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81화>
[적염 성주와 맺은 맹약을 이행하겠다.]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인공섬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움직였다.
천지에 가득했던 빛이 꺼지듯 사라지고 세상은 일순간에 밤이 됐다!
“……!”
“……!”
모두가 경악하는 순간.
별이 가득한 밤하늘에 푸른 화염의 원이 생겨나고 그 중앙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소용돌이 가면을 쓰고, 치렁한 하얀 종이옷을 입은 채, 두 갈래로 갈라진 지팡이를 든 사람!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한여름 태양을 마주 보는 듯한 작열하는 열기가 느껴졌다!
“저 화염! 대마법이다!
“마도왕급 마법사!?”
“아니, 마도왕도 불가능하다!”
“맞아! 마탑 없이는 안 된다!”
“마법이 아니라 주술이야!”
“이런 게 주술로 가능하다고!?”
“맹약, 무슨 맹약을 이행한다는 거야?”
……
난장판에서 뒤엉키던 이들은 경악한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이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서 같은 이름이 떠올랐다.
‘허공도의 제사장!’
* * *
“류호!”
경악한 당종이 외쳤을 때.
류호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협상이 끝난 후에 허공도의 제사장이 나타났다!
바로 맹약을 철회하고 제사장을 돌려보내면 된다!
휘이이잉-
바람을 휘감고 단숨에 갑판을 뛰어넘어 돛대 끝에 올라선 류호.
류호는 허공도의 제사장을 향해 외쳤다.
“적염 성주님을 모시는 여우 일족의 가주 류호입니다! 제가 제사장님을 불렀습니다! 적염성의 혼란은 이미 끝났습니다!”
제사장의 소용돌이 가면이 류호를 바라봤다.
가면에 그려진 소용돌이가 핑그르- 회전하고 아찔한 현기증이 쏟아졌다!
“……제사장님!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곧 맹약의 대가를 드리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외치는 동시에 차가운 대답이 마음이 울려 퍼졌다.
[맹약의 대가? 넌 맹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류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
제사장이 들고 있는 지팡이가 원을 그렸다.
화르르르륵-
푸른 화염이 폭발적으로 덩치를 키우고.
태양이 지상에 내려온 듯한 엄청난 열기와 빛이 느껴졌다!
“……!”
“……!”
거대한 화염에 다시 한 번 밤이 사라지는 순간 모두는 직감했다.
‘무언가 일어난다!’
“제사장님 멈추세요! 맹약을 철회합니다!”
류호가 목이 터져라 외쳤을 때 푸른 화염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파아아앙-
돛, 밧줄, 갑판!
푸른 화염이 닿는 모든 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불부터 꺼야 한다!”
“모래, 물! 아무거나 다 가져와!”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야!”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지고 기사, 선원, 해적, 무인 모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솟구치는 화염을 발로 밟고 판자로 덮고 모래와 물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아무리 모래와 물을 쏟아부어 불을 꺼도 잠시뿐!
화르르륵-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염의 비는 멈추지 않았다.
곧 동심원을 그리며 뒤엉킨 수백척의 배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모두는 직감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
“당장 배 빼내야 한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보트! 보트를 내리자!”
“닻부터 끌어올려!”
“타 죽는다! 그냥 물에 뛰어내려!”
선원들은 정신없이 보트를 내리고 물에 뜨는 건 무엇이든 잡고 강 위로 뛰어내렸다.
“나포용 사슬부터 끊고 장대로 밀어라!”
“갤리선은 외곽에 있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사략 선단 제독 에리히 우론은 해적들에게 명령해 갤리선을 빼내려 악을 썼다.
“마법이 안 먹혀!?”
“마력장이 요동치고 있다!”
“보트로 달려! 우선 여기서 피한다.”
봉인된 마법에 당황한 남방 마탑의 전투 마법사들은 정신없이 불을 피해 달렸다.
“혹시 모르니 갑옷 벗어라!”
