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23화>
‘당했구나!’
당종이 모든 걸 깨닫는 순간 수로 18채 단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가짜 성주를 내세우는 게.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대로다!
류호에게 선수를 뺏겼다!
적염성 12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 여우 일족의 가주 류호!
류호는 적염 성주에게 ‘높은 바람’이라는 이름을 직접 받은.
수백 년을 살아 대요마의 경지에 달한 요괴선이다!
요괴선 류호의 힘이라면 천지를 잇는 빛의 기둥, 하늘 고래 수백 마리를 불러 모으는 것 모두 가능했다!
“류호! 이 음흉한 녀석이 가짜 성주를 세웠구나!”
당종이 외치는 순간.
이 자리에 모인 단체의 수장들은 경악했다.
“류호……?”
“설마! 류호가 가짜를 세웠다고!?”
“그럴 리가! 수백 년 동안 충성을 바쳤는데?”
“여우 일족이 적염성을 집어삼켰다고!?”
……
수장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당종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당했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뒤통수를 맞은 지금도 수장들은 류호가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했다.
자신마저 깜빡 속아 넘어갔으니!
당종이 울분과 허탈함에 부르르 떨 때.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탄, 류호, 태웅.”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 셋.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 이름이었다.
호랑이 일족의 가주, 탄.
여우 일족의 가주, 류호.
곰 일족의 가주, 태웅.
쇠락해 가는 12 가문 중 그나마 성쇠를 유지하는 세 가문이다.
모두가 의아해할 때.
남궁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성주님의 장원에는 세 가문만 있더군요.”
당종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남궁휘를 바라봤다.
“……!”
“…….”
남궁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지금 적염 성주의 장원에는 12 가문 중 세 가문의 가주만 모여 있다!
성큼 창으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자, 높게 솟은 탑이 자리한 언덕 위 장원이 보였다.
축제로 환하게 밝혀진 시가지와 달리.
드문드문 밝혀진 등과 화로로 어둑어둑한 성주의 장원이!
성주의 장원을 보는 순간 당종은 깨달았다.
호랑이, 여우, 곰.
12 가문 중 셋뿐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자신에겐 아직 기회가 있었다!
당종은 고개를 돌려 남궁세가의 가주를 바라봤다.
표정에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다른 수장들과 달리, 백발의 남궁휘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당종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주님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원대륙과 타대륙을 잇는 거대 상단, 적월 상단의 후계자 당종이 고개를 숙였다!
깜짝 놀란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순간.
남궁휘의 담담한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호랑이 일족의 장원에서 탄과 류호가 만날 거라고 하더군요.”
남궁휘는 탁자에 앉은 수장들을 쓱 돌아보더니 당종에게 시선을 뒀다.
“그렇게 되면 성주님의 장원에는 태웅과 몇 안 되는 무사들만 남아 있겠군요. 이렇게 말이죠.”
남궁휘는 탁자 위 접시에 담긴 전병을 집어 툭툭- 내려놨다.
전병 그릇을 중심으로 치우친 삼각형을 그리며 놓인 전병 세 개.
쿵, 쿵, 쿵-
남궁휘는 손을 내리쳐 전병 셋을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그릇에서 전병을 하나 집어 들고 그릇을 휙 밀었다.
쓰으으으윽-
단숨에 탁자 위를 미끄러져 당종 앞에 멈추는 그릇!
“원하는 대로 드시지요.”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당종은 환하게 웃으며 전병을 집어 들었다.
상황은 나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황이 좋아졌다.
애써 대역을 내세우고, 민국에서 주술사를 부를 필요가 없어졌다!
류호가 세운 가짜, 인간 아이가 적염성의 성주가 됐다!
‘고기를 먹어라, 구슬치기, 딱지치기 대회를 열어라.’ 명령하는 천지 분간 못하는 무력한 꼬맹이가 성주가 된 것이다!
자신은 이 꼬맹이 옆에 있는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치워 버리기만 하면 된다!
남궁 가주가 박살 낸 전병처럼!
류호, 탄, 태웅!
여우, 호랑이, 곰!
세 가문만 처리하면 적염 성주가 손에 들어온다!
당종과 남궁휘는 동시에 전병을 씹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
그리고 곧 탁자에 자리한 모두가 전병을 씹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적룡방주는 누구보다 크게 웃으며 청혈회주에게 목소리를 낮춰 슬쩍 물었다.
“그런데 지금 왜 웃는 거냐? 우리 망한 거 아니었어?”
