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655화 (656/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55화>

깨달음의 순간.

전투 양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전투의 맥!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투의 맥은 광장이 아니라 성주 장원에서 광장까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길, 진입로였다!

천문석의 시선이 전투의 맥을 따라 움직였다.

바위 절벽 위 성문에서 시작해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낭인 무사들이 가득한 진입로를 모두 내려오면 나오는 건.

단단히 방어를 굳힌 무인들, 호랑이 일족의 가주 탄과 무사들을 붙잡고 있는 ‘모루의 뒤통수’다!

‘모루의 뒤통수’를 공격해 깨뜨리는 순간.

양면 포위는 깨지고 전세는 뒤바뀐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 옥상에서 일렁이는 마력 파문.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는 마력 각성자, 마법사들!

-노를 저어 광장에 접근하는 갤리선 3척과 그 뒤 멀리서 다가오는 갤리선 수십 척.

탄과 무사들의 옆구리를 찌르기 위해 다가오는 해적들!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바위 언덕 위 성주 장원의 병력이 모루의 뒤통수까지 길을 뚫어야 한다.

두세 사람이 서면 어깨가 부딪치는 좁은 길, 단단히 방어를 굳힌 낭인 무사들이 지키는 수백 미터 비탈길을 뚫어야 하는 쉽지 않은 일!

그러나 이런 일이야말로 자신의 특기다!

카캬카카카카-

천문석은 웃음을 터트리며 가속했다.

류호와 태웅이 있는 성문을 향해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뚫기 위해서!

의도치 않았지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러나 천문석은 류호, 태웅, 탄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도록 도울 생각은 없었다.

방패벽을 세운 정예병.

어떻게든 피를 보지 않으려는 이들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물리쳐야 할 마수와 몬스터, 적이 아니다.

이들 또한 자신의 삶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강호의 은원은 무거우나, 그보다 중요한 게 대의다!

반기를 든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건 류호, 태웅, 탄의 대의다.

자신의 대의는 달랐다.

성벽을 달리는 천문석은 문득 고개 돌려 광장 너머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를 살폈다.

보이고, 들려오고, 느껴졌다!

이 거대한 도시의 창문에, 지붕에, 건물 곳곳에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인간, 수인족, 요마괴이와 이종족이!

지난밤에 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인간, 도깨비, 수인족, 요마, 괴이. 온갖 종족이 꼬맹이들이 같이 거리를 달리며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이!

다른 모습, 다른 생각을 가진 수많은 이들이 같은 ‘사람’으로 불리는 도시, 적염성.

천문석은 이들 모두가 하나로 뒤엉킨 엉망진창인 도시, 이 적염성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버려진 산속 사당에서 동생들과 살던 고아 소년이, 마도 18문의 지존이 되어 무림의 정점에 우뚝 선 그 날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깨달았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죽고 세상에는 중요한 게 너무나 많았다.

파릇파릇 돋는 보리싹.

개울가에서 신나게 물장구치는 아이들.

노랗게 잘 익어 흔들리는 이삭.

따뜻한 온기를 안겨 주는 한 짐의 장작.

달콤한 사탕 한 개에 빠진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아이가.

어느새 배 나온 어른이 되어 부인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모습.

이 모든 것을 일컫는 한 단어.

삶.

천문석은 삶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심법에 다시 입문한 후에도 무의 극에 닿기를 원하지도 진심으로 싸우지도 않았다.

장난치듯 황당하고 어이없게 싸우며, 굉천수의 섬광으로 모두를 굴리고 번개같이 도망쳤다.

마굴의 마신조차 무릎 꿇린 전생 천마의 천마신공보다, 섬광과 굉음으로 모두를 데굴데굴 굴리는 현생 알바의 굉천수가 백 배는 더 마음에 들었다.

‘삶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극에 달한 천마신공을 버리고 일기일원공을 창안하며 담은 극의.

자신의 대의였다.

그래서 천문석은 이번에도 같은 마음으로 달렸다.

은혜를 갚는다!

단, 내 대의에 따라서!

피와 살이 튀고 죽음이 당연해질 전투를, 헛웃음과 어이없음, 황당함이 가득한 난장판으로 만들겠다!