“우선 강으로 탈출한다.”
남방 공국의 기사들은 갑옷과 방패를 던져 버리고 보트를 찾아 뛰었다.
파스스스슥-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화염이 솟고.
갑판, 선체, 돛대. 나무로 이뤄진 모든 곳이 검게 타들어 갔다.
연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으나.
휘이이이잉-
거센 강바람이 불 때마다 엄청나 열기가 쏟아졌다!
“…….”
당종은 멍하니 이 모든 것을 봤다.
협상을 끝내는 순간 나타나 화염의 비를 쏟아붓는 허공도의 제사장!
갑자기 밤이 됐지만, 하늘과 배 위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에 이 모든 게 대낮처럼 보였다.
수백척의 크고 작은 배, 폭풍해 사략 선단의 갤리선, 적월 상단의 원양 무역선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배가 불타고 있다!
이건 단순히 배가 불타는 게 아니라 타대륙과 원대륙을 잇는 유통망이 불타는 거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다.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검은 밤하늘을 물들인 푸른 화염이 보였다.
화염 비를 뿌리는 푸른 화염은 쏟아진 물감처럼 적염성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적염성에 화염 비가 쏟아져 잿더미가 되는 순간.
적월 상단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신의 야망도 같이 잿더미가 된다!
‘막아야 한다!’
그러나 하늘 높이 떠서 화염의 비를 뿌리는 허공도의 제사장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하, 하하-
당종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때 돛대 위에선 쉴 새 없이 외침이 터졌다.
“멈추세요!”
“당장 멈추라니까!”
“맹약을 철회한다!”
……
류호는 악을 쓰듯 외치며 제사장을 향해 칼날 바람을 날렸다.
파아앙, 파앙-
그러나 제사장은 류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고.
칼날 바람은 제사장에게 닿기도 전에 미풍으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으아아악-
류호가 괴성을 지르는 순간.
탄과 태웅이 돛대를 기어 올라 외쳤다.
“이만 빠지자 류호! 어차피 강 위라 큰 피해는 없을 거다!”
“맞아 류호! 그만해! 불길이 심상치 않아! 당장 피해야 한다!”
류호는 고개를 젓고 하늘을 가리켰다.
“여기가 끝이 아니야!”
류호의 손끝.
푸른 화염은 먹잇감을 향해 다가가는 뱀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적염성을 향해서!
“……설마!?”
“어, 어어!”
탄과 태웅이 사색이 되는 순간.
류호는 악을 쓰듯 외쳤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적염성이 모조리 잿더미가 된다!”
“……!”
“……!”
탄과 태웅이 충격으로 굳어 있을 때 갑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호! 방법이 있냐? 뭘 해야 하나!?”
당종!
류호는 당종, 탄, 태웅을 향해 외쳤다.
“이세기! 지금 당장 경계석 반지를 가지고 있는 이세기를 찾아야 한다!”
“어디 있는…….”
류호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세기와 미호와 헤어진 장소를 가리켰다.
푸른 화염 비가 비처럼 쏟아지는 한 복판!
“저기 어딘가에 있을 거다!”
“……젠장!”
“빌어먹을 이세기!”
“어떻게든 찾아오겠다! 기다리고 있어라!”
탄과 태웅, 당종이 화염 속으로 달려가려 할 때.
징, 징, 지잉-
기묘한 징 소리와 함께 거대한 외침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별과 달의 그림자를 밟고 찾아와!]
[적염성을 이판사판 난장판으로 만든!]
[하늘과 땅의 가호를 받는!]
[천하제일 뱀술, 칠전팔기의 주인!]
……
이해할 수 없는 정신 나간 외침!
듣는 순간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누만 농악대!?”
“정신 나간 놈들!”
“야, 당장 꺼져!”
탄과 당종이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
하누만들이 일제히 외쳤다.
[적염 성주님의 전권 대리인이 오셨다!]
“……!”
“……!”
