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19화>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허준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우 문양이 새겨진 천장, 단단한 나무로 만든 침상.
바닥은 넓은 판석이 깔려 있고, 창문에는 두꺼운 창호지가 발려 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이 방은 무협 드라마 속 세트장이랑 똑같았다!
순간 허준은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동안 수없이 봤던 무협 소설 프롤로그!
‘설마, 무협 소설 속 주인공으로 빙의한 건가!?’
하늘이 내 꿈, 검강의 길을 열어 줬다고!?
터질 듯 뛰는 가슴으로 방안을 살피니 탁자에 놓인 거울이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가 재빨리 거울을 살피니 예전 그대로인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털가죽 외투도 강화 전투복도 없다.
자신이 입은 옷은 활동하기 좋은 검은색 비단옷, 무복이다!
허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굴과 겉모습은 그대로인 채로 무협 소설 속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무협 소설 속에 들어왔구나! 무공을 익혀 검강에 도전할 수 있다!”
바라마지 않던 일!
허준은 재빨리 기억을 훑었다.
딱 보면 무림 세가 같은데, 어디지?
남궁, 제갈?
당문 이면 안 되는데!?
혹시 세가가 아니라 상가인가?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밀려들어와?
보통 이럴 때면 기억이 밀려들어오던데!?
한참을 고민하던 허준은 벼락 치듯 깨달았다!
꼭 해야 하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후, 하-
허준은 몇 번 심호흡하고 소설에 들어가면 반드시 말해야 하는 걸 외쳤다.
“상태창!”
덜컹-
순간 방문이 열리고 소반을 든 시녀가 나타났다!
“……!”
눈이 마주치는 순간 허준은 재빨리 소설 속 장면을 떠올렸다.
“물러가…….”
허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시녀의 외침.
“일어나셨네요!? 잠시만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
허준은 달려가는 시녀를 보는 순간 자신이 무협 소설 속에 들어온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시녀의 등 뒤에는 새하얀 꼬리가 살랑이고 있었다.
“……여긴 장르가 뭐야?”
그리고 잠시 후 허준은 자신을 이가장의 장주, 이원이라고 소개하는 남자와 만났다.
“그게 정말입니까!?”
눈을 부릅뜬 허준이 외치는 순간.
이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창, 종남! 모두 있네!”
허준은 격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럼 소림! 무당! 화산은? 설마 그 세 문파도 있습니까!?”
“당연하지! 소림, 무당, 화산은 내가 직접 방문해서 아주 높은 분들도 만났지!”
순간 허준의 눈빛에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과연 이원 대협! 장주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허-
이원은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생경한 감각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여량위의 흑룡 같은 사나운 눈빛!
아들의 어이없어하는 눈빛!
부하들의 곤란한 눈빛!
……
익숙한 눈빛의 아닌, 생경한 존경의 눈빛을 받는 순간.
이원은 자신이 진정 바라던 것을 깨달았다.
스승을 바라보는 듯한 저 존경!
자신은 ‘존경’을 원했던 거다!
자신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이 허준이라는 처자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원은 외쳤다.
“뭐든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게!”
허준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천하제일인은 누군가요? 역시 소림인가요? 아니면 무당, 설마 화산!?”
이원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하는 넓고 강자는 많으나, 정파에서 천하제일인을 꼽는다면 당연히 천하 18성을 생각해야 하네! 초절정의 경지에 닿은 진정한 강자들!”
“초절정! 설마 검강을 쓰는 그 초절정!?”
“당연한 이야기! 강기(剛氣)야말로 초절정의 상징!”
이원은 일대종사처럼 뒷짐을 지고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정파에만 인물이 있는 건 아니니. 사파의 하늘 사자련! 마도의 주맥 마도 18문! 이 모든 이들을 통틀어 천하제일을 논하면 난 셋을 꼽겠네!”
허준은 꿀꺽 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빙의가 아니란 걸 깨닫고 실망하기도 잠시.
정파, 사파에 마도까지 나왔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무협 소설 속 세상과 똑같았다!
이때 이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
“사파의 하늘 사자련의 련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 저녁 식사하세요!”
이때 문이 열리고 무복을 걸친 청년이 들어왔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지……?”
“아닙니다. 장주님!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원은 슬쩍 떠보듯이 말했다.
“그럼 식사하면서 더 이야기해 줄까? 사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어서 무림에는 또 빠삭하거든?”
