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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626화 (627/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26화>

천문석은 레이 실트의 강철봉을 지게막대기처럼 든 채 주위를 살폈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른 새벽. 그러나 도시는 빠르게 깨어나고 있었다.

술에 취해 사방에 널브러진 사람들과 곳곳에 널린 쓰레기들.

집과 상가에서 나온 사람들이 도로를 청소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벽에 기대 놓고 있었다.

그리고 짐을 가득 실은 수레와 지게를 짊어진 무리가 남쪽 부두 방향에서 북쪽으로 줄줄이 이동하고 있었다.

얼핏 귓가에 들려오는 대화.

“……성주님이 좋아하실까?”

“……기준이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하던데?”

대화만 들어도 감이 왔다.

새로운 성주에게 진상품을 바치려는 상인과 무사, 단체들이다!

천문석은 북쪽 언덕 위에 세워진 성주 장원을 잠시 바라봤다.

‘새로운 성주는 어떤 사람일까?’

문득 호기심이 들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동료들을 찾는 일!

천문석은 호기심을 지워 버리고 품에서 꺼낸 지도를 살폈다.

적염성을 그린 지도에서 뱀술을 만든 여관을 짚었다.

여관 후원과 연결된 수로가 북쪽으로는 성주의 장원 아래 호수로, 남쪽으로는 도시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강과 이어졌다.

“아카린. 네가 준비한 배 타고 다음 납품처, 사막까지 이동할 수 있냐?”

아카린은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까닥였다.

“가능해. 강 따라 내려가다가 ‘안개 길잡이’만날 거야. 돈으로는 고용이 안 되는데, 이 술 만든 하누만 주조장인이랑 아는 사이거든. ‘안개 길잡이’가 길 열어 주면, 한 2, 3일? 그쯤이면 열사의 사막에 도착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탈출 방법이 심플한 게 마음에 들었다.

동료들을 찾아서 여관으로 돌아와 배를 타고 떠나면 끝이다!

이때 아카린이 골목길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천문석은 지도를 접어 품 안에 넣고, 내력을 끌어올린 손으로 머리를 쓱 문질렀다.

순간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손에 가득 묻어났다.

마치 손에 수염이 난 듯한 모습!

천문석은 이 손으로 코 아래, 입가와 턱을 쓰다듬었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빳빳한 수염이 되어 붙는 순간.

꾹, 꾹, 꾹-

내력을 담은 지법으로 광대, 뺨, 턱, 눈가를 누르고, 당기고, 밀었다.

지금 만나는 인간들은 조폭 김기철과 용역 헌터들,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본 얼굴 그대로 만났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천문석은 뒷골목을 걷는 동안 손을 바쁘게 움직여 인상을 바꿨다.

“다 왔다. 저 장원이야!”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린 아카린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수염이 돋아난 부드러운 인상의 30대 남자로 변해 버린 이세기!

“너 그 얼굴! 우와! 뭐 한 거야!?”

“어때 그냥은 못 알아보겠지?”

“얼굴이 변한 건 아닌데, 인상이 확 달라졌는데!? 얼핏 봐서는 몰라보겠어!”

아카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을 제대로 본건 조폭 김기철 정도. 여기에 옷까지 일꾼 복장이다. 눈썰미가 좋은 헌터라도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할 거다.

천문석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 너머로 보이는 성벽 같은 담장을 가리켰다.

“저기가 호랑이 일족 장원이냐?”

“어 조금만 가면 남문이야. 얼른 가자! 새벽이라 아무도 없을 거야!”

골목을 나와 남문에 도착하는 순간 두 사람은 입을 떡 벌렸다.

남문 앞에 몰린 엄청난 인파!

무복을 입은 무사.

단출한 옷의 일꾼.

수백 명의 인간, 수인족, 도깨비, 요마괴이들이 무사, 일꾼 복장으로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이거 뭐야!?”

천문석이 황당함에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남문을 지키는 호인족 무사가 문을 두들기며 외쳤다.

쾅, 쾅, 쾅-

“야, 두 줄로 서라! 무사 지원자는 왼쪽! 일꾼 지원자는 오른쪽!”

남문에 모여든 수백 명의 사람이 둘로 나뉘어 줄을 설 때.

아카린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호랑이! 이 굼뜬 녀석들이 뭐 이렇게 빨리 움직였어! 새벽부터 일꾼이랑 무사를 고용하는 거야!?”

“……!”

어젯밤 들은 기억이 났다.

