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62화>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선측에서 줄줄이 뻗은 노가 수면을 때렸다.
촤아아아아
수십 척의 갤리선은 새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호수를 가로질렀다.
함성과 괴성이 뒤엉킨 난장판이 된 시가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견시수의 외침에 항해사가 바로 보고했다.
“제독님! 명령하신 대로 바로 하선 준비를 하겠습니다!”
폭풍해 사략 선단의 제독, 에리히 우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였다.
그러나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에리히 우론의 마음은 타들어 갈 듯 초조했다!
약탈 명령을 내린 세 선장에게서 전해진 보고, 적염 성주의 인장 반지 때문이었다!
‘반드시 인장 반지를 손에 넣어야 한다!’
에리히 우론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인장 반지를 얻는 순간 이 적염성을 집어삼킬 명분을 얻는다.
혼자서 집어삼킬 수는 없지만, 수십만의 사람이 사는 이 거대한 도시는 그 자체로 작은 나라나 마찬가지다.
권리를 나눠도 이 적염성에서 뽑아낼 인력, 이권, 재력이면 엄청난 규모의 사략 선단, 아니 해군을 만들 수 있다!
이 해군으로 단숨에 카데르 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대륙 남부 수운의 중심 남 베라강의 출구를 막으면!
식량과 철, 생필품이 움직이는 수상 물류와 제국군이 움직일 해로가 끊긴다.
공국의 숨통을 움켜잡게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싸울 필요도 없이 대대로 우론 가문의 땅, 우론 공국이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다!
이걸 위해서 지금 할 일은 하나.
에리히 우론은 번쩍 고개를 들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하늘을 바라봤다.
[카캬카카카카-]
이 웃음소리의 주인, 이세기가 가진 인장 반지만 손에 넣으면 이 모든 게 현실이 된다!
그리고 자신에겐 이세기를 잡을 힘이 있었다.
빙글 몸을 돌리자 호수를 질주하는 수십 척의 갤리선들이 보였다.
폭풍해의 사략 선단!
수십 척의 갤리선에 탄 4900명의 해적!
이 해적들을 모조리 풀어서 인장 반지를 찾는다!
그리고 해적들이 최선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상이 필요했다.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되겠지만, 이름만으로도 심장이 뛰게 할 엄청난 보상!
에리히는 손을 들어 난장판이 된 시가지를 가리키며 외쳤다.
“모두에게 전해라! 인장 반지를 찾는 녀석에게 이 적염성의 성주 자리를 주겠다!”
와아아아아-
갑판에서 시작된 함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둥둥, 둥둥둥-
북소리가 빨라지고!
촤아아, 촤아아아-
수천 개의 노는 점점 더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에리히 우론이 이끄는 폭풍해의 사략 선단, 4900명의 해적은 순식간에 호수를 가로질러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 * *
“명령을 따르는 놈들이 아무도 없다고!?”
당종의 분노어린 목소리에 적월 상단의 전령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
당종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주위를 훑었다.
이세기의 웃음소리를 쫓아 도착한 우뚝 솟은 7층 건물 옥상!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적월 상단의 사람들뿐이다.
함께 거사를 일으킨 문파, 방파, 단체의 수뇌부들은 추적 중에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고.
직접 계약한 남방 공국의 정예병과 기사들, 남방 마탑의 전투 마법사, 폭풍해의 사략 선단 모두는 전령을 통해 전한 명령을 무시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카캬카카카카카-]
멀리서 울려 퍼지는 이 웃음소리의 주인, 이세기란 놈이 터트린 외침 때문이다!
‘나를 잡으면! 성주님께 받은 신뢰의 증표! 이 적염성을 냠냠할 수 있는, 이 돌 반지를 준다!’
이 장난스러운 외침이 광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자신이 그린 큰 그림은 한 번에 박살 났다!
같이 거사를 일으킨 동지들, 막대한 이권을 주고 계약한 모두는 더 먹음직한 먹잇감을 쫓아 달려갔다.
‘인장 반지!’
지금 모두는 적염성을 보상으로 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증거도 없는 몇 마디 말만 듣고, 다른 사람이 만든 판 위에서 춤을 춘다니!
“멍청한 녀석들!”
당종이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 주위에서 대기 중이던 부하들은 움찔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곧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단주님 어떻게 할까요?”
