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32화>
“……!?”
천문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50여 미터 앞!
바람에 흩날리는 수많은 깃발 아래, 방패와 검, 창, 도끼를 들고 진형을 짠 천여 명의 무사가 있었다.
전투 소음이 들리지도, 전투의 격렬함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연히 기감에 걸리는 사람들 모두가 내원 성벽에 있는 호랑이 일족의 무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두 집단이 대치 중인 상황!
왼쪽, 완전히 무장한 천여 명의 무사들!
오른쪽, 성벽 위에 올라선 호랑이 일족의 무사 수백 명!
일촉즉발!
공격 측과 수비 측이 대치 중인 성벽 앞으로 스스로 들어와 버렸다!
“…….”
“…….”
터질 듯 아찔한 침묵이 흐르고, 당장이라도 정신이 날아갈 듯 아득해질 때.
최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이것도 상정 범위지!? 그렇지!?”
“……!”
천문석은 재빨리 혼미해지려는 정신줄을 잡았다.
성벽 위, 성벽 앞!
양측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다!
직감이 번뜩였다!
-허술하게 펼쳐진 진형!
-규격도 형태도 다른 깃발들!
-무사들의 장비와 복장 모두 제각각!
여러 단체의 무사들을 하나로 모은 급조한 티가 역력하다!
한 줄기 활로가 보이는 순간.
천문석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모두 손을 들어라!”
엉뚱한 명령이었으나, 연이은 승리의 기억에 반사적으로 손을 드는 모두.
“모두 나를 따라라!”
외침과 동시에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걷는 천문석.
쿵, 쿵, 쿵, 쿵-
수백 명의 무사, 헌터, 이종족이 두 손을 들고 천문석의 뒤를 따랐다.
천문석은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벽을 향해 움직였다!
“반갑습니다. 하하하-.”
“아유,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날씨도 추운데 모두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하하-.”
“뭐지, 저 녀석들은!?”
“늦게 도착한 아군 아냐?”
“어, 저 뒤에 호랑이 무복 같은데?”
“그럴 리가. 적이면 바로 들이쳤겠지!”
“맞아. 깃발도 여전히 대기 깃발이잖아.”
……
이때 의아해하던 한 무사가 다급히 외쳤다.
“엇! 저기 저놈! 호랑이 일족 무사 맞다! 전에 싸운 놈이야!”
“뭐!?”
“앗! 은색 호랑이 자수!”
“저놈도 호랑이 일족 무사다!”
……
곳곳에서 외침이 터지고 당장이라도 들이치려는 순간.
“모두 정지!”
“그대로 대기해라!”
“모두 움직이지 마라!”
진형 곳곳에 자리한 조장과 대주들이 다급히 외쳤다.
무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볼 때.
어느새 천문석과 손을 든 무리는 내원 성벽에 도착했다.
천문석은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사다리! 야, 사다리 좀 빨리 내려 줘!”
“……뭐?”
성벽 위에서 얼빠진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
천문석은 다시 한 번 외쳤다.
“아군이다! 사다리! 빨리빨리! 사다리 내리라고!”
이때 천문석을 따라 걸은 사람들이 나섰다.
“야, 나야! 외당 3조 무사!”
“주방에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감옥 전각 수문장이다! 빨리 사다리 내려!”
……
성벽 위 무사들이 깜짝 놀라 사다리를 내릴 때.
진형을 갖추고 대기 중이던 무사들이 술렁였다.
“저놈들 성벽에 오른다!”
“지금이라도 공격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여전히 깃발은 대기 상태고, 공격 명령도 내려 오지 않았다.
천문석은 안도했다.
‘먹혔다!’
여러 단체의 무사가 섞인 모습을 보고 지른 낮은 확률의 도박이 먹혔다!
쿵, 쿵-
성벽에서 사다리가 내려지고, 후미부터 줄줄이 성벽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적들은 이 모습에도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황!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지금이라도 들이치면 끝장이니까!
천문석은 시선을 정면에 둔 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설, 허준. 우선 빠져라.”
“뭐, 너는……!?”
“같이 빠져야지!”