호랑이 일족이 인력 부족이 심각해 무사와 일꾼들을 모으고 있다고.

그런데 모여든 무사와 일꾼의 수가 수백 명이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이 사람 대부분을 고용할 것 같았다!

아카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야, 이거 어떡하지? 이 정도 인원이 장원에 풀리면…….”

듣지 않아도 뒤에 이어질 말이 짐작이 갔다.

사방에 눈이 깔리는 순간 인력 부족으로 인한 경계 소홀은 바로 해결된다!

하지만 천문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말이다!’

“오히려 잘됐다!”

“뭐?”

천문석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낯선 사람 수백 명이 갑자기 장원에 고용되면 어떻게 될까?”

아카린은 눈을 번쩍 떴다.

“그렇지! 안면을 익히기 전! 지금이 오히려 기회구나!”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절묘한 기회를 잡았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이런 틈은 사라졌을 거다. 문제는 저 인파를 지나가며 얼굴을 팔면 안 된다는 건데…… 너 방법 있냐?”

아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 동문 어디로 갈까? 이 술만 있으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

천문석은 머릿속 장원 지도를 떠올렸다.

감옥으로 사용되는 전각과 가까운 건 서문!

그러나 서문에는 창고가 있어 경계가 삼엄하다. 거리가 멀더라도 경계가 덜한 동문이 낫다!

“동문으로 이동하자, 그게 낫겠다.”

천문석과 아카린은 성벽이나 다름없는 10미터 높이의 담을 따라 걸어 곧 동문에 도착했다.

동문 앞에는 십여 명의 호인족과 인간 무사들만 있었다.

“어이, 거기 뭐야!? 남문으로 가라! 동문은 폐쇄됐다!”

호인족 무사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드는 순간.

아카린은 막대기로 지게에 짊어진 술통을 가리기며 외쳤다.

“야, 급해! 이 술 납품해야 한다!”

힐끗 지게에 실린 크고 작은 술통을 살핀 호인족 무사는 여전히 귀찮아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술 가지고 남문으로 가라니까. 지금 여기 바쁜 거 안보이냐?”

“크크큭- 그렇지 우리 장기두느라 엄청 바쁘지!”

“맞아! 수문장 중에 아마 우리가 제일 바쁠걸! 흐흐흐-.”

의자에 앉아 장기를 두는 호인족과 인간 무사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아카린은 웃으며 폭탄을 던졌다.

“이 술 결혼식에 쓸 하누만 주조장인의 맑은술인데?”

“야, 하누만이고 뭐고 남문으로…….”

순간 장기를 두던 인간 무사가 벌떡 일어났다.

“결혼식에 쓸 하누만 주조장인의 술이라고!?”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는 아카린.

인간 무사는 재빨리 다가와 뚫어지게 술통을 바라봤다.

“뭐야? 열어서 확인이라도 시켜 줘?”

아카린이 지게를 내려놓는 시늉을 하자, 인간 무사는 기겁해서 손을 휘저었다.

관혼상제를 앞두면 금기에 민감해지는 법!

게다가 호랑이, 여우 두 일족의 정략 결혼식에 사용할 술이다!

이런 술을 일개 수문장인 자신이 먼저 확인한다?

경을 칠 일이다!

“아니다! 빨리 가지고 가라! 너, 너! 이 녀석들 집사님께 바로 안내해라!”

“네 조장님!”

“알겠습니다!”

귀찮은 기색이던 호인족 무사가 빠릿빠릿한 기세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호인족 무사를 따라 걸으며 천문석과 아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이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이미 큰 그림은 모두 그렸다.

아카린이 술을 납품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천문석은 감옥에 갇힌 인간을 찾아 동료들의 실마리를 찾는다.

동료가 갇혀 있으면 바로 탈출시키고, 정보만 얻는다면 그냥 빠져나오면 된다!

천문석과 아카린 두 사람은 곧 텅 빈 전각에 안내됐다.

“집사님 지금 바쁘셔서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여기서 기다려라.”

할 말을 끝낸 호인족 무사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아카린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끌 수 있는 시간은 한 시진이다. 잊으면 안 된다.”

“알았다. 바로 움직일게!”

천문석은 대답과 동시에 가볍게 뛰었다.

순간 아카린이 천문석의 발을 잡아 엄청난 힘으로 던져 올렸다!

단숨에 10미터 높이 기둥으로 날아가는 천문석!