“…….”
큰 그림을 그리고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쏟아부은 엄청난 시간과 금전. 그리고 영향력!
이 모든 게 담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이 장난 같은 술래잡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고!?
당종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주님! 해적 놈들이 시가지에 내렸습니다! 4천이 훌쩍 넘는다는 보고입니다! 노잡이까지 모두 뛰쳐나왔습니다!”
“남방 공국의 기사들이 이세기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전투 마법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보고가 계속 이어지자.
결국, 당종은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이세기를 잡는다!”
“수로를 수색 중인 협선에 명령해라!”
“넓게 퍼져 이세기의 위치를 추적한다!”
“성주를 찾는 무사를 불러들여라! 이세기부터 잡는다!”
당종은 결심했다.
이 빌어먹을 술래잡기에 참여하기로!
그리고 이세기를 잡아 성주가 되는 즉시 돌 반지를 박살 내 버리겠다고!
* * *
“……반지 없으면 적염성 불바다 된다……!”
처절한 외침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또다시!
휘이익-
천문석은 휘파람을 불며 보이지 않는 상대의 끈질김에 감탄했다.
광장에서 처음 굉천수를 터트렸을 때 시작된 외침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뛰어넘은 지금까지 들려왔다!
“와, 이 녀석 아직도 쫓아오네! 그럼 이것도 쫓아오나 볼까!?”
피식 천문석은 달리는 속도를 올리고 도주 경로를 복잡하게 잡았다.
타다다다닥-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모인 대로로 뛰어나가 직선으로 달린다!
“저기다!”
“잡아라!”
“이세기!”
다급함 외침과 함께 인파가 모여드는 순간.
재빨리 가로등을 타고 올라 창으로 뛰어들었다.
캬아아아-
깜짝 놀라는 여우 아가씨에게 인사하고.
“미안합니다. 여우님!”
한달음에 방을 가로질러 계단을 뛰어올라 옥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기다!”
“옥상에 나타났다!”
다시 한 번 다급한 외침이 터지는 순간.
단숨에 가로수로 뛰어내려 골목을 달리고!
앞을 가로지르는 수로에서 점프!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화물선 갑판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저기다!”
“저 화물선 위에 있다!”
뒤를 쫓는 사람들의 외침과 발소리가 몰려들 때.
화물선은 다리 아래로 들어갔다.
‘지금이다!’
천문석은 번개같이 뛰어올라 다리 밑에 찰싹 달라붙었다!
“화물선이 다리를 지나가고 있다!”
“다리에서 뛰면 탈 수 있다!”
쿠르르르릉-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주저하지 않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
쿠쿵, 쿵쿠쿵-
화물선 갑판에 수십 명의 추적자가 뛰어내려 외쳤다.
“샅샅이 뒤져라!”
“분명 화물 사이에 숨었다!”
이 순간 천문석은 빙글 회전해 다리에 올라서서 외쳤다.
“카캬카- 멍청한 녀석들! 그럼 잘 가라!”
“어!?”
“어어!?”
“어. 어어어!”
경악한 시선이 쏟아질 때.
골목에서 들려오는 외침!
“다리 위, 다리 위에 이세기가 있다!”
천문석은 손을 흔들고 바로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온 후 내력에 목소리를 담아 건물 옥상으로 던졌다.
팟-
내력이 터지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외침이 퍼져 나갔다.
[야, 빨리빨리 쫓아와라!]
“건물 옥상이다!”
“바로 뛰어라!”
와르르르-
뒤를 쫓아 쏟아져 들어온 추적자들이 목소리에 낚여 계단을 오를 때.
다시 한 번 바람결에 실린 외침이 들려왔다.
“……돌 반지…… 불바다……!”
“와, 이 녀석 아직도 쫓아와! 도대체 어떻게 쫓아오는 거야?”
천문석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추적자에게 새삼 감탄하며 골목길을 달렸다.
“불바다라고? 하여간에 잔머리는! 하!”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헛웃음.
추적 실력에 비해 사기 치는 실력은 영 떨어졌다.
하수에게나 통하는 저런 사기를 자신에게 치다니!
적염성이 불바다가 된다고?
지금 전투라는 불이 붙으려는 걸 끄려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 거다!
천문석은 얼굴 모르는 추적자가 있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담은 내력을 집어던졌다.