방법은 간단했다.

전장에 한발 걸친 모두를 개같이 굴려서, 전투 자체가 엉망진창, 흐지부지되도록 하면 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는, 모두가 패배자인 거대한 난장판을 만들겠다!

“삶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의니까!

“모조리 데굴데굴 굴려 주마!”

천문석은 크게 외치고, 대악당처럼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카캬카카카카-

* * *

“……!”

미호는 알 수 없는 한기에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방금 뭐지?!”

휘이이이잉-

이때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엄마부터 찾아야지!”

미호는 다시 성벽 위를 달렸다.

암반에 뚫린 터널을 지나자 굳게 닫힌 성문과 그 뒤에 도열한 무사들이 보였다!

‘늦지 않았구나!’

미호는 무사들을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곧 찾았다.

거대한 덩치의 태웅 아저씨 옆!

장죽을 물고 있는 하얀 옷의 주술사 류호!

“엄마!”

미호는 크게 외치며 단숨에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

딸을 본 류호의 눈이 경악으로 커질 때.

미호는 엄마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며 외쳤다

“엄마! 내가 도와주러 왔어! 이제 걱정할 것 없어!”

“…….”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

미호가 고개를 들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러 왔다고?”

“맞아! 내가 엄마를 도와줄게!”

“어떻게?”

“……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따악-

머리에 떨어지는 장죽!

“으악- 뭐야?! 도와주러 왔는데! 왜 때려!”

미호가 머리를 부여잡고 외치는 순간.

류호의 손이 미호의 귀를 잡았다!

“으앗, 으아앗! 아파! 아프다고! 왜 이래!”

“이 생각 없는 것아! 밖으로 빠져나갔으면! 도시 안에서 무사들을 모아 왔어야지! 포위된 성으로 혼자 기어 들어오면 어떡해!”

“아…….”

미호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는 순간.

류호의 가슴속에선 울화통이 터졌다.

“아니, 얘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멍청해!”

류호가 쿵, 쿵- 가슴을 두들기자, 미호는 황당함에 마주 소리쳤다.

“딸이 누굴 닮았겠어! 당연히 엄마 닮았지!”

“뭔 소리야! 넌 아빠 닮았어! 나는 조금도 안 닮았거든!”

“와, 와! 나도 엄마! 아니, 류호씨 닮고 싶지 않거든요!”

“뭐? 류호씨! 와, 얘 말하는 것 좀 봐!”

류호는 번개같이 미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머리에 장죽을 내리쳤다!

딱-

으악-

미호는 악을 쓰며 발버둥 쳤지만, 요괴선 류호의 강철 같은 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엄마 그만! 그만 때려!”

“그만은 무슨! 너, 아까! 그 알바라는 인간은 어떻게 된 거야! 얘가 어디서 함부로 꼬리를…….”

이때 태웅이 다급히 류호의 입을 가렸다.

“……!”

“류호. 눈이 많다.”

태웅이 귓가에 속삭이는 순간.

류호는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바짝 긴장한 웅진족 무사들의 시선이 자신과 미호에게 모여 있었다!

“손 놓을게. 저기 빈 전각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라.”

류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태웅은 바로 손을 풀었다.

“그거 미호에게도 전할게.”

“알았다.”

태웅의 대답을 들은 류호는 미호를 끌고 빈 전각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사색이 된 미호는 다리로 전각 기둥을 붙잡고 버텼다.

“으앗! 밖에서! 밖에서 이야기해!”

다른 사람 시선이 있는데도 사정없이 때렸다!

빈 전각에 들어가면 얼마나 혼날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하아- 혼내려는 거 아니니까! 빨리 다리 풀어! 중요한 일이야!”

미호가 슬그머니 다리를 푸는 순간.

류호는 단숨에 전각으로 들어가 장죽을 휙 내리그었다.

탕탕, 탕탕탕-

일순간에 사방의 문이 닫히고.

류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

심상찮은 분위기!

미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류호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광장의 탄, 성주 장원의 나와 태웅이 위험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뭐지, 함정에 걸리고 정신이 나간 건가?!’

