승무원은 자기 말을 이해한 엄마를 보며 환호하는 어린아이처럼 손뼉 치며 좋아했다.
그러나 천문석은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밑밥일 뿐 이제부터 하는 질문이 중요했다!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져 어딘가 나사가 풀린 엘프에게서 답을 들어야 한다!
천문석은 최대한 간결하게 질문했다.
“그 차이 나는 ‘기억’이 뭔가요?”
엘프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긴 이야기…….”
천문석은 손을 들어 말을 끊고 가리켰다.
퍼어억-!
“으아악! 왜 왜! 계속 지는 거야!?”
여전히 분통을 터트리며 딱지를 내려치고, 단숨에 지고, 내기에 걸린 물건을 건네고, 다시금 딱지를 접어 두들기는 도시 관리인을!
천문석은 단호히 말했다.
“시간은 충분한 거 같네요. 차례대로 모두 설명해 주세요!”
“이게 너무 많은 걸 알게 되면, 그것 자체가 변수가 되는데…….”
엘프는 천문석과 워커 실트7을 번갈아 보며 한참을 고심하다가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든 걸 아는 게 아니고 의장님께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리고 저희 조직의 규율이 있어서 다 말씀드릴 수도 없고요. 그래도 일을 하시려면 정보를 아셔야 하니…… 말씀드릴 수 있는 이야기만 할게요. 적당히 걸러서 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됐다!’
천문석이 내심 환호하는 순간.
엘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아주 오래전. 모든 지성체의 약속, 대협약이 깨지고 전능 옥좌가 추락한 후 마도 전쟁이 일어나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그 후 마도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열국과 제국이 세워지기 전까지를 암흑시대라고 불러요. 이야기는 그 암흑시대 때 시작돼요.”
“‘워커 실트’님과 그분이 이끄는 동료들은 의도치 않은 우연한 사고로 이 암흑시대에 떨어지게 돼요.”
천문석은 재빨리 끼어들었다.
“잠깐! 그 마도 제국은 아주 오래전에 망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제국이 망한 후로 갔다면……?”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워커 실트님은 시간을 거슬러 아득한 과거에 떨어지게 된 거예요.”
‘시간을 거슬러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천문석이 어이없어할 때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암흑시대에 떨어진 워커 님의 동료들은 무사히 시공의 균열을 넘었지만. 워커 님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 끝까지 폭발을 막으러 노력하셨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시공 폭발해 휩쓸려. 동료들과 떨어진 이곳. 차원 준위가 낮은 열사의 사막, 그중에서도 스카라베의 강철 도시에 떨어지셨어요.”
“그 추락의 여파로 인과율 관측소, 차원 송신탑, 여왕님의 친구 궁전 등등 강철 도시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동료를 구하고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한 일이 일으킨 불가피한 피해였어요. 하지만 그때도 스카라베 왕국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자본 주의 세상이었습니다.”
엘프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워커 실트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청구서와 100건의 넘는 고소장이 날아왔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도망쳤겠지만. 워커 실트님은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의도치 않았지만, 피해를 준 것은 사실! 이 모든 손해를 보상하겠다고 스카라베와 당당히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공 폭발에 휘말려 차원을 넘어 날아오느라 워커 실트님은 완전 개털인 상황! 그래서 결국 몸으로 때우게 되셨습니다!”
“화장실 청소부터 강철 도시 수리와 재가동까지. 워커 실트님은 온갖 일을!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수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때 워커 실트님은 강철의 도시 지하 미궁에서 우연히 발견하셨습니다!”
“마도 엔진이 멈춰 가동을 중지한 마도 제국의 ‘기동 병참 도시’와 동면에 들어간 ‘말년 병장’을!”
기동 병참 도시!
말년 병장, 초거대 악어거북이!
“……이 도시!”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엘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워커 실트님은 이 도시를 발견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 도시를 탐색하면서 알게 되세요!”
“워커 실트님 자신이 영과 혼을 전하는 수정 기둥의 힘으로 전생하며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잃어버린 기억 일부를 되찾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그 순간 워커 실트님은 기억을 찾기 전과 후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 ‘워커 실트7’이라고 자칭하시게 됐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기억!
이게 핵심이다!
“되찾은 기억! 그게 뭔데!? 혹시 ‘칠’! 이름에 숫자 ‘7’을 붙인 거랑 관련 있는 거야!? 7에 무언가 의미가 있다거나? 대륙칠존, 7대 마법사, 일곱 재앙…… 뭐 이런 거야!?”