“꼭 듣고 싶습니다! 장주님!”
“그럼 얼른 가자고!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해 줄 테니까! 하하하-.”
“넵! 알겠습니다! 크흐흐-.”
이원과 허준은 친 부녀지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나게 달려갔다.
“…….”
이가장의 대 공자는 안도감이 담긴 얼굴로 이 모습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어느새 무림 이야기에 완전히 완전히 정신이 팔렸다.
덕분에 적염성의 새로운 성주를 만나겠다는 계획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여우 일족의 병사들에게 들은 성주는 무시무시한 폭군이다.
곰 일족의 태웅 가주가 성주가 날린 딱밤을 맞아 머리가 깨졌다고 했다!
이유는 눈치 없게 성주님의 말씀에 토를 달아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순간 이게 남의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눈치 없기로는 아버지도 태웅 가주 못지않았으니까.
대 공자는 천천히 아버지 뒤를 따라가며, 결심했다.
어떻게든 성주와 아버지가 만나는 걸 막는다!
* * *
쿵쿵, 쿵쿵쿵-
아카린은 커다란 쇠 지게를 짊어진 채 여관 카운터로 걸었다.
“우와- 저 지게 뭐야!?”
“아니, 뭔 짐을 저렇게 올렸어!?”
“칭지드족이 배달 온 건가?”
“뭐!? 칭지드족이 산에서 내려왔다고!?”
……
지진이라도 난 듯 울려 퍼지는 진동에 1층뿐 아니라, 2층, 3층에 앉은 손님들의 시선까지 모여들었다.
이때 하누만 한 명이 카운터 위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아카린은 카운터의 하누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날아오는 열쇠!
“바닥 내려앉아! 얼른 나가!”
아카린은 잽싸게 열쇠를 낚아채 바로 카운터 옆문을 열었다.
“여기가 후원이야! 얼른 들어와.”
천문석은 아카린을 따라 후원으로 들어갔다.
순간 가죽 재킷에서 쏙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피는 어린 하늘 고래.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하늘 고래는 재킷에서 나와 퐁퐁퐁- 후원을 날기 시작했다.
천문석의 시선이 하늘 고래를 따라 후원을 훑을 때.
아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후원에서 술 만들면 돼. 어때 괜찮냐?”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판석이 깔린 직사각형의 넓은 공간.
뒤는 여관 건물이 좌우는 건물 벽으로 막혀 있고, 정면을 가린 창살 너머로 작은 배가 지나가는 수로가 보였다.
“저 수로 강이랑 연결된 거냐?”
“맞아. 이번 일 끝나고 열사의 사막으로 이동할 때, 저 수로 타고 강으로 내려가서 바로 이동하면 된다.”
아카린은 쇠 지게를 내려놓으며 왼쪽 벽을 가리켰다.
“그보다 이 양조 설비 봐라. 안 쓴지 좀 됐는데 어때? 아직 쓸만하지?”
천문석은 성큼 다가가 양조 설비를 살폈다.
3층 높이 벽에 만든 지붕 아래.
화로와 커다란 솥, 옹기와 술통이 줄줄이 놓여 있고, 약간 떨어진 장소에 지붕이 씌워진 우물까지 있었다.
생각보다 설비와 장소가 좋았다.
특히 저 수로와 바로 연결되는 창살 문!
동료들을 찾은 후 바로 배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여관과 붙어 있으니 따로 숙식을 해결할 장소를 찾을 필요 없이 이곳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좋은데? 여기 빌리는데 돈 좀 들었을 거 같은데. 너 괜찮냐?”
아키린은 씨익 웃으며 여관 문을 가리켰다.
“아까 본 하누만 나한테 빚진 거 있어. 그냥 쓰면 된다. 그보다 이제 시작할까?”
생경한 요마괴이의 도시에 떨어진 상황, 생각과 달리 도시의 존재들에게서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일은 골든타임이 있는 법!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최대한 빨리 동료들을 찾아 빠져나가는 게 좋았다.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시작하자. 난 뱀독 뽑아내 정제할게. 넌 아까 말한 대로 도시 한 바퀴 돌아라. 뭐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지?”
아카린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늘 고래에 실려 온 사람들 확인. 뱀술을 만들 맑은 술 구하기. 거리에 도는 소문 수집 맞지?”
이미 몇 번이나 이야기 한 사항.
“맞아. 수고해라.”
