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79화>
경계석, 허공도의 제사장, 적염성, 불바다, 잿더미!
천문석의 머릿속에서 키워드가 순식간에 조합되어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경계석 반지를 대가로 주지 않으면 적염성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된다.”
스스로 말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쏟아졌다!
“……뭐!? 야, 이거 진짜야!? 왜 빨리 말 안 한 거야!?”
“몇 번이나! 어, 내가 몇 번이나 멈추라고 외쳤잖아! 이런 젠장! 지금이라도 찾아야 해!”
분통을 터트리던 미호는 바로 몸을 달려 달리려 했다.
이때 보이는 움켜쥔 손!
“설마!”
미호는 재빨리 이세기의 손을 펼쳤고 손에서 돌 반지가 나타났다!
“경계석 반지! 어떻게 된 거……!?”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 멀리 난장판이 된 갑판을 보는 동시에 깨달았다.
“가짜를 던진 거구나?”
“어, 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
“와, 이 세기 잔머리! 잘했어! 잘했다고! 으하하-.”
미호는 이세기를 끌어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엄마만 오면 걱정할 거 없어! 엄마는 적염성 최고의 풍술사거든! 바로 바람 신호 보낼게!”
휘이이이-
파아아, 팡, 팡, 팡-
허공에서 바람 터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이 난장판도 이제 곧 끝나! 잘했어! 이세기!
하하, 하하하-
미호는 이세기의 등을 치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
하지만 천문석은 웃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듯 뛰고,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 채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수천 명을 끌고 도망칠 때보다 지금 더 큰 위기감, 아찔함이 느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문석의 시선이 손에 들린 돌 반지로 향했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이 돌 반지는 경계석 반지가 아니니까.
“……!”
순간 머릿속에서 섬광이 번뜩이듯 장면이 잇달아 떠올랐다.
성주 장원에서 시작해 광장까지.
그리고 적염성 시가지를 거쳐 이곳 인공섬까지.
자신은 한 번도 이 돌 반지가 경계석 반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신뢰의 증표, 적염성의 모든 권력을 위임한 반지라고 외쳤을 뿐이다.
‘경계석 반지!?’라고 처음 외친 건 태웅이다!
하지만 누가 처음 경계석 반지라고 말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모두가 오해하게 행동했고, 곧 ‘불의 재앙’이 적염성에 떨어지게 됐으니까!
‘허공도의 제사장’이라는 이름의 재앙이!
천문석은 제사장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바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카린과 처음 만났던 계단산.
수백의 거대 원숭이, 하누만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게 만든 존재.
소용돌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 압도적 강자!
그가 허공도의 제사장이다!
이미 자신은 제사장이 일으킨 새파란 화염 폭풍을 이미 겪었다.
겁화(劫火)!
겁화는 그냥 화염이 아니다.
사령 화로와 생사팔문의 보법으로 길을 뚫으려다가 자신조차 훅 갈 뻔했던 화염이다!
그 겁화라면 저 거대한 적염성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수십만의 인간, 수인, 요마괴이가 살아가는, 적염성이 잿더미가 된다고!?’
적염성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모두를 굴린 건, 모두의 머릿속에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이제 전투, 탈출, 난장판은 문제가 아니다!
적염성이 잿더미가 되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야, 경계석 반지 말고 다른 걸 대가로…….”
천문석이 다급히 묻는 순간.
휘이이이잉-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쏟아지고 외침이 들려왔다.
“미호!”
포대기를 몸에 감은 류호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엄마! 왜 이렇게 늦었어!”
반색한 미호가 달려가는 순간.
류호는 고개를 돌려 다급히 외쳤다.
“성주님께 받은 돌 반지! 경계석 반지 가지고……?”
“그게…….”
천문석이 대답하기 전.
미호가 한발 먼저 외쳤다.
“가지고 있어! 엄마 이제 걱정할 것 없어! 경계석 반지 찾았어!”
“아니, 잠시만……!”
하아아-
류호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포대기를 봤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미호가 보낸 바람 신호를 향해 달리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선조님은 ‘초콜릿’이란 걸 주지 않으면 절대 안 움직이겠다고 5살 아이처럼 땡깡을 부렸다!
