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50화>
자욱한 증기가 안개처럼 깔린 장원.
밧줄이 드리워진 탑 뒤로 10미터.
류호와 태웅이 은신 결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님을 데려간 인간이 지상에 도착하는 것을!
태웅은 자욱한 증기에 가려진 로프를 가리켰다.
“류호. 이미 내려와서 떠난 거 아닐까? 너무 늦어! 아니면 반대쪽으로 내려오는 거 아닐까?!”
태웅의 불안한 목소리에, 류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저곳에 있다. 느낌이 온다.”
증기에 가려진 탑을 가리키는 류호.
“그보다 내가 말한 거 잊지 마라. 계획대로 성주님을 되찾으려면, 어떻게든 ‘알바’라는 인간을 제압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중간에 멈추면 안 된다!”
“알았어. 내가 그 인간을 붙잡고 늘어질게. 그런데 진짜 성주님이 화 안 내실까? 아까 보니까 친해 보이던데……? 성주님 화내시면 엄청 무서운데…….”
태웅이 걱정스러운 질문에 류호는 대답 없이 어깨를 두들기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태웅.’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후의 결말은 뻔했다.
성주님의 분노가 쏟아지겠지.
자신뿐만 아니라 태웅에게도…….
그래도 다행이었다.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 스카라베 마법사와 전사가 있었다면 아예 계획을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류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요력으로 증기 속 탑을 더듬듯이 살폈다.
“……!”
이 순간 자욱한 증기 속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미약한, 평소라면 무시했을 느낌!
너무나 미약한 느낌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잔머리와 기만에 능한 인간.
성주님이 알바라고 부른 그 녀석이 존재감을 죽이고 내려오고 있다!
이때 탑 반대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탁-
태웅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그 앞을 가로막는 류호의 손!
“……!”
고개를 돌린 태웅은 류호의 입에 올린 손가락을 보는 즉시 몸을 움츠리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잠시 후…….
그으으-
밧줄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소리 없이 땅에 내려서는 인형이 얼핏 보였다.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이 매달린듯한 모습!
‘알바!’
‘그 녀석이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바로 움직였다!
류호가 손을 긋는 동시에, 태웅이 전력으로 돌진했다!
파아아앙-
류호의 열풍이 증기를 날려 버리는 순간.
크아아앙-
태웅이 포효를 터트리며 팔을 펼쳤다!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인형!
‘잡았다!’
그러나 류호는 방심하지 않았다.
곡옥을 쥔 채로 태웅 뒤를 따라 달리며 주술을 준비했다.
그리고 봤다.
“으아악- 나 잡혔어! 인질이 돼버렸어!!”
인간의 가슴에 고정된 채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있는 성주님!
“아앗- 성주님!”
“태웅! 피해! 데굴데굴, 굴럿!”
성주님의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태웅은 생각하기 전에 움직였다.
전력으로 몸을 던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카카카카캌-
순간 신나게 웃음을 터트리는 성주님.
‘멍청한 녀석!’
몇 번이나 주의시켰는데 잔꾀에 당하다니!
류호는 구르는 태웅을 밟고 뛰어오르며 손을 펼쳤다!
휙, 휙, 휙-
곡옥 세 개가 날아가 커다란 삼각형을 그리는 순간.
팡, 팡, 팡-
연이은 폭음과 함께 사방에서 생겨난 소용돌이!
풍쇄진(風鎖陣)!
도망칠 곳은 없다!
인간이 멈칫하는 순간.
성주님이 외치려 한다!
류호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손으로 괘를 그려 풍쇄진을 하나로 합치려 했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
비명을 듣는 순간 류호는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굳어 버렸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곡옥 중앙.
미호가 서 있었다.
알바라는 인간에게 꼬리를 잡힌 채로!
“……감히 내 딸 꼬리를 잡아!!”
경악한 류호가 분노를 쏟아 내는 순간.
비명과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아-
“가까이 다가오면! 이 꼬리를 마구마구 흔들겠다!”
“안 돼!”
사색이 된 류호는 바닥을 구른 태웅까지 끌어당기면서 다급히 물러섰다!
“이것도 치워라!”
외치는 즉시 풍쇄진을 물리는 류호.
천문석은 냉혹한 시선으로 류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순간 류호의 사선을 가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미호!
“흐윽, 흑, 흑- 엄마…….”
“엄마가 꼭 구해 줄게! 엄마 믿지? 조금만 참으렴…….”
