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80화>
“망했어. 완전히 망했어…….”
미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이래선 안 된다! ’
천문석은 재빨리 미호에게 외쳤다.
“포기하기는 일러! 그건 내 계획의 1단계일 뿐이야!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봐!”
“……?”
미호의 눈에서 미약한 희망의 빛이 살아나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돌 반지 태웅이 처음 경계석 반지라고 외쳤잖아? 내 생각에는 ‘경계석’인지 그냥 봐서는 모르고, 바로 확인도 안 되는 거 같은데 맞지?”
“맞아. 그냥은 확인이 안 돼. 경계석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케페니안이나…….”
‘생각대로다!’
천문석은 미호의 말을 끊고 외쳤다.
“바로 그거야!”
“뭐?”
“이 돌 반지가 경계석인지 아닌지 바로 확인이 안 되잖아? 제사장도 받자마자 확인할 수는 없을 거 아냐!?”
미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제사장이라도 경계석인지 확인은 못할 거야. 이건 고유…….”
딱-
천문석은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거야! 이게 ‘진짜 경계석 반지’라고 믿고! 제사장에게 대가로 건네주면 위기를 넘길 수 있어!”
“…….”
미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미봉책, 아니 미봉책보다 안 좋다.
제사장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큰 분노가 쏟아질 테니까!
“하아…….”
미호의 표정에 실망이 드리우고 한숨이 새어 나오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야, 잠깐만! 지금 당장의 위기만 넘기려는 거 아냐! 나중 ‘대책’도 있어!”
“대책이라고?”
“우선 경계석 반지라고 넘긴 다음에! 제사장이 나중에 따지러 오면 이걸 주면 돼!”
천문석은 잡낭에서 종이를 꺼내 들고 외쳤다.
“빈 종이?”
“지금은 빈 종이지만, 여기에 ‘이름’을 적을 거야. 그걸 나중에…… 아니, 아예 처음 제사장에게 경계석 반지를 건넬 때 같이 넘겨주는 거야. 이 종이를 ‘경계석 보증서’라고 말하는 거지!”
‘경계석 보증서!’
미호는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이세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제사장의 분노를 경계석 보증서에 이름을 적은 사람에게 돌리려는 거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 계획은 먹힌다!’
허공도의 제사장은 극에 달한 주술사!
그런 수준의 주술사에게 직접 적은 이름을 건네고 약속하면 그 자체로 계약이 된다!
그 누가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사기 계약으로 가짜 경계석을 넘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허공도의 제사장조차도 자신에게 가짜 경계석을 넘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다.
가짜 경계석 반지로 모두를 속이고 적염성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든 사람!
“와! 이세기! 이 미친놈!”
미호는 탄성을 터트리는 즉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보증서에 적을 이름이다!
탄, 태웅, 류호, 미호.
적염성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의 이름을 적을 수는 없다.
모든 게 밝혀지는 순간 적염성에도 제사장의 분노가 쏟아질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 이름이나 적을 수도 없었다.
상대는 허공도의 제사장이니까!
“이거 가짜 이름을 적으면, 바로 알아챌 텐데!? 누구 이름을 적지…….”
“그건 걱정할 거 없어. 거기 적힐 이름은 이미 정해졌거든.”
“뭐……?”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
“너! 설마!?”
미호는 보증서에 쓸 ‘이름’이 뭘지 깨달았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야! 허공도의 제사장은 극에 달한 주술사야!”
“그런 주술사한테 이름을 적어 건넨다는 건 계약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네가 어디로 도망쳐도 끝까지 뒤를 쫓을 거야! 너 절대 도망 못 쳐!”
……
경악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내는 미호.
하지만 천문석은 미호가 말하는 모든 걸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이미 대비책을 세웠다!
이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대비책!
보증서에 허공도의 제사장, 극에 달한 주술사가 찾아와도 끄떡없을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된다!
천문석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야, 걱정할 거 없어! 보증서에 적을 이름은……!”
“섬초!”
이 순간 갑자기 포대기에서 터져 나온 외침!
“어……?”
“……?”
천문석과 미호의 시선이 포대기로 향했다.
무언가 움직이듯 포대기 표면이 꼬물꼬물 흔들렸다.
그리고 포대기 가장자리에서 쏙 잠에 취한 얼굴을 내미는.