힐끗 눈길을 주자, 최설과 허준의 얼굴에 생겨난 걱정이 보였다.
천문석은 장난스레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잊었냐? 나 초절정이다.”
“…….”
“…….”
짧은 침묵 후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
툭. 툭-
“……조심해라.”
“……바로 올라와.”
최설과 허준이 인파 속으로 스며들 때.
천문석은 미동도 하지 않고 천여 명의 무사를 바라봤다.
아궁이에 올려진 물이 가득 찬 가마솥처럼 끓어오르는 투지와 기세가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여러 단체가 모였다고 해도 상궤에 어긋나는 대응!
‘이 녀석들 무슨 생각인 거지!?’
의문을 품는 순간.
째애앵-
징 소리와 함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한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나와 외쳤다.
“남궁세가의 남궁휘다! 내원 성벽을 걸고 일대일 비무로 승패를 가리자!”
내력을 실은 외침이 하늘을 뒤흔들 때.
남궁휘는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는 무사들을 바라봤다.
순간 터져 나온 외침!
“남궁세가의 가주께서 아량을 보이셨다!”
“너희가 무림인이라면! 비무로 승패를 가리자!”
우와아아아아-
환호성이 터지고 진형을 짠 천명의 무사가 투지와 기세를 담아 동시에 외쳤다!
[아량을 보였다!]
[비무로 승패를 가리자!]
“……!”
이 순간 천문석은 적들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강호의 행사는 크든 작든 명분이 모든 것!
싸움이 시작되고 서로 피를 봤다면 비무 제의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피를 보기전인 대치 상황!
적들은 수백 명의 무사와 헌터, 수인족, 요마괴이 들을 그냥 보내 줬다.
상대가 먼저 크게 양보한 이상, 반드시 이쪽에서도 양보해야 했다!
이것이 강호의 도의이고 명분이다.
즉, 지금 성벽 위의 호랑이 일족은 남궁세가의 가주가 요구하는 일대일 비무를 받아들이거나 크게 체면을 상해야 했다.
천문석은 수천 무사 앞에 우뚝 선 남궁휘를 살폈다.
내원 성벽에서 살기 어린 눈빛과 투지가 쏟아지나 담담하게 서 있는 남궁휘!
남궁휘 뒤에서 외치는 무사들에게서 그 누가 나와도 승리한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이런 확신을 주는 고수는 하나뿐이다.
초절정!
남궁휘는 초절정 고수다!
천문석은 감탄했다.
여기서 비무를 거부하면 체면이 상하고, 사기가 바닥을 친다.
그렇다고 비무를 승낙하면 남궁휘라는 초절정 고수와 싸워야 한다.
싸웠다가 패배하기라도 하면 싸움도 없이 내성 성벽을 내줘야 할 판!
비무를 거부할 수도 승낙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와, 호랑이 애들 제대로 외통수에 걸렸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그러나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두 집단이 비무를 하든 말든 사다리를 타고 내원 성벽에 올라, 은근슬쩍 동료들과 도망쳐 허준의 은인을 픽업해 밖으로 튀면 된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카캬카-.’
천문석이 내심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사다리를 향해 뒤로 걸을 때.
남궁휘의 내력이 실린 외침이 들려왔다.
“일대일 비무가 두려운가!?”
[하하하하-]
천여 명의 무사들의 비웃음이 내원 성벽으로 쏟아질 때.
가볍게 손을 드는 남궁휘!
일순간에 정적이 찾아오고.
남궁휘의 담담한 시선이 움직였다.
사다리에서 시작해, 성벽 위를 쭉 훑는 시선.
이 시선에 닿는 순간 내원 성벽에 선 무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성문 위 지휘 깃발에서 멈추는 순간.
남궁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검지, 중지, 약지.
펼쳐진 세 손가락!
“설마……!”
“저자가 지금……!?”
깊은 침음성이 터져 나올 때.
남궁휘의 광오한 선언이 떨어졌다.
“셋! 셋이서 나와도 좋다!”
잠시간의 정적 후에, 엄청난 환호성이 뒤따랐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무애 남궁휘 대협!”