“……넌 그냥 크게 웃기나 해라.”
하하하하하-
그리고 웃음이 그쳤을 때.
모두는 혈맹의 술을 나눠 마시고 둘로 나뉘었다.
호랑이 일족의 장원에서 탄과 류호를 상대할 이들과.
성주의 장원으로 움직여 태웅을 상대하고 새로운 성주를 잡을 이들로!
당종은 10년의 대계를 마무리 지을 역천의 계획을 준비하고 외쳤다.
“내일 아침! 류호와 탄이 만나는 순간 결행한다!”
팡팡, 파아앙-
이 순간 창밖 밤하늘에서 오색의 불꽃이 터졌다.
* * *
천문석과 적월 상단의 후계자 당종.
안면은커녕 스친 적조차 없는 두 사람의 계획이 겹치게 됐다.
호랑이 일족의 장원에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천문석의 다른 동료들도 각자의 생각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진교은.
하늘을 나는 고래가 조각된 커다란 침상 위, 특급 헌터는 팔다리를 뻗은 채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내려 오란 말야…… 빨리빨리!”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는지 연신 팔다리를 움직여 이불을 밀어내는 특급 헌터.
“…….”
진교은은 말없이 특급 헌터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높게 솟은 언덕 아래, 환하게 밝혀진 밤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이 밤의 도시는 하늘을 나는 고래를 타고 도착한 적염성이었다.
이 적염성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종족과 인간이 같이 살고 있었다.
꼬리가 난 수인족.
큰 뿔이 솟은 도깨비.
바윗덩어리로만 보이는 괴이.
……
처음 이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러나 가장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침상에 대자로 누워 쿨쿨 잠든, 특급 헌터.
기절했다가 깨어나니, 어느새 특급 헌터가 이 적염성의 성주가 되어 있었다!
주위의 모두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특급 헌터는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진교은은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 힘도 없는 인간 아이가 성주가 됐는데!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이종족이라니!
당장이라도 특급 헌터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슬쩍 고개를 돌린 방 곳곳에는 시녀들이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
카지노 딜러로 오래 일했던 진교은은 직감했다.
이들은 어지간한 각성 헌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진교은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창밖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
환하게 밝혀진 이 도시에는 자신과 함께 온 동료들이 있을 거다.
최설, 한호석 교수. 허준.
그리고 최설이 그렇게 자랑한 천문석 부사장도 이 도시를 향해 달려 오고 있겠지.
인내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특급 헌터, 이 아이를 지키는 게 자신이 할 일이다!
구으으으응-
이때 창밖에서 고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자, 높게 솟은 탑 주위를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가 보였다.
하늘 고래.
그리고 이 하늘 고래 주위에서 터지는 오색의 불꽃이 보였다.
팡팡, 파아앙-
진교은은 오색이 불꽃이 터지는 탑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동료들을 불렀다.
최설, 한호석, 허준, 천문석.
“……빨리 와.”
-최설, 한호석 교수.
“호랑이 일족의 장원에 일꾼으로 들어간다고?”
“네. 인간들을 데려갔다는 호랑이 일족 장원에서 무사와 일꾼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꾼으로 들어간 후에 기회를 봐서 잡혀 왔다는 인간들을 확인하겠습니다.”
한호석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뭘 준비하면 되겠나?”
“수레를 한 대 구할 수 있을까요?”
“수레라고?”
“네, 동료들을 찾으면 가능한 바로 빼내겠습니다. 동료들 상태를 모르니 만약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급한 거 아닐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움직이는 게…….”
최설은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커다란 웃음과 환호성.
술 취한 사람들의 노랫소리.
팡팡, 파아앙-
그리고 하늘에서 터지는 오색의 불꽃이 보였다.
한호석 교수는 최설이 하려는 말을 바로 알아챘다.
축제로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게다가 동료들이 있을 가능성이 큰 장소를 찾았다.
행운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곳은 던전 안 이세계 도시.
이런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가능한 한 빨리 동료들을 찾아서 탈출해야 한다!
“어떻게든 수레를 구해 보겠다.”
한호석 교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
허준은 이원에게 허리 숙여 부탁했다.
“장주님. 꼭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게. 여우 일족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 아냐. 내 아들이 협상 중이니. 내일 나랑 같이 여우 일족 가주를 만나세. 그때 사정을 이야기하면 자네 동료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장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원 대협!”
허준은 내심 환호성을 지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적염성의 유력자 여우 일족의 도움을 받으면,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을 찾는 건 시간문제다!