류호가 부드럽게 딸을 달랠 때.
천문석은 내심 감탄했다.
‘와! 이게 진짜 먹히네!?’
미호가 말한 방법은 자작 인질극이었다.
그것도 생명을 위협하는 게 아닌 ‘꼬리’를 잡고 펼치는 인질극!
‘내 꼬리를 잡고 흔들면, 엄마는 절대 움직이지 못할 거야!’
류호의 자신만만한 장담에도 반신반의했다.
‘아니, 자기 꼬리도 아닌 딸 꼬리를 잡는다고 무력화된다고?!’
만화도 아니고 이게 먹힐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안이 없기에 미호의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미호는 사정을 아는 자신조차 속아 넘어가는 놀라운 연기력을 펼쳤고.
특급 헌터가 발연기를 펼치고 있는데도!
“으앗! 나 잡혔어! 훠이훠이! 물러나! 나 엄청 위험해!”
류호는 딸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호의 계획은 완벽하게 먹혔다!
자신이 미호의 꼬리를 잡은 모습을 보는 순간.
류호만이 아니라,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이제야 몸을 일으키는 태웅까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물러섰다.
“어, 어어! 미호 꼬리를 잡았잖아!”
천문석이 멀어지는데도 류호와 태웅은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대로 빠져나가면 된다!’
천문석은 특급 헌터와 진교은을 앞뒤로 매달고, 손에는 미호의 하얀 꼬리를 잡은 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
“……!”
스윽, 쓰윽-
당장이라도 깨질 듯 아찔한 침묵 속에서 안전 군화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특급 헌터의 발연기 소리만 울려 퍼졌다.
“으읏- 분하다! 특급 헌터가 잡히다니!”
10, 20, 30미터…….
거리가 점점 멀어져 모습이 완전히 증기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안절부절특급 헌터를 바라보던 태웅의 탄식이 들려왔다.
“성주님! 야, 성주님은 풀어 줘! 미호랑 혼약하는데 성주님까지 데려가는 건 너무 하잖아!”
‘혼약?’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멍해지는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천문석.
꼬리를 잡힌 미호.
새하얗게 질린 류호.
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온 외침!
“혼약?! 이게 무슨 소리야!”
“야, 표정관리! 표정 관리해!”
“……표정관리? 지금 설마, 설마…… 미호 너!”
“혼약? 혼약이 뭐야?! 좋은 거야?!”
경악으로 일그러진 류호의 시선이 딸과 인간을 오갔다.
당황한 딸의 얼굴.
황당해 하는 인간의 표정.
그리고 어느새 꼬리에서 떨어진 손!
“……!”
이 순간 류호는 모든 걸 깨달았다.
자작극!
“미호!!”
류호의 전신에서 요력이 폭발하는 순간!
천문석과 동료들은 자욱한 증기 속을 달리며 외쳤다.
“이게 제 본의 아닙니다!”
“혼약이 뭐냐니까! 나도 가르쳐 줘!”
“엄마, 미안! 어쩔 수 없었어. 나중에 돌아올게!!”
……
“성주님! 혼약이 뭐냐면…….”
태웅이 큰 소리로 설명을 시작할 때.
분노한 류호는 괴성을 지르며 외쳤다.
“으아아악- 반드시 잡는다!”
류호가 달리려는 순간.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목소리! 류호님! 태웅님?!”
자욱한 증기 속에서 튀어나온 웅인족 무사가 다급히 외쳤다.
“성문을 공격하는 적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싸우는 본대와 합류할 생각 같습니다!”
류호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번쩍 정신을 차렸다.
“……!”
“……!”
류호와 태웅의 시선이 마주치고, 두 사람의 머릿속에선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승기를 잡았구나!’
‘탄의 기습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
“류호! 성주님은 어떡하지?!”
태웅이 좌우를 번갈아 바라볼 때.
류호는 바로 결정하고 외쳤다.
“태웅! 우선 적부터 밀어내자! 저 방향이면 호수다! 배를 타고 수로를 거쳐 강으로 빠져나갈 거다! 도주로가 강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류호가 성문 방향으로 달리자, 태웅은 바로 그 뒤를 따라 달리며 명령했다.
“모든 병력을 성문으로 모아라! 한 번에 적을 뚫고 광장으로 밀고 내려간다! 앞뒤에서 적을 포위한다!”
“네!”