첫눈처럼 새하얀 새끼 여우!
“초콜릿 준비됐어!?”
“초콜릿?”
“……?”
문득 고개를 든 새끼 여우와 천문석이 눈이 마주쳤다!
“으앗!”
새끼 여우의 반쯤 감긴 붉은 눈이 크게 떠졌다!
“으아앗!”
빙글 고개를 돌려 미호를 보더니 새하얀 털이 곤두섰다!
“어, 어! 꿈이야!? 지금 꿈인 거야!?”
하얀 앞발로 눈을 쓱쓱쓱- 문지르는 새끼 여우!
‘뭐야, 이 녀석 특급 헌터인가?’
새끼 여우는 눈을 비비고 미호의 얼굴을 보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미호는 사라지지 않았고, 새끼 여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호 언니. 정말 오랜만에 처음 보네.”
“…….”
“…….”
천문석은 감탄했다.
‘정말, 오랜만에, 처음 보네.’
짧은 문장 속에 감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게다가 처음 본다면서 이름을 부른 것까지!
이 새끼 여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까지 특급 헌터를 닮았다!
감탄한 천문석은 입 모양으로 미호에게 물었다.
‘얘 뭐야?’
미호도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먼 친척. 제정신이 아니야.’
이때 뚝뚝 끊기는 징 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징, 징, 지잉-
“이세기! 얼른 올라타!”
거센 물살을 거스른 갤리선이 도착했다!
“우선 갤리선 타고 류호에게 가자!”
“…….”
천문석과 미호, 새끼 여우는 갤리선으로 달려갔다.
* * *
휘이이잉-
류호는 바람을 타고 달리며 적월 상단의 원양 무역선을 훑어봤다.
미호의 말대로 중앙 갑판은 뒤엉킨 사람들로 난장판이 됐고, 후미 갑판에선 탄과 태웅이 당종과 그 동료와 싸우고 있다.
탄과 태웅은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 갑판의 난장판이 끝나고 모두가 모여들면 둘 다 끝장이다!
그 전에 당종과 협상을 끝내야 한다!
류호는 후미 갑판으로 떨어지며 외쳤다.
“당종! 허공도의 제사장이 오고 있다! 싸움을 멈춰라!”
허공도의 제사장!?
당종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류호! 그게 사실이냐!?”
이 순간 류호가 후미 갑판에 곡옥을 던졌다!
파아아아앙-
거센 돌풍이 탄과 태웅, 당종과 에리히 사이를 갈라놓는 순간
쿵-
후미 갑판에 내려선 류호는 바로 대답했다.
“여우 일족의 장원을 걸고 맹세한다! 적염성으로 허공도의 제사장이 오고 있다!”
“마침내! 하하하-.”
“류호 합류해라! 여기서 끝장을 보자! 으하하-.”
탄과 태웅이 투지를 끌어올리고, 당종의 얼굴이 당혹감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류호는 고개를 저었다.
“당종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하자.”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거의 다 이겼는데. 뭔 소리야!”
류호는 난장판이 된 적염성을 가장 늦게 가로질러 이곳에 왔다.
그렇기에 탄과 태웅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알지 못한 정보를 알았다.
“탄, 태웅. 적염성에서 전투는 벌써 끝났다. 그리고 호랑이 일족과 곰 일족에서 죽은 사람은 없다.”
“어?”
“뭐?”
탄과 태웅이 당황하는 순간.
류호는 바로 당종을 봤다.
“적월 상단도 마찬가지다. 몇몇 상점이 불타고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다.”
“……!”
순간 탄과 태웅, 당종의 시선이 적염성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졌는데도 곳곳에서 솟는 연기가 보이고 도시를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전투는 벌써 끝났고 죽은 사람이 없다고?’
모두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류호를 봤다.
“여우 일족의 장원을 걸고 진실이다.”
다시 한 번 말한 류호는 쐐기를 박았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힘을 사용하면 남는 것은 잿더미뿐이다. 여기서 멈추고 서로 ‘계산’을 치르자.”
탄, 태웅, 당종 모두 사람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인물!
셋은 류호가 말하는 걸 바로 알아챘다.
아직 피의 원한이 쌓이기 전이니 서로 ‘계산’을 치르고 물러서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종은 망설였다.
