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06화>
모두가 떠나간 봉우리 정상.
고개를 숙인 허공도의 제사장만 홀로 남아 있었다.
쿵-
문득 고개를 들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지옥의 겁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사장은 홀린 듯이 빛의 벽으로 다가가 빛의 벽, 경계 너머의 세계를 바라봤다.
물끄러미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제사장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새겨진 단어.
일기일원공!
지금 자신의 앞에 일기일원공을 익힌 사람이 나타났다.
일기일원공은 배우고 익힌다고 하여 입문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먼저 입문하여 경지에 오른 이가 시동을 걸어 줘야만 입문할 수 있는 무공이다.
자신이 아는 일기일원공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셋.
거상을 꿈꾸는 뺀질이 막내 사제, 데이몽 발도.
하루 20시간 농지 개간에 매진하는 곰 같은 둘째 사제, 무사인 카이류.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요마괴이를 털어먹는 사기 도박꾼이자 주정뱅이, 대사형.
일기일원문의 사고뭉치 세 사형제뿐이다.
방금 나타나 겁화에 구멍을 뚫은 사람은 이 셋과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보는 순간 직감했다.
바로 이 사람이다!
모든 것이 비밀에 가려진 일기일원문의 개파조사(開派祖師)!
제사장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불운!
자신이 끄려는 순간 한 타이밍 빠르게 겁화로 뛰어들어 전신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겪었다.
대오각성해서 피안으로 날아가는 걸 악을 쓰며 막으며, 간신히 통로를 열었는데 동료들은 엉뚱한 행동을 했다.
게다가 여기에 화룡점정 하는 게 있었다.
제사장은 빛의 벽, 경계 너머의 세계를 살폈다.
너무나 낯익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
자신이 일기일원문이 있는 산속 사당을 관리하던 때다.
자신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사건이 발생하는 시공이다.
호랑이 일족과 여우 일족의 결혼식.
사상 초유의 난장판이 벌어지는 그곳이다!
경계를 넘어간 곳이 하필 이곳이라니!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말려드는 이 엄청난 불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입문하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운이 없어지는 일기일원공.
자신의 불운을 담아 일기공과 일원공을 창안했다는 일기일원문의 조사가 확실했다!
하아-
순간 제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원했다.
“부디 무사히 일기일원문을 세우시길…….”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번쩍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호랑이 일족과 여우 일족의 결혼식!
이 난장판에는 사고뭉치 세 사형제가 모두 얽힌다.
당연히 경계를 넘나드는 사기 도박꾼, 대사형도 나타난다!
순간 허공도의 제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경계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만지듯 경계를 통과하는 손.
삼생의 인과를 이어 자라나는 세계의 나무.
세계의 나무가 자라난 모든 세계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허공도.
허공도의 계단을 걸어 인과를 이으면, 세계의 나무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명 허공도의 제사장만은 이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
허공도의 제사장은 망부석처럼 서서 한참이나 경계 너머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그의 모습이 비치기를 기원하며…….
* * *
제사장이 경계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을 때.
밑동만 남은 선조의 나무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수십 겹의 가면을 쓰고, 깊은 후드가 달린 망토를 겹겹이 입은 사람.
“저기요……?”
선조의 나무 주위를 살피고, 하얀 천이 나부끼는 집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외쳤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안에 아무도 없어요?”
……
몇 번이나 불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상관의 말한 대로 제사장이 자리를 비웠다!’
확신하는 순간 재빨리 달려 선조의 나무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로브 자락으로 바닥을 쓸어 냈다.
쓱쓱, 쓱쓱쓱-
흙과 먼지가 날아가자 드러나는 사각의 금속판!
후우, 후우우우-
입으로 바람을 불어 내자 노란빛이 확 올라왔다.
‘진짜 여기에 있었잖아!?’
재빨리 정과 망치를 꺼내 명판 주위 암석에 구멍을 뚫고 냉기 마법을 쏟아부었다.
콰지지직-
단단한 암석이 단숨에 깨져나가고 묵직한 명판이 바닥에서 떨어져 나왔다.
통짜 황금으로 만들어 낸 명판!
금값만 해도 엄청나지만, 이 명판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명판에 새겨진 짧은 문장.
[칭지드 사람들은 제국 황제의 친우다.]
이 문장을 새긴 사람은 타대륙을 제패한 마도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 마도 황제다!
이 명판은 마도 황제가 칭지드족에게 직접 내려 준 황금 명판이다!
