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703화>
태웅이 류호와 미호를 찾아 돌아오고 있을 때.
적염성의 유력자들은 텅 빈 성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적염성을 떠나 대피했지만, 이들까지 적염성을 비울 수는 없었다.
교활한 자, 음흉한 자와는 손을 잡아도 비겁자와 겁쟁이는 용납하지 않는 게 적염성.
그리고 분노한 허공도의 제사장이 대가를 요구하면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적염성을 지키고 있던 유력자들은 난장판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처음은 남궁 세가의 가주 남궁휘였다.
남궁휘는 홀로 적염성을 떠나고 있었다.
적월 상단의 당종이 12 가문의 수장 류호, 탄, 태웅과 타협을 하며 반기를 들었던 일은 없었던 일이 됐다.
하지만 자신은 잡아야 할 적, 이세기를 도왔고 이 일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했다.
남궁휘는 허공도의 제사장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카에게 가주 직을 넘겼다.
그리고 가벼운 행낭 하나만 가지고 수행원 한 명 없이 홀로 오래국을 향해 출발했다.
적염성 곳곳에 눈을 깔아둔 당종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의도를 짐작하리라.
당종은 계산이 철저한 사람이다.
자신이 대가를 치른 이상 가주 직을 이어받은 조카와 세가의 식솔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떠나는 길.
하지만 남궁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방계의 서자로 태어났기에 정통, 명분에 집착했다.
그 결과 큰 대가를 치르고 안휘성 본가에서 분가해 적염성에 남궁 세가를 세우고 가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방계의 서자로 태어나 세가를 세웠다!
일생일대의 업적이었다.
아니,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주 직을 버리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세가의 가주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던 자신을 거둬주신 스승님!
스승님의 은혜에 보은하기를 원했고.
초절정을 넘어서는 무의 길을 개척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장포 속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룰 서신이 있었다.
경천동지 이세기의 서신!
초절정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의 경지.
남궁휘는 상대가 말하는 거짓과 진실을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었다.
경천동지 이세기는 진실만을 말했다!
순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청해성 장가장!
그곳에 자신을 인도해 줄 사람이 있었다.
스승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던 선종의 본산 소림이 잃어버린 선종 무학의 정수.
대일여래의 빛으로!
사문의 오랜 비원을 마침내 이룬다!
하하하하하-
남궁휘는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한 점 의심 없이 말을 달렸다.
그러나 남궁휘는 자신이 어디로, 누구를 찾아가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종 무학의 정수, 대일여래의 빛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다.
이 먼 길의 종착지가 마도 18문이고, 대일여래의 빛을 전해 줄 사람이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라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문석과 얽힌 수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남궁휘는 스스로 크나큰 시련을 향해 찾아가고 있었다.
* * *
“긴급 수리를 시작하고. 축제에 쓸 물자부터 날라라!”
허공도의 제사장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
적월 상단의 당종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도의 제사장의 강으로 쏟아부은 화염으로 원양 무역선 수십 척이 불탔다!
엄청난 화염에 불을 끌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때마침 먹구름이 몰려들고 장대비가 쏟아져 화염이 꺼졌다.
이 덕분에 십여 척의 배를 더 건졌다!
그렇다 해도 원양 무역선의 절반 이상이 대파되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하지만 얻은 것도 컸다.
마침내 적염성 권력의 최정상부에 한발 걸친 것이다!
홀로 독차지한 게 아니라 4인 과두체제지만, 오히려 좋다!
권력이 분산된다는 것은 책임도 분산된다는 의미니까!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적염성의 절대권력자가 아닌 안정된 무역로를 확보해 적월 상단의 후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여우 일족의 류호, 호랑이 일족의 탄, 곰 일족의 태웅은 나쁘지 않은 동료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가 뒤섞인 상황이지만 예상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이 과두체제를 성공시키는 거다.
당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침몰한 무역선의 빈자리는 에리히 우론 제독의 사략 선단, 대형 갤리선으로 채우면 된다.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제안이다.
그러나 에리히 우론, 폭풍해 사략 선단의 제독은 지금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수십 척의 갤리선이 강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얽혀 불탔다.
폭풍해 사략 선단은 수십 명의 해적 선장들이 모여서 이뤄진 집단!
해적 선장들은 금은보화를 먹는 마수나 마찬가지고, 배고픈 마수는 주인을 무는 법이다.
에리히 제독은 휘하 선장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금은보화를 먹여야 했다!
적절한 이권만 보장해 주면 에리히 제독의 사략 선단은 자신의 손발처럼 움직일 거다.
당종은 무사에게 명령했다.
“에리히 제독을 찾아서 데려 와라!”
