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603화 (604/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03화>

한 여인이 자욱한 안개 속을 소리도 없이 걷다가 멈춰 섰다.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안개 속에서 보이는 익숙한 붉은빛.

색색이 실을 꼬아 만든 옷을 입고 갈라진 나무 지팡이를 든 여인은 붉은빛을 향해 나아갔다.

곧 붉은 초롱이 걸린 굳게 잠긴 솟을대문이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솟을대문을 통과하니 손님을 맞이하는 붉은 초롱이 줄줄이 늘어선 깨끗이 청소된 마당이 나왔다.

그리고 이 마당 너머 사당이 보였다.

붉은 소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검은 기와, 값비싼 장식 기와로 올린 지붕.

흑단을 깔아 만든 마루와 문짝, 티 하나 없이 새하얀 창호지.

벽에 걸린 족자와 늘어선 병풍 하나까지 돈을 바른 티가 확연히 났다.

얼핏 봐도 대단한 부촌에나 있을법한 사당이다.

이 사당의 대청마루, 초혼향의 푸르스름한 연기가 흩날리고 커다란 초가 곳곳에 놓여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진귀한 요리와 술이 가득 놓인 상이 차려져 있고, 그 상 앞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화려한 비단옷과 귀한 장신구로 한껏 치장하고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신부가 아니었고, 이 상 또한 잔치상이 아니었다.

소녀는 요마괴이에 바치는 인신 공양의 제물!

이 상은 풍작을 바라고 요마괴이에게 바치는 제사상이다!

이 사당은 율령으로 엄금한 요마괴이에게 인신 공양의 제사를 지내는 피비린내 나는 사당이었다!

이때 소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마당을 바라봤다.

“…….”

“…….”

마당에 선 여인과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된 소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소녀는 마치 여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하아-

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장면’이 멈췄다.

마당에 선 여인은 멈춰버린 ‘장면’ 속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천하를 유리걸식하길 십 년, 우연히 흘러들어온 부유한 마을의 촌장에게 너무나 운이 좋게 하인으로 거둬진 소녀.

선뜻 곁을 내준 마을 사람들과 인자한 촌장에 기뻐했으나.

1년 후 소녀는 진실을 알게 된다.

요마괴이에게 바치는 인신 공양의 제물.

그게 소녀, 어린 자신을 마을 사람들이 거둔 진짜 이유였다.

눈앞의 소녀는 까마득한 오래전의 자신이었다.

“…….”

여인은 문득 고개를 들어 화려하고 부유한 사당을 바라봤다.

천하를 떠돌던 어린 시절, 세상에는 악의가 가득했고 삶은 너무나 힘겨웠다.

그 고난이 마침내 끝나고 부유한 마을,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마을의 부는 요마괴이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쳐 이룬 것이었다.

기나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믿었던 이게 속아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된 이 날의 절망, 고통, 슬픔, 분노가 생생히 기억난다.

짧은 삶에서 가장 큰 절망을 겪은 날.

그리고 또한 가장 큰 환희를 느꼈던 날이다.

이날 자신은 ‘그’를 만났으니까.

빙그레 미소 짓는 순간.

나무 지팡이가 움직이고 멈춰 버린 ‘장면’이 다시 이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젠장!”

멍청한 스스로에게 분통을 터트리고, 요마괴이에게 바치는 커다란 제사장을 두 손을 움켜잡는 소녀!

으아악-

그리고 괴성과 함께 상을 뒤집으려 할 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앗! 아깝게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란 소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여인은 저절로 멈춰 버린 사당 안을 돌아봤다.

분명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으나 보이는 것은 소녀뿐.

사당 안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다시 돌려 봐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볼 수 있는 ‘장면’의 한계였다.

길고 긴 세월이 지났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

자신은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단 하나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을 해도 이 ‘장면’ 뒤를 확인할 수도, 다급한 외침을 터트린 ‘그’를 볼 수도 없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원인과 결과, 인과.