이 황금 명판이 있는 한 타 대륙의 그 어떤 세력도 이곳 칭지드 봉우리, 허공도가 실체를 가지고 내려앉은 산맥을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황금 명판’에는 한가지 비밀이 더 있었다.
칭지드 봉우리의 제사장과 마도 황제. 그리고 극히 일부만 아는 비밀.
마도 황제, 위대한 마도의 신은 이 황금 명판을 가져오면 ‘친구’로서 그 무엇이든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친구로서, 무엇이든, 들어 준다!
마도 황제가!
이 황금 명판은 전설의 소원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엄청난 황금 명판을 지금 자신은 훔치고 있다!
직속 상관의 명령으로!
순간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직속 상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야, 이거 진짜로 오류 수정이야! 어! 내가! 전에 제사장한테 물을 먹어서 시키는 게 절대! 절대로 아냐!’
몇 번이고 강조하던 그 모습.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 슬쩍한 황금 명판을 받을 사람은, 뜬금없게도 오래 사는 엘프 장로이다.
게다가 황금 명판을 건네주면서 전하라는 말!
직속 상관의 그 뜬금없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히 기억났다.
///
분위기!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잡는 게 아주 중요해!
분위기를 제대로 잡으면서 이렇게 말하란 말야.
‘칭지드 사람들에게 지금 황금 명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지. 이게 아니라 필요 없다가 낫겠네. 황금 명판이 지금은 필요 없다고 말해라.
그리고 명판을 건네주면서 이 말을 해 줘라.
‘먼 훗날 칭지드의 제사장의 도움이 필요하면, 이 황금 명판을 가져가라. 그럼 칭지드의 제사장이 도움을 줄 것이다!’
자신은 즉각 반론을 펼쳤다.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줬다고 도움을 준다고요?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라고 쥐어 터질 것 같은데요?’
그리고 자신은 직속 상관의 맹호출격에 쥐어 터졌다.
///
하아-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
“시바- 괜히 세계의 비의는 깨닫는다고 지랄을 해서는…….”
시간 오류 수정자는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는 후회를 하며 황금 명판을 품에 안고 날듯이 도망쳤다.
언제 제사장이 돌아올지 모른다!
평소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띠고 다니는 칭지드의 제사장.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 삼생을 관하는 허공도의 제사장이다!
자신이 황금 명판을 슬쩍한 게 걸리는 순간.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가해진 유일한 제약, 허공도에 묶인 몸이 풀린다.
시공을 넘나드는 시간 오류 수정자라 해도, 모든 시공에 존재하는 허공도의 제사장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다.
반드시 잡힌다!
그리고 작살이 나겠지!
제사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최대한 빨리! 그리고 멀리 도망쳐야 했다!
“헉, 허억, 헉- 다음 임무 전에 반드시 파트너부터 구한다!”
이미 파트너 후보까지 뽑아놨다.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아 제국 기사들을 구출하는 강습 수송병!
초대형 뱁새!
신입 시간 오류 수정자는 계단을 달리며 다짐하고 다짐했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짐작한 대로, 일기일원문 조사의 불운이 주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제사장이 예상치 못한 것은 그 불운이 자신에게까지 옮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소중한 황금 명판을 도둑맞았다.
그러나 하늘의 인과는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법.
천문석이 일으킨 작은 인과의 매듭은 길고 긴 궤적을 그려 결국 다시 돌아온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그리워하던 너무나 반가운 사람과 함께.
* * *
“하늘 고래가 여기 왜 있어!? .”
천문석이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늘 고래는 당연히 허공도에 있지?”
‘지게꾼!’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육중한 굉음과 함께 지게꾼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쿵, 쿵-
“야, 여기 어디……!?”
천문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에 둘둘 감은 천을 벗겨 내는 지게꾼.
천 아래 숨겨졌던 지게꾼의 얼굴이 드러났다.
화염이 이글거리는 금빛 눈.
비웃듯 끝이 말려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얼굴 전체에 빽빽한 붉은 털.
체형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특징은 완전히 같다!
“너, 너. 너!?”
천문석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지게꾼은 툭툭 몸에 묻은 잿가루를 털며 대답했다.
“뭐야, 너 하누만 처음 봐? 아니지. 아까 멍청한 하누만들 달리는 거 봤잖아? 하여튼 방금은 고맙다. 난 아카린이다.”
“어, 난 이세기…….”
“이세기?”
반사적으로 구라를 치고 아차 하는 순간.
꺄아아아아-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진교은의 목소리!
구름다리 옆 숲이 있는 방향!