중간에 선조님이 픽 쓰러져 다시 잠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선조님이 허공도의 제사장을 막아줄 보험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상태가 생각보다 더욱 안 좋았다.
긴 세월을 살아온 선조님은 마치 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였다.
류호는 선조께서 이렇게 된 이유가 짐작됐다.
세계의 나무의 개구멍, 무저갱의 마굴을 통과할 때 혼돈이 존재의 본질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경계석 반지를 찾았으니 제정신이 아닌 선조님이 나설 필요는 없다.
아니, 허공도의 제사장이 힘을 쓰기 전에 난장판을 마무리 짓고 돌려보내는 게 최선이다.
“미호! 탄과 태웅은?”
“저기! 적월 상단 상선에서 당종과 싸우고 있어!”
“잠깐만 내 말 좀…….”
미호는 여전히 난장판인 갑판을 가리키며 천문석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이세기! 얘가 가짜 반지로 저 난장판을 만들었어! 모두를 낚았다니까! 으하하하-.”
“……그 반지에 관해서 꼭 할 이야기가…….”
꽉-
류호는 이세기의 손을 꽉 움켜쥐고, 두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막겠지만, 혹시라도 허공도의 제사장이 개입하고 대가를 요구하면 경계석 반지를 꼭 전해야 해요!”
“…….”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포대기를 벗어 새하얀 여우와 함께 미호에게 매주는 류호.
“엄마? 이 새끼 여우는 뭐야!?”
류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우리 먼 친척이야.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미호 네가 지켜 주렴.”
“……지켜 주라고?”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새끼 여우를 데려 와 지켜 주라고? 그 엄격한 엄마가!?
미호가 의아해할 때.
류호는 딸의 얼굴을 잡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호! 정신 차려! 지금 중요한 건 허공도의 제사장을 가능한 한 그대로 돌려보내는 거야! 탄과 태웅을 빼내고 당종과 협상할 생각이야. 그러니…….”
“뭐? 협상한다고!?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허공도 제사장이 쓸어버리면 우리가 이겨!”
류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변했단다.”
그렇다 상황이 변했다.
적월 상단의 당종이 반기를 들고 피를 봤으니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공도의 제사장을 불러 반기를 든 모두를 몰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우 일족의 장원 심처로 돌아가며 확인한 적염성의 상황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도시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수만 명이 뒤엉키는 난장판이 됐다.
당연히 도시 곳곳이 박살 나고 약탈당해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인명 피해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다친 사람은 있어도 생명이 경각에 놓인 중상자, 사망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신화적인 존재가 강림해 모두가 적당히 싸우도록 유도한 것처럼 있을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피와 증오의 수레바퀴가 구르지 않은 건 분명했다.
지금이라면 이 모든 것을 축제 중 일어난 촌극으로 얼버무리고, 적월 상단의 막강한 재력을 난장판이 된 도시를 복구하는데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걸 위해 내세울 명분도 이미 있었다.
“미호.”
류호는 미호를 부르며 고개를 저었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힘을 사용한 곳에는 잿더미만 남는단다. 적염성을 지키는 게 우리가 할 일이란다. 엄마가 부탁할게!”
류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미호를 한번 꽉 안아 주더니 바람을 타고 난장판이 된 대형 범선으로 달려갔다.
휘이이이잉-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협상이라니…… 하아-.”
류호를 멀어지는 엄마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우선 협상이 끝날 때까지 몸을 피하자. 우리는 협상이 틀어지고, 제사장이 대가를 원하면 경계석 반지를 건네줘야 해.”
“…….”
그러나 대답도 움직임도 없다.
몇 걸음 걷던 미호는 고개를 돌렸다.
“왜 안 따라와? 아, 혹시 대가 때문이야? 걱정할 거 없어. 그 경계석 반지를 건네는 대가는 여우, 곰, 호랑이 일족에서 제대로 치를게.”
“……대가 때문이 아니라. 네가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응?”
마침내 진실을 말할 순간이 왔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간신히 입을 여는 순간.