인과를 이어 자라나는 세계의 나무에서 이 일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사당에 있을 수 있던 이유, 결정적인 인과의 고리가 끊겨 있다.

그리고 그 끊긴 고리가 무엇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천원(天元)!

하늘의 정점, 천원좌(天元座)에 올라 경계를 걷게 될 천원검을 탄생시킬 문파.

일기일원문(一氣一元門).

일기일원문이 바로 인과의 끊긴 고리였다!

그 누구도 그 시작을 모르는 일기일원문이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일기일원문의 대사형인 ‘그’가 천원검이 되는 미래는 확정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신과 ‘그’가 만났던 과거 또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길고 긴 꿈을 꾼다 하여도 장면에서 ‘그’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앗! 아깝게 무슨 짓이야!’

이 짧은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것뿐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들어 그 작은 숨결과 떨림 하나까지 기억하지만, 여전히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려 오는 목소리를.

여인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

하늘 높이 빛나는 별에서 천기가 손에 잡힐 듯이 읽힐 때.

문득 고개를 돌려 사당 주위를 둘러싼 안개 너머를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진 계단산과 봉우리, 그 아래에서 파도치는 안개.

파도치는 안개는 갈망을 현실로 바꾸는 힘, 하늘 고래의 염(念)이고.

산과 봉우리에 끝없이 펼쳐진 계단은 인과를 이어 인연이 닿은 이를 모아들이는 길(道)이다.

하늘에선 천기가 빛나고, 땅에서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과 안개가 파도치는 장소.

이곳은 세계의 나무가 뻗어 있는 모든 시공과 연결된 허공도(虛空島).

그 허공도에 자신의 꿈을 투영해 만들어 낸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다.

이 그림자 세계를 만들어 낸 이유는 간단했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되며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었기 때문이다.

잃은 것은 허공도를 떠날 자유, 얻은 것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마침내 천원좌에 올라 경계 걷게 될 ‘그’를 언제가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는 약속!

하지만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고.

약속하신 분께선 언제나처럼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지신 상황.

그렇기에 아득한 그리움으로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를 만들고 자신은 기원했다.

화려한 사당에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되어 앉아 있던 암울 했던 순간 나타난 술주정뱅이.

얼굴과 이름은 변했으나,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그’를 다시금 만나기를 기원하고 기원했다.

그리고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날들이 시작되길 바랬다.

술에 취한 채 나타나 인신 공양의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고.

그 소녀를 층층이 계단 논이 자리한 산속 작은 사당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온갖 사건·사고를 마주하는, 황당하고 어이없으나 가슴 두근거리는 너무나 즐거운 날들이 펼쳐진다.

어느 날 ‘그’는 둘째 사제를 찾아야겠다고 타대륙으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지만, 그것도 걱정할 것은 없었다.

생자필멸은 신조차 피하지 못하는 운명!

그러나 오래전 ‘그’가 전했던 말대로, 삶은 유한하나 그 본질은 무한히 이어지니.

언젠가 자신은 계단산을 오르는 ‘그’를 다시 만난다.

‘그’는 자신과의 기억을 모두 잊었겠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천 년, 만 년이 지난다고 하여도 자신은 하나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할 테니까.

가장 암울했던 순간에 선뜻 내민, 그 거칠지만 따뜻했던 맑은 술 향기가 담긴 손을.

그렇기에 허공도의 제사장인 자신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허공도의 그림자.

인과를 잇는 꿈의 세계를 만들고.

인연의 매듭을 지어 조금이라도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허공도의 제사장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따뜻한 시선으로 멈춰 버린 꿈속 세계를 돌아봤다.

이 순간 하늘이 울었다.

* * *

쿠릉, 쿠르르릉-

하아-

허공도의 제사장은 울부짖는 하늘을 보며 한숨지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던 소란이 한계를 넘어섰다!