류호, 탄, 태웅, 당종.
그리고 대형 범선에 탈출 중이던 모두의 시선이 강으로 움직였다!
활짝 돛을 펼치고 수십 개의 대형 노로 물살을 가르는 갤리선이 보였다.
그리고 이 갤리선 돛대에 가로로 걸린 활대 위,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징, 꽹과리, 북, 피리 같은 악기를 든 사람들!
복면을 썼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하누만 농악대!
그리고 그 중앙, 대충 깎아 만든 나무 가면을 쓴 사람이 있었다.
“이세기!?”
이 순간 나무 가면을 쓴 사람이 하늘에 뜬 허공도의 제사장을 향해 외쳤다.
[허공도의 제사장! 맹약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내가 왔다!]
순간 불의 비가 멈추고 제사장의 타는 듯한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력이 요동친다!
나무 가면을 쓴 천문석은 직감했다.
‘이제 계획을 실행할 때다!’
“모두 준비됐냐?”
“곧 끝난다!”
“조금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하누만과 미호의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유로운 자세로 허공도의 제사장을 바라보며 외쳤다.
[야, 가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라!]
그리고 갤리선이 인공섬에 다가가는 동안 재빨리 계획을 점검했다.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가짜 경계석 반지’로 사기를 친다!
가짜 보석 사기와 같은 방법으로!
이 계획의 핵심은 ‘경계석 반지는 가짜’지만, ‘보증서는 진짜’라는 거다!
그러나 상대는 극에 달한 주술사.
물, 불, 바람, 바위, 산천초목!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다!
극에 이른 주술사의 눈은 이름에 담긴 언령(言靈)을 꿰뚫어 본다!
가짜 이름이 적힌 보증서를 보는 순간 허공도의 제사장은 바로 알아챌 거다.
그렇다고 범속한 자의 아무 이름이나 적으면 보증서의 의미가 없다.
보증서에는 진짜 이름, 그것도 커다란 업을 쌓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그렇다면 보증서에 적을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천문석은 품 안에 넣어 둔 보증서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또박또박 정서체로 이름과 내용을 적고 잘 접어 봉투에 넣어 봉인한 보증서.
허공도의 제사장이 엉뚱한 장소를 헤매지 않도록 봉투에는 주소까지 적었다.
청해성 장가장, 장 집사.
허공도의 제사장이 보증서를 가지고 장 집사를 찾아가면 한 사람을 소개해 줄 거다.
허공도의 제사장 앞에서 배를째도 무사할 사람!
철검장 주호에게서 엄청난 금자를 우려냈을 고수!
나이 든 이원을 만나지 못했으면 생각지도 못했을 그!
그리고 이 세계가 던전, 포켓 차원이 아니라면 감히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할 방법!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이 맞물리는 순간 자신에게는 이 세계의 그 누구라도 한 방에 훅 보내버릴 엄청난 배경이 생겼다!
이 순간 황당해할 그 얼굴이 떠오르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캬카카카카-
‘미안하다. 전생의…….’
이때 배가 불타는 대형 범선에 가까워지고 제사장의 당장이라도 폭발할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맹약의 대가를 치른다고? 넌 누구냐!?]
제사장이 묻는 순간 세계의 눈과 귀가 모이고 있다!
생각보다 더욱 높은 경지!
그러나 상정 범위 안이다!
재빨리 시선을 돌리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는 하누만과 미호!
드디어 시작된다!
전생을 각성하고, 무공에 다시 입문하고, 온갖 난장판에서 구른 이후 처음이다.
천문석은 전법륜인의 수인을 짚고 일기일원공의 내력을 담았다.
그리고 허공도의 제사장, 극에 달한 주술사의 질문에 답했다.
[천마(天魔).]
[마도 18문의 지존.]
[하늘에 물을 자격을 갖춘 자.]
[…… 천마 천문석이 바로 나다!]
단 한 번도 외치지 않은 진짜 이름을 외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