징, 징. 지잉-
이때 강에서 뚝뚝 끊기는 징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하류에서 다가오는 갤리선이 보였다.
피리리리리-
두웅, 두우웅-
땅, 따앙, 따아앙-
……
엉망진창 농악이 들려오는 갤리선.
하누만 농악대가 갤리선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 * *
“하누만 농악대! 너랑 같이 도망쳤던 동료들이지!? 저 갤리선 타고 피해 있자! 야, 여기야!”
반색한 미호가 크게 손을 흔드는 순간.
돛대에 오른 하누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세기!”
“드디어 찾았다!”
“야, 기다려 금방 갈게!”
“빨리빨리! 노 저어! 얼른 데리고 튀자!”
촤아, 촤아아-
수십 개의 노가 물살을 거슬러 천천히 접근했다.
“와, 일이 이제야 잘 풀리네! 됐어! 저 갤리선 타고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면 되겠다.”
미호가 갤리선을 보며 환호하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너 할 말 있다며?”
“…….”
이 순간 천문석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의 미호.
협상하러 간 류호.
갤리선을 타고 돌아온 농악대.
모두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갈등의 폭풍이 몰아쳤다!
류호가 당종과 협상하러 갔으니 그냥 말하지 말까?
협상이 잘 되면 경계석 반지를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대가로 건넬 필요도 없을 텐데!?
그러나 삶은 예측불허!
게다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사고를 생각하면 상황이 좋게 풀릴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
천문석은 말없이 손에 놓인 돌 반지를 봤다.
특급 헌터의 선물이자, 성주의 권한이 담긴 인장 반지.
하지만 경계석 반지는 아니다!
분노한 허공도의 제사장이 푸른 겁화로 적염성의 모든 걸 태우는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경계석, 경계석, 경계석만 있으면!’
마음으로 외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
“경계석!”
순간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순식간에 한가지 계획이 얼개를 갖췄다!
감이 왔다.
될 거 같았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선 미호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천문석은 갤리선을 보는 미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응? 뭐야?”
“미호. 할 말이 있다. 혹시 모르니 앉아서, 흥분하지 말고 들어라.”
“흥분? 야, 나 흥분하고 그러는 사람 아냐! 그냥 말해!”
“아니, 그래도 앉는 게…….”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됐으니까! 그냥 말해! 하하하-.”
천문석은 한 걸음 물러서 모든 사실을 말했다.
“……이게 오해가 좀 있었어. 이게 절대 내가 의도한 상황이 아닌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은…….”
모든 진실이 이야기가 되어 풀려 나왔다.
“…….”
어느새 미호는 몸을 돌려 홀린 듯이 천문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미호는 단숨에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외쳤다.
“야, 이 미친놈아!”
“…….”
“거짓말이지!? 어, 농담이지!?”
“…….”
“혹시 대가 때문에 그래!? 충분한! 아니 엄청난 대가를 치를게!”
“…….”
“빨리 말해! 방금 한 말 그냥 해 본 말이라고 빨리 말하라고!”
천문석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땅을 가리켰다.
“땅에 맹세코 방금 한 말 사실이다.”
“……!”
미호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현기증을 느꼈다.
허공도의 제사장을 불렀는데, 대가로 건네줄 경계석 반지가 가짜다!
엄마가 당종과 협상하러 갔는데, 자신이 찾았다고 말한 경계석 반지가 가짜였다!
가짜! 가짜! 가짜!
이세기의 경계석 반지는 가짜다!
머릿속에서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야, 어떡할 거야! 이거 어떡할 거야!”
미호가 절규하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외쳤다.
“미호! 잠깐만! 나한테 해결 방법! 이 사태를 해결할 계획 있어!”
“뭐, 해결 방법!? 계획이 있다고!?”
미호의 얼굴에 희망이 생겨나는 순간.
천문석은 방금 세운 해결 방법, 계획을 외쳤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이게 ‘진짜 경계석 반지’라고 믿는 거야!”
천문석은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가짜 경계석 반지’가 놓여 있었다.
“…….”
미호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망했구나…… 전부다. 완전히 망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