“제가 이원 대협을 만난 건 최고의 행운입니다!”
이원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렇게 고마워하나. 사해가 동도인데 돕는 게 당연하지. 혹시 아나? 자네가 나중에 나에게 큰 도움이 될지? 하하하-.”
“뭐든지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원 대협!”
허준의 열성적인 모습에 이원은 슬쩍 말을 던졌다.
“내가 천만 대산 갔던 이야기 했던가?”
“천만 대산!? 마교 말씀이신가요?”
“정확히 말하면 마교가 아니라. 마도 18문! 하-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탕-
이원이 탁자를 두들기며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
허준은 재빨리 잔에 술을 따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질문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원은 단숨에 술을 비우고 입을 열었다.
“마도 18문 중에 극음도라고 있네. 그 녀석들이 갑자기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무공이 강해지고, 세력이 엄청나게 커져서…….”
이원과 허준이 대화에 빠져들 때.
대 공자는 방 밖에서 여우 일족의 집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가주님은 내일 아침에 호랑이 일족의 장원에 잠시 방문하신 후 성주님 옆에 계속 계실 예정입니다.”
“그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없을까요?”
“…….”
여우 일족의 집사는 망설였다.
대 공자는 집사가 망설이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여우 일족의 가주가 호랑이 일족의 장원을 방문하는 건, 정략결혼의 대상 여우 일족의 후계자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객이 먼저 만남을 청하기에는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적염 성주가 나타난 이후, 여우 일족의 가주 류호는 외부인과 만나지 않았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대 공자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보고 말했다.
“……제안한 물품 거래량을 1할 늘리겠습니다.”
“1할이요?”
집사의 얼굴에 솔깃한 표정이 떠오르는 순간.
대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1년 동안 1할 늘리고. 가주님을 만난 후 이 거래량을 차차 늘려 가겠습니다.”
이가장의 상단은 원대륙과 타대륙을 오가는 원양 상단!
이 상단과 직접 거래하면 부족한 재정에 큰 도움이 된다!
집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호랑이 일족의 장원에서 호랑이 일족 가주와 만나기 전에 1각 정도라면…….”
시간이 짧으면 오히려 좋다.
변수 그 자체, 아버지가 뭘 해 보기도 전에 만남이 끝날 테니까!
“감사합니다!”
반색한 대 공자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성큼성큼 장원을 가로질러 문을 열며 외쳤다.
“아버지. 약속을 잡았습니다.”
“마침 잘 왔다!”
반색한 이원이 외쳤다.
“네?”
왠지 모를 불길함에 고개를 갸웃할 때 들려오는 황당한 이야기.
“손님께서 검기를 꼭 보고 싶다네! 너 검기 좀 펼쳐 봐라. 얼른!”
“영광입니다! 대 공자님!”
“…….”
이가장의 대 공자는 아버지와 손님을 봤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두 사람은 마치 10년은 사귄 친구처럼 죽이 착착 맞고 있었다.
대 공자는 검을 꺼내며 좋게 생각했다.
아버지, 이원이 뭐만 하면 이상할 정도로 온갖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허준이라는 이상한 손님과 죽이 맞아 장원에 있자, 어제오늘은 별다른 사고가 터지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검기쯤이야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었다!
대 공자는 움직이지 않는 내력을 동공으로 풀어내며 검을 펼쳤다.
잠시 후 이원과 허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너 실력이 더 늘었는데!?”
“이게 검기군요! 과연 무림 고수! 대단합니다!”
구으으으으응-
하늘 고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팡팡, 파아앙-
술에 취한 어린 하늘 고래가 오색의 불꽃을 흩날리는 밤.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천문석, 아카린.
당종, 남궁휘.
진교은, 특급 헌터.
최설, 한호석 교수.
허준, 이원, 대 공자.
……
이들 모두는 각자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교차하는 씨줄 날줄처럼 이들의 운명은 한 곳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의 인과는 인지로는 헤아릴 수 없는 법.
씨줄 날줄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때 한 청년이 숲에서 걸어 나와 적염성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천문석이 섰던 자리에 정확히 멈춰 섰다.
청년은 팡팡- 오색 불꽃이 터지는 적염성의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마침내 불운의 별! 개고생의 성좌가 떴구나!”
카캬카카카-
청년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손에서 튕긴 동전이 핑그르르 공중에서 회전했다.
용과 별이 새겨진 검은 동전이 달빛과 오색 불꽃 아래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