[카캬카카카카카- 야, 좀 참신한 소재를 사용해! 불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기다! 뒤다!”
“이 새끼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엉뚱한 방향에서 터진 외침에 추적자들이 우르르 몰려갈 때.
재빨리 몸 상태를 확인했다.
최대 출력 굉천수와 전법륜인을 사용하고 남은 내력은 3할가량.
이 상태로 남궁휘 같은 초절정 고수가 만나면 30합도 버티기 힘들다!
하지만 천문석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전장 상황이 아주 좋다.
수많은 건물과 도로,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도시.
게다가 자신의 뒤를 쫓는 추격자들은 소수의 강자가 아닌 서로 적대하는 집단이 뒤엉킨 수천 명의 인파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많은 도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추격자들.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는데 최적의 전장이다!
눈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
외침을 담은 내력을 사방으로 던져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추격자들은 제대로 모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3일 밤낮이라도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천문석은 웃었다.
모든 일에는 관성이 있다.
인장 반지에 홀린 불나방들을 데리고 적염성 시가지에서 크게 한 번만 뺑뺑이를 돌리면 된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바퀴가 계속 구르듯.
이 한 번의 뺑뺑이로 만들어진 난장판은 자신이 사라져도 멈추지 않고 계속 커질 거다.
그리고 원래 딴생각도 살만해야 드는 법!
이 난장판에서 데굴데굴 정신없이, 죽도록 구르면.
머릿속에 가득했던 전투 의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그때 적당한 배를 타고 강 하류로 빠져나가면 적염성도 안녕이다!
카캬카카카-
통쾌한 웃음을 터트릴 때.
쿵쿵쿵쿵쿵-
골목 출구에서 육중한 발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다!”
“이 골목이다!”
“이세기가 달려 오고 있다!”
……
극도로 천천히 움직이던 중장 보병들.
광장 전투에서 태업하던 육중한 갑옷을 입은 중장 보병들이 달려 오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뛸 수 있던 거였어!?”
“……!”
“……!”
움찔한 중장 보병들은 말없이 대형 방패로 골목 출구를 막았다!
쿵쿵, 쿵쿵쿵-
겹겹이 쌓이는 대형 방패!
“단단히 방어를 굳힌다!”
“절대 통과시키면 안 된다!”
“공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다!”
외침만 들어도 이들의 생각이 짐작됐다.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 인장 반지를 날름해서 대박을 터트리겠다는 생각!
이때 등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기님!”
“헉- 잠시만! 허억!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에게 그 인장 반지를 넘기시면……!”
“안전을 보장하고! 막대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힐끗 고개를 돌리니 반대쪽 골목 입구에서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바람처럼 달려 오고 있었다.
남의 싸움이라 생각해 꾸물거리던 기사들과 정예병들이 가장 먼저 자신의 꼬리를 잡았다!
휘이익-
천문석은 휘파람을 불며 대답했다.
“안전 보장? 의뢰인이랑 싸우기라도 하려고? 막대한 보상? 왜 적염성을 통째로 주려고?”
“…….”
“…….”
정곡을 찔린 기사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때 골목 입구 방패진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절대 피하면 안 된다!”
“공국의 시민들을 생각해라!”
하앗-
외침과 함께 기합을 지르며 단단히 방어를 굳히는 중장 보병!
광장의 전투를 봤기에 이들의 방패진이 얼마나 단단한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방패진으로 발이 묶고 뒤에서 달려오는 기사들이 공격해 제압할 것이다!
폭 2미터 남짓! 좁은 골목길 가운데서 앞뒤가 막힌 위기의 순간!
천문석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장 보병 뒤를 향해 내력을 실어 외쳤다.
[으앗! 앞뒤로 포위당했다! 위기야! 어쩔 수 없이. 당장 ‘인장 반지‘를 주고 항복해야……!]
기사들의 얼굴이 환해질 때.
중장 보병 뒤에서 악을 쓰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버텨! 새끼야!”
“이세기! 조금만 버텨!”
“야, 항복할 거면 우리한테 항복해!”
“비켜! 공국의 거북이 놈들 당장 비켜라!”
……
항복한다는 외침에 눈이 돌아간 해적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단단히 방어를 굳힌 중장 보병, 아군의 등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