“아뇨. 그냥 워커 실트님이 7을 좋아하셔서 붙인 건데요?”
“…….”
말문이 컥 막히는 순간.
엘프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기억을 되찾았는지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는데. 그 되찾은 기억으로 지금 이 기동 병참 도시를 재가동 시키고 말년 병장을 깨우는 데 성공하세요. 그리고!”
“그리고!?”
“이 기동 병참 도시와 함께 강철 도시를 탈출해! 여기 차원 준위가 낮은 열사의 사막으로 도망치셨어요!”
이제 본론이 나올 때다!
“그리고 어떻게 됐는데?”
반사적으로 되묻는 순간 돌아오는 대답.
“네? 그게 끝인데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도망치고 있어요.”
“……그게 끝이라고?”
“네. 차원 준위가 낮은 열사의 사막에서 차원 방벽을 뚫고 세계의 나무와 혼돈을 오가며 계속 이동했어요! 그 결과 돌아갈 시간대, 나무와의 거리가 너무 벌어지긴 했지만. 스카라베, 특히 스카라베 채권추심원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요하거든요! 처음에는 마력석 엔진도 말썽이고 말년 병장도 동면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위기의 순간이 엄청 많았어요! 와! 한번은 붉은 털의 하누만이 열사의 사막을 뒤엎는 바람에 잡힐 뻔…….”
“잠깐! 잠깐잠깐!”
천문석은 다급히 말을 끊고 외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W. S. 인더스트리의 오너! 지구의 워커 실트와 이곳 병참 도시의 관리인 워커 실트의 관계를…….”
“정확히는 ‘워커 실트7’이에요.”
‘빌어먹을 젠장! 그놈의 7!’
그러나 더 아쉬운 놈이 숙이는 법!
천문석은 재빨리 말을 고쳤다.
“그래! ‘워커 실트7’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해 줘야지!”
“아…… 관계! 워커 실트님과 워커 실트님의 관계가 궁금하셨구나!”
“…….”
어째서일까?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터트리는 엘프를 보는 지금…….
빨리빨리를 외치고!
PT 18번으로 데굴데굴 굴리고!
최대 출력 전법륜인 딱밤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더 아쉽고 목마른 사람이, 숙이고 우물을 파야 하는 법!
천문석은 세상에서 제일 까탈스러운 손님을 대하는 알바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핵심을 짚었다.
“맞아. 워커 실트님과 워커 실트7 님은 어떤 관계야?”
엘프 승무원은 온 힘을 다해 딱지를 내려치는 백곰권 꼬맹이를 가리켰다.
“‘워커 실트7’. 일명 워커7님은 지구의 W. S. 인터스트리 오너, ‘워커 실트’님이 잊어버린 과거의 자신입니다!”
“…….”
깊은 침묵 끝에 천문석은 입을 열었다.
“뭐라고?”
---
[---- ], 워커7, 병참 도시 관리인.
[ ----], 워커, W. S. 인더스트리 오너.
분필을 꺼내 바닥에 그은 선과 이름.
딱-
엘프는 손가락을 튕겨 분필을 날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워커7님과 워커 님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시공착각입니다. 지금 두 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연속해서 자라나는 세계의 나무 위에 계십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지구 입장에서 과거란 이야기?”
“이곳이 열사의 사막이고 말년 병장이 계속 세계의 나무를 이동해서 좀 다르긴 한데. 그렇게 이해하셔도 큰 문제는 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엘프는 바닥에 그려진 워커7에서 워커를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중요한 건 지금 이곳의 ‘워커7’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지구의 워커’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세기님을 이곳으로 모신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과거의 자신에게 필요한 게 미래의 자신에게 있다는 이야기!
순간 머릿속에서 팟- 섬광이 일어나고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이 생각났다.
“미래의 자신은 이미 과거에 겪은 일일 거 아냐!? 미래의 자신을 찾아가면 알아서 필요한 걸 줄 텐데!?”
그렇다!
가장 간단한 예언은 자기실현적 예언!
[난 오늘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을 것이다.]
스스로 예언하고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으면 예언은 간단히 실현된다!
워커7과 워커도 마찬가지!
과거의 워커7이 현재의 워커를 찾아가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그런데 왜? 이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지!?’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엘프와 반전능 옥좌, 반마탑 그리고 워커 실트7을 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무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