가문의 가주인 탄과 태웅, 류호와 적월 상단의 후계자인 자신은 입장이 달랐다.
이번 일은 적월 상단 혼자 움직인 게 아니다.
남방 공국의 기사, 남방 마탑의 전투 마법사, 적염성에서 끌어모은 동지들.
사방에서 모아들인 용병과 낭인!
그리고 한발 물러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폭풍해 사략 선단 제독 에리히 우론까지.
권력은 피를 탐하는 마검과 같아 뽑았다면 반드시 피,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제 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으로 돌아가면, 언행에 실린 권위는 무너지고 모두는 자신의 뒤에 서는 걸 망설이리라!
방법은 하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계산’, 명분을 대가로 받는 거래를 해야 한다!
당종은 류호를 바라봤다.
“합당한 계산을 치를 수 있겠나?”
류호는 당종의 생각을 손바닥 보듯 짐작했다.
‘권위를 세울 명분을 원하고 있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호랑이 일족 장원이 박살 나고, 시가지가 난장판이 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지금이라면 탄과 태웅, 당종 모두가 만족할 ‘계산’을 할 수 있다!
“적염성은 이제 15 가문이 다스릴 거다. 새로 들어온 상단은 막대한 금을 풀어 박살 난 장원과 도시를 재건하고 다른 가문에게 생필품을 공급할 테고.”
당종은 눈을 빛냈다.
적염성을 통치하는 12 가문에 3자리를 더하고, 유통망을 적월 상단에 열어 주겠다는 뜻.
그 대가로 도시를 재건하고 탄과 태웅, 다른 가문들에게 성의를 보이라는 제안이다.
당종은 바로 핵심을 물었다.
“새로운 성주님은?”
“성주님은 아주아주 오랜 시간 후에나 돌아오실 거다.”
“…….”
잠시 고심한 당종은 고개를 저었다.
“15 가문은 너무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문들이 수백 년 동안 수뇌부에 앉아 있어. 적염성의 권위가 무너졌다.”
“그래서?”
류호의 반문에 당종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탄, 태웅, 류호.
“호랑이, 곰, 여우. 셋! 여기에 적염 상단을 더해 넷! 그리고 가장 공이 큰 하나를 너희가 골라 다섯을 채우자.”
“…….”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 권한을 줄 수는 없는 법! 그들에게는 이권이면 충분하다.”
당종은 적염성을 통치하는 12 가문을 다섯으로 줄이고 그 자리 중 단 하나를 원했다.
권력은 얻겠지만 다른 4 가문의 견제를 감당하겠다는 이야기.
다른 이라면 믿을 수 없는 제안이나 적월 상단의 후계 경쟁 중인 당종이라면 오히려 믿을 만했다.
당종이 원하는 건 오래국과 허공도를 잇는 물류 중심지인 적염성!
처음 적월 상단이 적염성에 나타난 순간부터 당종은 12 가문이라는 적염성의 기득권을 부수기를 원했다!
류호는 문득 주위를 돌아봤다.
12 가문 중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과 탄, 태웅 셋뿐.
반면에 당종은 적염성 안과 밖 모두에서 수많은 세력을 끌어모았다.
이 또한 적염성의 주민들.
이미 12 가문의 시대는 끝나 있었다.
“탄, 태웅?”
류호가 묻는 순간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금을 풀어야 할 거다. 어마어마한 금을!”
“뭐, 나야 몸을 쓰는 사람이니. 류호 네가 알아서 해라.”
탄과 태웅은 동의했고.
류호와 당종은 동시에 외쳤다.
“계산은 끝났다.”
“계산은 끝났다.”
그리고 모두는 무기를 거뒀다.
당종은 한 걸음 물러선 에리히 우론에게 고개를 까닥이고 갑판을 봤다.
고용주가 적과 싸우는데, 인장 반지를 놓고 뒤엉켜 있는 정신 나간 녀석들!
당종은 갑판을 향해 외쳤다.
“당장 멈춰라! 이제…….”
이때 하늘에서 폭음이 터졌다.
파아아아앙-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모이는 순간 푸른 화염이 폭발하듯 생겨났다!
그리고 모두의 마음속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염 성주와 맺은 맹약을 이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