천문석은 기둥을 박차고 뛰어들보를 잡고 빙글 회전해 올라섰다.

탁-

바로 기감을 퍼트리며 들보 위를 달려 지붕의 상태를 파악했다.

‘아무도 없다!’

감이 오는 순간 기와를 들어 올리고 미끄러지듯 지붕으로 빠져나왔다.

천문석은 지붕에 납작 엎드린 채로 기척을 죽이고 눈과 귀로 주위를 훑었다.

이 장원의 무사들은 최소 이류 이상!

장기를 두던 수문장은 절정의 벽을 두들기는 무인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무사들의 수준이 높았다!

이런 경우 기감만 믿고 움직이다간 오히려 역으로 당한다.

시야와 소리, 기감과 육감을 모두 활용해서 길을 뚫어야 한다!

주위를 훑던 천문석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5미터 높이의 담으로 막힌 5층 전각!

인간들이 갇혀 있는 감옥이 저기다.

목표까지 가는 경로 곳곳에는 무사와 일꾼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거리가 생각보다 멀고, 깔린 눈도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이제 아침이다.

숨어서 이동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어떡하지?’

고심하는 순간 길 너머 2층 전각 창가에 널려 있는 무복이 보였다.

은실로 호랑이 자수가 수놓아진 옷!

보통 금·은·동으로 신분을 나타내니,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중간 관리직의 무복이다!

‘와, 재수! 이거 뭐가 이렇게 운이 좋아! 카캬카-.’

천문석은 내심 웃음을 터트리며 단숨에 지붕을 미끄러져 처마를 잡고 몸을 날렸다.

휘잉-

줄줄이 늘어선 나무를 잇달아 밟고 뛰어, 2층 베란다에 널린 무복을 낚아챈다!

탁-

순간 벽을 밟고 단숨에 몸을 돌려 반전!

담장을 박차고 도약해 정원 수풀 속으로 뛰어내린다!

파스스슥-

잠시 후 수풀에서 나온 천문석은 은사로 호랑이가 수놓아진 무복을 입고 강철봉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천문석은 나른한 표정, 귀찮은 듯 질질 끄는 발걸음, 10년 차 만 년 과장 같은 모습으로 5층 전각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앞에서 걸어가는 무사 둘이 보였다!

호인족과 인간!

적당한 물감으로 그린 호랑이 무복!

혹시 상급자가 나타날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선과 조심스러운 발걸음!

눈치 보는 게 습관화된 모습!

‘이 녀석들 졸자다!’

견적이 서는 순간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고.

천문석은 버럭 소리쳤다.

“야, 거기 너희 둘!”

“네? 네!”

“……네!”

외침에 돌아봤다가 천문석의 은색 호랑이 무복을 보는 순간 단숨에 굳어 버리는 두 무사!

두 무사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대주님!”

“대주님!”

‘이게 대주 옷이구나!’

대주면 졸자들에게는 당주, 장로 같은 까마득한 상관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존재!

천문석은 천천히 팔자걸음으로 다가가 명령했다.

“인간들 가둬둔 전각으로 안내해라!”

“네?”

“네……?”

갑작스러운 명령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는 무사들.

천문석은 가볍게 손을 휙 뿌렸다.

파아앙-

강철봉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폭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쏟아졌다!

“아니, 이게 무슨!”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분통을 터트리던 두 무사는 경악했다!

파스스스슥-

강철봉에서 흘러나오는 파괴적인 기운!

“강기!?”

“강기!?”

유형화되기 직전의 강기!

눈앞의 인간 대주는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였다!

두 무사는 바로 허리를 숙였다.

“이,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엄청난 무위에 경악한 두 무사는 바로 앞장서서 안내했고, 천문석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당당히 들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이때 두 무사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대주 누구야? 너 아는 사람이야?”

“이번에 새로 들어온 대주인가 보지! 강기 못 봤냐? 얼른 길이나 안내하고 튀자.”

천문석은 내심 웃었다.

이종족의 도시라도 무공이 있는 세계는 똑같았다!

역시 무림은 고수의 세계!

그냥은 진실을 말해도 의심의 눈초리로 빈틈을 찾는데, 강기를 보여 주니까 스스로 알아서 빈틈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쉬워질 거다.

혼자도 아닌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움직이는 대주!

이 정도면 상황만 제대로 연출하면, 대놓고 동료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

이대로라면 1시간 안에 모든 걸 끝내고 빠져나갈 수 있다!

이 순간 연속된 행운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운이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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