웅인족 무사는 증기가 가득한 장원으로 달리며 외쳤다.
“모두 성문으로 모여라! 반격을 시작한다!”
“모두 성문으로 모여라! 반격을 시작한다!”
……
성문으로 달리는 류호는 갈등 어린 눈으로 미호와 성주님이 사라진 방향을 봤다.
미호가 수로를 타고 강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상류, 하류로 이어지는 보름 거리의 모든 도시가 적염성의 영향권이다.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쾌속선을 강에 띄우면 3일 거리라도 따라잡을 수 있다!
지금은 승기를 잡은 전투를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다.
“…….”
이 모든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철없는 딸과 어린 성주님을 쫓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전장은 변화무쌍하다.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는 순간 상황은 반전되어 패배할 수도 있었다.
탄이 모아 온 12 가문과 병력이 지금 패배한다면, 설령 허공도의 제사장이 와서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에서는 패배한다!
‘승기를 잡은 지금 반기를 든 녀석들을 처리하고 성주님과 미호를 찾는다!’
마음의 결정을 한 류호는 성문 방향으로 가속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호! 이 철없는 녀석!”
자작극에서 자신의 꼬리를 만지게 하다니!
하아, 하아아-
류호는 연신 탄식하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미호를 잡으면 엉엉 울 때까지 엉덩이를 때려 주겠다고!
* * *
[모두 성문으로 모여라!]
[반격을 시작한다!]
장원 사방에서 고함이 들려올 때.
미호는 선두에서 일행 모두를 인도하고 있었다.
류호와 태웅의 기척이 사라지자, 천문석은 바로 미호에게 확인했다.
“혼약이라니?!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맞아! 혼약이 무슨 말이야! 나한테도 설명해 줘! 궁금하잖아!”
구으, 구으으으-?
특급 헌터가 크게 외치고, 조용히 있던 하늘 고래가 고개를 갸웃했다.
“…….”
그러나 미호는 여전히 침묵한 채로 달렸다.
“빨리빨리……!”
특급 헌터가 다시 외치려 할 때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진교은.
“혼약은 즐겁고 좋은 거예요.”
“즐겁고 좋다고?! 혹시 키즈카페 가는 것처럼!?”
“네! 맞아요! 키즈카페 가는 것처럼!”
“아…… 혼약이 그런 거구나…….”
특급 헌터가 고개를 끄덕일 때.
천문석이 다시 한번 미호에게 확인했다.
“야, 방금 태웅이 한 말!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쿵쿵, 쿵쿵쿵-
이때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앞서 달리던 미호가 다급히 멈췄다.
“정지. 얼굴 보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 순간 증기 속에서 십여 명의 웅인족 무사들이 나타났다!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이 터지는 순간.
미호는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나다!”
“나? 어떤 정신 없는 녀석이야!”
버럭 소리 질렀던 웅인족 무사는 미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여우 일족의 미호님?!”
“그래 내가 미호다!”
“아니, 미호님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어, 뒤에 인간…….”
미호는 웅인족 무사의 시선을 가리고 버럭 외쳤다.
“야! 당장 성문으로 모이라는 소리 안 들려! 걸어 다니지!? 뛰어! 당장 뛰어 새끼들아!”
그리고 무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순간.
웅인족 무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문을 향해 번개같이 달려갔다.
미호는 천문석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봤지? 내가 도움이 되는 거!”
“아니, 그건 알겠는데. 방금 혼약…….”
천문석이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
미호는 바로 몸을 돌려 달리며 외쳤다.
“바로 뒤로 따라붙어! 성벽까지 직선으로 길 뚫을게!”
“출발!”
구으으응-!
미호, 특급 헌터, 퐁퐁이가 외치는 순간.
천문석은 의문을 접어 두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천문석의 머리를 빠르게 돌아갔다.
꼬리를 잡은 자신을 보고 기겁해서 물러서던 류호!
태웅이 탄식하듯 내뱉은 ‘혼약.’이라는 단어!
꼬리를 잡는 것에는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다!
어렴풋이 머리에 떠오르는 가정들!
그러나 이 가정이 선명하게 떠오르려 하자, 누군가 가슴을 때리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 그냥 잊어버리자!’
천문석이 다짐하는 순간 얼굴 앞으로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특급 헌터의 손에는 구멍 뚫린 작은 돌이 놓여 있었다.
“이건 왜?”
특급 헌터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바 혼약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