미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

움찔 움직이는 장죽을 잡은 손!

파바바밧-

미호는 잔상을 흘리며 번개같이 물러섰다!

하아-

한숨을 내쉰 류호는 장죽에 약초를 채워 넣고 불을 붙여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하아아-

그리고 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게 아니라. 함정에 빠진 척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시간을 끈다고? 설마! 도와줄 아군이 있는 거야?!”

“맞아. 이제 곧 우리가 기다리던 아군이 올 거야. 그 사람이 오는 순간 전세는 완전히 뒤집힌다.”

“……그 사람? 설마 온다는 아군이 한 명?!”

“그래 한 사람이야.”

‘한 사람이 수천 명이 뒤엉킨 싸움의 전세를 뒤집는다고?!’

미호는 황당해 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미쳤어! 한 사람이 전세를 어떻게 뒤집어! 적월 상단에서 제대로 준비했어! 호수에 수십 척의 배까지 떴어! 게다…….”

그러나 류호의 입에서 이름이 들려온 순간 미호는 얼어붙었다.

“우리를 도와줄 그 사람. 허공도의 제사장이야.”

허공도의 제사장!

“허공도의 제사장?! 밤을 낮으로 바꾸고! 호수를 단숨에 날려 버린! 혼돈에 물든 요마괴이 수천을 홀로 불태운 그 제사장!?”

경악한 미호가 외치는 순간.

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허공도의 제사장이 올 거야.”

“어, 어어어?!”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미호는 전신을 떨며 말을 쏟아 냈다.

“엄마 미쳤어! 대가는? 허공도의 제사장은 엄청난!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가져가잖아! 설마! 대가도 없이 부른 거야?! 밤이 사라졌던 일 잊었어!? 허공도 제사장 앞에서 배 째다가 진짜로 배가 찢어져서 망한 영주, 불탄 도시가 얼마인데!!”

류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거 없어. 이건 아주 오래전 적염 성주님과 허공도의 제사장 간에 맺은 맹약이니까 말야.”

“그럼……?”

미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빛날 때.

류호는 확신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줄 대가는 이미 준비됐단다. 그러니…….”

대가가 이미 준비됐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미호의 귀에 뒷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허공도의 제사장의 힘이면, 적월 상단이 그 어떤 준비를 했다 해도 단숨에 밀어 버릴 수 있다!

처음부터 엄마를 돕겠다고 여기에 올 필요 자체가 없었다!

‘하, 그럼 그렇지! 엄마가 아무 생각 없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 리가 없지! 그냥 튀는 건데! 시바, 시바! 이제 어떻게 튀지?!’

미호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말을 흘리고 어떻게 튈지 고심할 때.

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할 일이야. 알겠지?”

“……뭘 해야 한다고?”

미호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 순간.

류호는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움직이면 적월 상단이 바로 눈치챌 거야. 아무도 모르게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줄 대가를 가져오는 게 네가 할 일이라고.”

“제사장에게 줄 대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류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거란다.”

“……!”

이 순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머릿속에서 류호의 말이 메아리쳤다.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거란다!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거란다!!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거란다!!

‘설마, 설마설마설마설마!!’

머리가 하얗게 변한 미호가 온 신경을 모두 집중하는 순간.

류호의 입이 열리고 들려와서는 안 되는 이름이 들려왔다.

“경계석 목걸이.”

“…….”

“여우 일족에 대대로 내려오는 경계석 목걸이. 그게 바로 오래전 적염 성주님이 준비하신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전해 줄 맹약의 대가란다.”

“……그거 가보라며! 선조님이 상께서 놀려오셨던 마을에서 구해 온 가보!”

미호가 절규하듯 외치자, 류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님이 구해 온 경계석 목걸이로 적염 성주님이 허공도의 제사장과 맹약을 맺으셨어.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비밀로 했단다.”

미호는 깨달았다.

적염성에서 일어난 전투는 곧 끝난다.

전투에 참여한 아니, 적염성 전체가 먹튀에 분노한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아작나는 결말로.

적염성은 망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제 엄마에게 아작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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