“네!”
무사가 고개를 숙이고 달려나갈 때.
당종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무역로는 어떻게든 돌릴 수 있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적염성의 권력자가 된 적염 상단의 압도적인 재력을 보여 주는 것!
그래서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고 모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성주님이 준비하던 대회와 여우와 호랑이 일족의 정략결혼을 진행하기로 했다.
지금은 보이는 게 실제 이상으로 중요한 아낌없이 금을 뿌려야 할 때였다!
문제는 금괴를 실어 둔 회계선이 침몰하며 현금이 말랐다는 사실이다.
아니,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었다.
어차피 회계선 금고 안에 쌓아둔 5관 금괴 대부분은 허세를 위해 준비한 가짜!
진짜 금괴가 담긴 궤짝은 10여 개 남짓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10여 궤짝의 진짜 금괴와 수백 상자의 가짜 금괴의 허세가 꼭 필요했다.
‘어떻게 하지?’
똑, 똑-
당종은 책상을 두들기며 고심을 시작했다.
회계선을 통째로 인양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회계선 금고에서 금괴 상자만 빼내는 건 가짜 금괴가 걸릴 위험이 너무 컸다.
결국, 지금 자신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건 전표와 어음뿐이었다.
해적 놈들에게 전표가 먹힐 리 없고, 재력을 보여야 하는데 어음을 끊어 줄 수도 없다.
‘…….’
당종이 깊은 고심에 빠져드는 순간.
적월 상단의 무사가 들어와 보고했다.
“남궁휘는 조카에게 가주 직을 넘기고 북문을 지나 홀로 떠났다고 합니다. 꼬리를 붙일까요?”
당종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남궁휘는 신경 쓸 거 없다!”
이세기에게 협조한 남궁휘의 행태는 괘씸하지만, 스스로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고 홀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 줬다.
그 결과 제대로 싸우지 않고 추태를 보인 흑룡방주, 적월회주 같은 이들이 설설 기고 있었다.
이 정도 성의면 용납할 수 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다.
‘부족한 금을 융통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한 금을 단기간에 융통할 수 있는 곳은 한곳밖에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당종은 결심을 굳히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남방 마탑의 마법사들을 찾아라! 대륙 상단에 연락을 넣어야 한다!”
“……!”
대륙 상단이란 말에 깜짝 놀란 부하가 다급히 달려나갈 때.
당종은 내심 긴장했다.
적월 상단은 원대륙과 타대륙 잇는 원양 무역로를 가진 거대 상단이다.
그러나 대륙 상단에 비하면 조족지혈!
대륙 상단은 7개 선단, 수백척의 배를 운용하는 초거대 상단이었다.
금은 재정거래.
대규모 광산 개발.
왕국 규모의 자금 대여.
타대륙 마탑의 금융 운용.
원대륙 전장의 준비금 보관.
이자율 결정.
……
대륙 상단은 자잘한 이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어지간한 왕국조차 엄두도 못 낼 거대한 규모의 사업을 했다.
대륙 상단, 황금 전장, 중앙은행, 이가장…….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륙 상단은 원대륙과 타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황금의 제국이었다.
그럼에도 대륙 상단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대륙 상단은 일반인, 지역 유지, 자잘한 상단은 고객으로 받지 않았다.
원대륙의 나라와 왕후장상들.
타대륙의 마탑과 왕국, 제국, 열국의 귀족들.
정점에 선 권력자가 대륙 상단의 고객이었다.
적월 상단의 모든 부를 끌어모아도 거대한 황금의 제국을 이룬 대륙 상단의 재력, 무력, 권력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재력은 힘과 비슷했다.
아이 수십 명이 모여도 어른 한 명을 이기지 못하듯이.
한계를 넘어선 재력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대륙 상단은 전설의 대요마, 마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대륙 상단에 연락해 금을 융통하는 것이다!
당종은 반기를 들었을 때 이상으로 바짝 긴장했다.
적염성에서는 실패해도 언제든 몸을 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 상단에 찍히면 원대륙과 타대륙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전표, 어음 발행, 유통 금지.
이 간단한 말 한마디면 적월 상단은 끝장나니까!
* * *
적월 상단의 무사들이 남방 마탑의 전투 마법사를 찾아 성안을 뒤지고 있을 때.
전투 마법사들은 성주 장원의 마탑 안에 있었다.
이들은 벽에 찰싹 달라붙어 바위를 하나하나 확인해 머릿돌을 찾고 있었다.
머릿돌에는 어떤 마법적 탐지도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촉각, 시각, 후각, 미각까지 모든 감각을 동원해 확인하고 있었다.