사라진 동료들이 숲으로 이동했구나!
쿵-
천문석은 땅을 밟는 순간 내력을 폭발시켜 달렸다.
단숨에 암반 위를 달려 숲에 가까워지자.
휘이이, 휘이이-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독수리들이 숲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콰지지직-
날개를 접고 수직으로 내리꽂혀.
파아아앙-
날개를 활짝 펼치며 활강, 발톱으로 낚아챈다!
이 새들의 목표는 나무를 방벽 삼아 버티고 있는 동료들!
‘굉천수를 터트려 모조리 떨어뜨린다!’
천문석은 숲 속 동료들에게 외쳤다.
“모두 준비해라! 섬광 터트린다!”
“왔구나!”
반가움이 담김 외침이 터지고 등을 맞대고 버티기에 들어가는 동료들!
천문석은 전력으로 달리며 굉천수를 터트릴 타이밍을 잡았다.
휘이이이잉-
이때 독수리 한 마리가 활강하며 배낭을 낚아챘다!
청주가 붙어 있는 자신의 배낭.
다행히 배낭에는 밧줄이 걸려 있다!
안심하고 달리려 할 때.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안 돼!”
“……?”
문득 고개를 돌리자 보였다!
밧줄을 따라 줄줄이 이어지는 배낭, 배낭, 배낭…….
그리고 밧줄에 단단히 고정된 사람들.
한호석 교수!
진교은과 특급 헌터!
“……!”
팟, 파아앗-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밧줄!
밧줄 끝은 나무에 묶여 있었다!
그렇지!
나무에 묶어 놓은 게 당연했다!
우선 굉천수부터 터트린다!
타다다닥-
두 손을 높이 들고 단숨에 숲 중앙으로 달리는 순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수리 한 마리가 밧줄에 묶인 배낭을 낚아채고!
활강하는 독수리의 날개에 팽팽히 당겨진 밧줄이 걸렸다!
파아아앙-
헌터용 강화 로프가 단숨에 잘려 나가고.
팽팽하게 당겨진 로프가 한껏 당긴 시위처럼 쏘아졌다!
밧줄에 걸려 날아오르지 못하던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밧줄에 걸린 배낭, 한호석 교수, 진교은, 특급 헌터까지 모두 데리고!
내력을 터트리며 전력으로 달렸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이때 허준과 최설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으아악-
표상 오러를 폭발시키며 가속하는 허준!
하앗-
그 뒤에 바짝 붙어 날렵하게 달리는 최설!
“잡았다!”
허준이 몸을 던져 잘려 나간 밧줄을 잡고!
최설이 뛰어올라 허준의 바짓단을 잡고 몸을 기어 올랐다!
어느새 모두는 지상 20여 미터 높이까지 끌려 올라간 상황!
각성자는 버텨도 일반인에겐 위험한 높이다!
천문석은 지상에서 떨어질 동료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외쳤다!
“나 밑에서 대기 중이다! 바로 밧줄 잘라! 배낭은 우선 포기해라!”
“알았다! 바로 자를게!”
최설은 대답과 함께 진교은, 한호석 교수를 지나쳐 바로 검을 날렸다!
뚝-
배낭과 연결된 밧줄이 끊기고 모두가 떨어지는 순간.
구으으으으으으으-
거대한 뿔피리 소리를 닮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형체가 떨어지는 모두를 받았다!
하늘 고래!
몸길이 이십여 미터의 작은 하늘고래!
하늘 고래는 가슴지느러미를 펼치고 빙글빙글빙글- 회전했다.
사방에서 몰려들던 거대 독수리들이 가슴지느러미 연타를 맞고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역시 인간의 친구 고래!
“고맙다! 이제 내 친구들 내려…….”
으악-
어어엇-
꺄아아-
이 순간 터져 나오는 비명들!
게다가 이 비명들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어, 어어!? 야, 너 어디 가는 거야!?”
천문석이 내력을 실어 외치는 순간.
구으으으으으-
하늘 고래는 엄청난 속도로 하늘 높이 솟아 올라 멀어져 갔다!
“…….”
거대한 달 아래 별의 강이 흐르는 밤하늘을 헤엄치는 하늘 고래.
한참을 멍하니 이 모습을 보던 천문석은 문득 눈을 비비며 말했다.
“……뭐지, 지금 이건 꿈인가?”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늘을 유유히 날아 멀어지는 경이로운 생명체 하늘고래!
특급 헌터, 진교은, 한호석 교수, 허준, 최설.
하늘 고래가 동료들을 싣고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