“초절정 고수 남궁휘 가주!”
“하하하- 네놈들이 무인이라면, 삼대일 비무를 받아들여라!”
……
광기 어린 외침이 끝없이 쏟아졌다.
가뜩이나 수에서도 밀리는 데, 실시간으로 사기가 뚝뚝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쯧쯧쯧- 호랑이 이 멍청한 녀석들!’
천문석은 내심 혀를 찼다.
강호의 행사는 크든 작든 명분이 모든 것!
그러나 강호에는 이것보다 더 큰 법칙이 있다.
강자존(强者尊)!
승자독식(勝者獨食)!
명분도 결국 승리를 위해서!
어떻게든 이기는 게 우선이다!
호랑이 일족은 남궁휘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끌려다니느라 기회를 날려 버리고 있다!
자신이라면?
-남궁휘가 나서는 순간. 입을 열기도 전에 화살부터 먹였을 거다.
-비무 제의를 하는 순간. 받아들이고 역으로 울화통이 터지도록 시간을 끌었을 거다.
-그리고 삼대일 비무를 제안하는 순간. 바로 콜을 외치고 최고수 셋을 내보내 진흙탕 개싸움을 벌였을 거다.
초절정이어도 천검 같은 규격 외의 상대만 아니라면, 절정 고수 셋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다.
천문석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자신의 싸움이 아니다.
힐끗 뒤를 살피니 자신을 따라온 사람 대다수가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라갔다.
최설과 허준도 사다리를 오르고 있고, 이제 남은 인원은 서른 명 남짓.
남은 서른 명이 성벽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다리를 올라 동료들과 튀면 남궁휘, 호랑이 일족 모두와 안녕이다.
그러나 사건·사고는 언제나 결정적 순간에 터지는 법!
천문석은 방심하지도 튀어나온 못처럼 나서지도 않았다.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기척을 죽인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벽으로 걸었다.
차아아아아아-
이때 성문 위에서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휘 깃발이 흔들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호인족 무사가 앞으로 나섰다.
“남궁 가주님. 내당 당주, 혁 인사드립니다!”
포권을 취하는 내당 당주, 혁!
남궁휘는 마주 포권하며 외쳤다.
“내당 당주! 비무를 받아들이겠는가!?”
“받아들이겠습니다! 패자는 그 즉시 무사들을 이끌고 장원을 떠난다! 맞습니까?”
“맞다! 그 누구라도 좋다. 세 사람을 내려 보내라!”
남궁휘가 주저하지 않고 외치는 순간.
그 뒤에서 무사들의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
삼대일 비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세를 인정하는 것!
호랑이 일족 무사들의 사기가 뚝뚝 떨어지고, 치욕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타이밍 더럽게 못 맞추네. 진작에 나서지. 쯧- .”
천문석이 혀를 차는 순간.
내당 당주, 혁이 내력을 실어 외쳤다.
“남궁 가주님. 호의는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일대일 승부로 끝을 내겠습니다!”
일대일 비무!
남궁세가의 가주, 초절정 고수 남궁휘와 일대일 비무라고!?
충격에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반전되려는 순간.
남궁휘는 흐름을 끊고 외쳤다!
“나를 상대할 자는 누구인가!”
성벽 위와 아래!
수천 명의 시선이 내당 당주, 혁에게 모였다!
‘지금이다!’
천문석은 기척을 죽인 채 빙글 몸을 돌렸다.
텅 빈 성벽 앞, 마지막 사다리가 남아 있었다!
‘모두 안녕이다! 카캬카카-’
그리고 사다리로 달리는 것과 동시에.
내당 당주, 혁이 내력을 실어 외쳤다.
“경천동지 이세기!”
“……뭐?”
천문석이 반사적으로 성벽 위를 보는 순간.
사다리가 쑥- 성벽 위로 올라가고 환호성이 쏟아졌다.
“경천동지 이세기!”
“초절정 고수 이세기!”
“경천동지 이세기가 나선다!
“성주님을 수호하는 검! 이세기 대주님!”
……
“……아니, 아니아니! 잠깐만! 누가 비무에 나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