거미처럼 바위에 달라붙어 마력장으로 스캔하며.
손으로 훑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혀로 핥았다!
지난밤 몰래 마탑에 들어와 대낮이 된 지금까지 천 개가 넘는 바위를 이 방법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노력했으나 지상에서 20미터, 전체 마탑의 1할도 수색을 끝내지 못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직접 하는 건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얼어붙은 귀.
부르르 떨리는 손.
감각이 사라진 혀.
먼지에 아려 오는 코.
감각은 이미 반쯤 맛이 갔고,
뻣뻣하게 굳은 목과 끊어질 듯한 허리, 부르르 떨리는 팔다리까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바위벽에 달라붙어 있는데도 얼마나 심력을 소모했는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슴에 냉기가 쏟아질 때.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나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온전한 ‘머릿돌’을 찾아 마탑을 되살리는 건 남방 마탑에 대대로 이어진 비원!
마도 제국이 멸망하고 타대륙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내려 와 남방 마탑을 세운 선대 마법사들의 천 년의 비원이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머릿돌을 찾는다!”
“남방 마탑을 되살려 비원을 이룬다!”
……
전투 마법사들은 악을 쓰듯 외치며 바위를 하나하나 마력으로 스캔하며, 핥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았다!
퐁퐁이, 사슴이, 반짝이가 쏙 뽑아간 머릿돌을 찾아서.
* * *
수백척의 배가 뒤엉켜 불에 탄 강 한가운데.
에리히 우론, 폭풍해 사략 선단의 제독은 반쯤 불에 탄 대형 갤리선 갑판에 있었다.
주위에는 십여 척의 갤리선이 닻을 내리고 멈춰 있고, 갑판에는 해적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에 탄 갤리선들을 수습하는 모습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십여 척의 갤리선으로 시야를 가리고 수십 명의 해적이 밧줄을 잡고 강으로 잠수하고 있었다.
에리히 우론은 초조한 내심을 감추고 강을 바라봤다.
폭풍해 사략 선단은 조직력은 단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왕이라면 갤리선 선장들은 귀족이다.
왕과 귀족이 충성과 보호로 맺어진 계약 관계라면, 자신과 선장들은 금과 이익으로 맺어진 계약 관계였다.
그런데 자신의 명령으로 갤리선 수십 척이 불탔다.
이 손해를 보충해 주지 않으면 계약은 깨진다!
이대로 폭풍해로 돌아가면 다른 해적들에게 먹히거나, 사략 선단을 이룬 선장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다.
자신의 무력은 압도적이나 해전은 개인의 무력만으로 치를 수 없다.
이대로라면 우론 공국을 되찾겠다는 자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이 일을 벌였다!
에리히 우론은 갤리선으로 시야를 가린 곳, 수십 개의 밧줄이 드리워진 강물을 바라봤다.
저 아래 이 위기를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5관 금괴 수백 개가 담긴 금고가 설치된 적월 상단의 회계선이!
에리히 우론은 기원하고 기원했다.
‘회계선 금고가 잠겨 있지 않기를!’
‘당종이 금괴 상자를 미처 빼내지 못했기를!’
‘사략 선단이 금괴를 빼돌려 도망칠 때까지 걸리지 않기를!’
이때 파도가 솟구치고 잠수한 해적 한 명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아아아아아-
순간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촤아, 촤아아아-
갑판의 해적들은 정신없이 강으로 뛰어내렸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해적의 손에는 노랗게 반짝이는 벽돌, 5관 금괴가 들려 있었다!
‘됐다!’
에리히 우론은 요동치는 내심을 숨기고 고개를 돌려 해적 선장들과 눈을 마주쳤다.
시큰둥했던 해적 선장들은 분분히 고개를 숙이며 충성맹세 하듯 외쳤다.
“과연 제독님이십니다!”
“엄청난 성과! 대단합니다!”
“혹시 모르니 항구 쪽을 감시하겠습니다!”
“인양을 끝내는 데로 튈 준비를 하겠습니다!”
……
에리히 우론은 문득 고개를 돌려 강 하류를 바라봤다.
마침내 공국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우론, 가문의 이름이 붙은 땅을 되찾기 위해서!
에리히 우론은 차곡차곡 쌓이는 금괴를 바라보며 웃었다.
당연히 에리히 우론은 이 금괴 대부분이 가짜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남궁휘.
적월 상단의 후계자 당종.
사략 선단 제독, 에리히 우론.
그리고 적염성의 수많은 사람.
천문석이 던진 스노우볼이 빠르게 커지며 멀리 굴러 가고 있었다.
적염성을 넘어 청해성, 대륙 상단 그리고 타대륙의 우론 공국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