“그럼 바로 움직일게. 한 2시간이면 돌아올 것 같네.”
아카린은 수로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재료 준비는 얼마나 걸릴 것 같냐?”
탁-
천문석은 독사가 가득 담긴 대나무 바구니를 두들겼다.
“독액 빼내는 게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독액을 내력으로 가공해서 밑 재료 만드는 건 오래 안 걸려. 너 올 때쯤이면 시제품 완성될 거야.”
“그 재료로 뱀술 얼마나 만들 수 있을까?”
아카린이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는 순간, 천문석은 잠시 머릿속으로 견적으로 뽑았다.
“독사를 생각보다 많이 모아서. 술 종류에 따라 수율이 다른데. 아마 이 술통 정도는 만들 수 있을걸.”
탕-
천문석은 쇠 지게에 실린 술통을 두들겼다.
사람이 몇 명이나 들어갈 커다란 술통을!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아카린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정도 양을 오늘 밤에 만들 수 있다는 거지?”
“맞아.”
천문석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아카린은 다시 한 번 전율했다.
천마 뱀술, 칠전팔기!
그 효능이 말한 것의 반만 돼도 도시가 발칵 뒤집힐 거다!
그런 뱀술을 이 거대한 술통에 하나 가득 만들 수 있었다!
눈앞에 거대한 양조장 주인이 된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얼른 다녀올게!”
아카린은 한달음에 후원을 달려 휙- 철창문을 넘어 수로 위 배를 향해 뛰었다.
“앗! 당신 뭐야!?”
“어엇! 지금 뭐 하는 거야!?”
……
깜짝 놀란 사공들의 외침이 잇달아 터져 나올 때.
수로 위 배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뛴 아카린이 크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아카린의 표정만 봐도 그 생각이 짐작됐다.
이 뱀술로 대박을 터트릴 꿈에 부풀어 있을 거다.
“하- 부럽다.”
천문석은 대나무 바구니 뚜껑을 열며 탄식했다.
자신도 아카린처럼 대박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가 있었다.
전생을 기억했으나, 무공에 입문하지 못했을 때.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천마 뱀술, 칠전팔기’였다.
칠전팔기만 만들면 초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데!
당장에 건물주! 아니, 성채 빌딩 주인이 될 수 있을 텐데!
독액을 정제할 한 줌의 내공이 무슨 방법을 써도 모이지 않았다!
그때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내공을 찾으면 칠전팔기를 만들어 초대박을 터트리겠다고!
그러나…….
슉, 슈욱, 슉-
이때 바구니 속 독사 몇 마리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튕겨 올랐다!
화살이 쏘아진 듯한 움직임!
팡-
천문석은 가볍게 박수를 쳐 섬광을 터트렸다.
빛과 소리, 진동에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독사들!
딱, 딱, 따악-
천문석은 번개같이 독사 머리에 딱밤을 날리고 한 마리의 머리를 잡아 꾹 눌렀다.
독액이 주르륵- 작은 항아리에 떨어질 때 철수형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공을 찾은 후 첫 번째 임무, 이세계 배송 의뢰 때였다.
트럭을 운전하다가 문득 떠오른 천마 뱀술의 기억에 자신은 말했었다.
‘철수형! 진짜 끝내주는 사업 아이템이 있습니다! 이번 의뢰만 끝나면 우리 이거 한번 해 보죠!’
‘끝내주는 사업 아이템이라고!?’
철수형은 솔깃한 표정으로 물었고, 자신은 천마 뱀술, 칠전팔기에 관해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철수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뱀독으로 만든 술 판매가 되려나……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문석아…….’
그리고 이 사업 아이템의 핵심을 관통하는, 자신의 미래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질문을 던졌다!
“…….”
하아-
천문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항주 유흥가를 넘어 도시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기적의 명주.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천마 뱀술, 칠전팔기!
전생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마인 놈들을 때려 주다가 자신의 정체만 밝혀지지 않았어도 ‘건물주 + 땅 부자 + 객잔 주인’의 꿈을 이뤘다!
전생 천마가 못 이룬 꿈을 현생 알바로써 이루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자신이 만든 천마 뱀술, 칠전팔기가 먹히지 않는다.
이 사실을 철수형의 질문을 듣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깨달았다.
머리에 화인처럼 남겨진 철수형의 질문.
‘……문석아. 그 칠전팔기라는 뱀술. 비아그라보다 효과가 좋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