이곳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는 자신의 꿈을 기반으로 대주술을 펼쳐 만든 허공도의 거울 세계였다.

허공도의 제사장인 자신은 허공도를 떠날 수 없기에.

인과를 잇고 인연이라는 매듭을 지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보기 위해서 펼친 대주술!

그런데 대주술로 만든 이 그림자 세계에 너무나도 많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잔뜩 긴장한 채 계단을 오르며 환경과 경계를 조사하던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

-술에 완전히 취해 자신도 모르게 넘어오는 진짜 술주정뱅이들!

-그림자로 슬쩍 넘어와 우연히 흘러들어온 인간들을 낚아채 술과 바꾸러 신나서 달려가는 하누만의 그림자들!

-자신도 모르게 경계를 지나 이 세계로 넘어온 허공도의 동물들!

-멀쩡한 길을 놔두고 자신의 꿈속 세계를 지름길로 사용하는 붉은 털의 하누만까지!

조용히 지나간다면 지금까지처럼 얼마든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불청객은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애써 무시하던 진동과 굉음이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하늘이 무너질 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쿠릉, 쿠르르릉-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애써 이은 인과가 뒤틀리고, 인연의 매듭이 풀렸다!

게다가 간신히 잠든 꿈, 대주술이 깨질 정도로 소란이 커지고 있다!

허공도의 제사장은 직감했다.

자신이 대주술을 펼쳐 만들어 낸 그림자 세계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킬 녀석은 한 놈밖에 없었다.

붉은 털의 하누만!

영혼육백을 태워 세계의 나무를 키워내신, 허공도의 주인 상(上)!

오래전 열렸던 잔칫날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다가, 상(上)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소중한 ‘탈 것’을 망가트린 그놈이다!

극대노하신 상(上)께서 뽑아 던진 경계석에 얻어맞아 기억을 잃고 내린 이름조차 거두어 진.

붉은 털의 하누만, 아카린!

아카린 그 녀석이 그림자 세계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현실과 그림자 세계를 가로지르는 경계이자 거울, 하늘이 깨질 듯 요동치게 만든 범인이 분명했다!

지름길로 사용하는 걸 모른 척해 줬더니 선을 넘고 있다!

이제는 나설 때였다.

허공도의 제사장으로 금도를 넘은 이를 벌해야 한다!

마음을 세우는 순간.

무른 감정과 기억은 단숨에 날아가고, 잘 벼려진 칼날 같은 기세가 솟아난다!

율령과 규칙의 집행자가 되어, 상께서 그은 금을 넘나드는 이를 벌한다!

하늘을 바라보며 갈라진 나뭇가지 지팡이를 휘젓는 순간.

번쩍 시야가 반전된다!

밑동만 남은 선조의 나무 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꿈꾸던 제사장의 고개가 들렸다!

빙글빙글-

종이 가면에 새겨진 소용돌이 문양이 회전하는 순간.

콰드드드득-

천지가 비틀려 빨려 들어오는 거대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이 순간 허공도의 제사장은 걸었다.

쿵-

한걸음에 종이 모자가 날아와 씌워지고!

쿵, 쿵-

두 걸음에 치렁한 장포가 몸을 휘감는다!

쿵, 쿵쿵-

세 걸음에 지팡이를 휘두르자 섬광이 모이고 우렛소리가 터졌다!

쿠르르르릉-

우렛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순간.

제사장은 달렸다.

선조의 나무 옆, 하늘 끝까지 뻗은 기둥 위를!

단숨에 기둥 위를 달려, 하늘의 경계에 닿는 순간.

와득-

섬광이 머문 지팡이를 휘둘러 경계를 뚫고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로 도약한다!

콰아아아앙-

온 천지를 밝히는 천둥벼락이 쏟아지는 순간.

허공도의 제사장은 반전된 하늘에서 떨어지며 외쳤다.

“아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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