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02화>
“너 정체가 뭐냐?”
질문과 동시에.
대답하듯 들려오는 잠꼬대.
“……나는 특특특특특…….”
천문석은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특특특특특급 헌터!’
계속 앞에 추가되는 특(特)이란 글자.
특급 헌터는 이름 그대로 ‘특(特)’에 어울리는 아이였다.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실소를 삼키며, 천문석은 천천히 뒤로 걸어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충분히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을 달렸다!
이상 던전의 출구가 있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다!
바로 빠져나간다!
* * *
천문석이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겹겹이 엎드린 거대 원숭이, 하누만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죽은 척 엎드려 있었다.
술 냄새에 정신이 팔려 쫓아왔다가 만나게 된 상상을 초월하는 강적!
강적의 손에 잡혀 강제로 그림자에서 본체가 끌려 나왔다!
게다가 번개같이 휘둘러진 기이한 나뭇가지 검!
처음에는 강제로 본체가 끌려 나와 정신없이 두들겨 맞느라, 다음에는 퐁퐁퐁- 경쾌한 소리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하는 순간 귓가에 들려온 휘파람 소리!
휘이, 휘휘휘-
휘파람 소리에 담긴 노랫소리의 정체를 하누만들은 바로 알아챘다!
오래국 적염성의 성주!
태양을 떨어뜨려 만 년 빙하를 녹이고, 거대한 강을 만들어 도시를 세운 그가 부르던 휘파람 노래다!
오래전 사라진 적염 성주의 후계자가 나타났다!
자신들은 적염 성주의 후계자에게 당해 본체가 강제로 이곳 허공도의 그림자로 끌려 나온 것이다.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로 그림자만 넘어오는 것과 본체가 넘어오는 것은 천지 차이!
세계의 경계를 넘어 모든 세계의 꿈과 꿈을 잇는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
이 그림자 세계는 ‘그’가 꾸는 꿈이자, 인과를 이어 인연의 매듭을 만드는 대주술이다!
‘그’의 꿈속 세계로 본체로 넘어와 사고를 쳤다.
자신의 대주술을 망친 존재들을 ‘그’는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누만들은 공포 어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에 뜬 거대한 달과 별의 강!
그 너머 거울 반대쪽의 세계에서 꿈꾸는 ‘그’!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허공도의 제사장!
분노한 허공도의 제사장까지 곧 깨어난다!
당장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어디로!?
그림자로 경계를 넘나들던 하누만들은 본체가 넘을 수 있는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본체로 경계를 찾겠다고 그림자 세계를 헤집고 다니다가 제사장에게 걸리면 더 큰 분노를 맞닥뜨린다!
‘욕심부리지 말고! 인간 놈을 낚아챈 동료들과 같이 돌아가는 건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수백의 하누만들은 납작 엎드려 덜덜 떨며, 제사장의 분노가 제발 비껴가기만 기다렸다.
이때 거센 열풍이 불어왔다!
파아아아앙-
열풍에 단숨에 안개가 날아가는 순간 터져 나온 어이없어하는 목소리!
“뭐 그림자가 아니라 본체로 경계를 넘어왔다고!? 야, 이 미친놈들아! 제사장이 깨어나잖아!?”
하누만들은 번쩍 눈을 떴다!
거대한 쇠 지게에 실린 산처럼 솟은 술통 셋!
이 거대한 쇠 지게를 짊어진 건 옷을 입고, 얼굴에 천을 둘둘 감은 사람이었다.
피부가 드러난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화염이 쏟아지는 눈을 보는 순간 모든 하누만은 이 사람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안개 숲에 거대한 과수원을 만든 붉은 털의 하누만!
아카린!
“하, 시바! 경계를 넘으려면 미친 듯이 뛰어야겠네! 아니지, 그냥 다른 경계로 피했다가 돌아오면!? 차라리 그게 낫겠네!”
분통을 터트리며 말을 쏟아 내던 아카린은 한달음에 하누만을 뛰어넘어 계단을 뛰어올랐다.
쿵, 쿵, 쿵-
육중한 진동이 느껴지는 순간.
죽은 척 엎드린 모든 하누만은 깨달았다.
‘아카린은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붉은 털 하누만 아카린에게 쥐어박히는 게, 분노한 허공도의 제사장을 만나는 것보다 백배 낫다!
죽은 척 엎드린 수백의 하누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카린을 따라 전력으로 달렸다!
쿠르르르릉-
단단한 화강암 바위 계단이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진동했다.
고요한 밤의 세계, 허공도의 그림자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때 천문석과 그 일행은 이상 던전의 두 번째 출구가 있는 장소에 한참 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두 번째 던전 출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 * *
움푹 파인 암반과 줄줄이 자라난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는 공간.
두 번째 던전 출구가 있던 장소에 임시 캠프가 차려졌다.
타닥, 타닥-
낙엽과 자잘한 나뭇가지를 모아 피워진 모닥불 앞 천문석 혼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출구가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천문석은 모닥불을 피우고 식사 후 동료들을 바로 재웠다.
강릉역에서부터 이어진 연이은 사건·사고에 굴렀다.
그 사건·사고는 섬광에 휩싸여 던전 안으로 끌려들어온 이후에도 계속됐다.
출구가 사라지고, 헌터들이 뒤에 붙더니, 갑자기 그림자 마수 거대 원숭이가 튀어나왔다.
한호석 교수, 진교은뿐만 아니라, 최설, 허준도 알게 모르게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다.
생각이 많아지면 불안감이 커지고 불안감이 커지면 체력 소모가 더 빨라진다.
이럴 때는 차라리 강제로 재워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게 낫다.
그러나 홀로 불침번을 서는 천문석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출구도 사라졌다.
한호석 교수가 이 던전에서 확인한 출구는 모두 7개.
다행히 아직 확인하지 않은 5개의 출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3번째 출구는 이곳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벌써 두 개의 출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른 출구가 무사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던전에서 나가는 데 상상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에 하나 모든 출구가 사라졌다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무림 던전 때처럼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
그러나 클리어 조건도 모르는 던전의 클리어가 쉬울 리 없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불안감이 아닌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다.
낮게 울리는 심장 소리, 가슴속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열기.
직감이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다고, 상상 이상의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아니, 그렇게 되면, 걱정해야죠!?”
땅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천문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상상 이상의 일이 일어날 거 같은데. 하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휘이이-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 하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아니, 땅님, 하늘님 두 분 짰습니까? 뭐라고 대답은 해 줘야죠?”
피식 웃으며 장작을 모닥불에 넣는 순간.
“……!”
기감에 무언가 걸렸다.
움푹 파인 지형 밖.
계단 아래쪽!
무언가 오고 있다!
파악-
천문석은 내력이 실린 발을 내리찍어 단숨에 모닥불을 꺼트리고 텐트로 달렸다.
“일어나라!”
번쩍 눈을 뜨는 순간 한 동작에 장비를 챙기는 최설과 허준.
텐트 구석으로 움직여 공간을 열어 주는 한호석 교수.
깊게 잠든 특급 헌터를 챙기는 진교은.
능숙하게 움직이는 동료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접근 중! 우선 내가 상대한다. 장비 챙기고 몸을 숨겨라!”
천문석은 바로 몸을 돌려 움푹 파인 지형 입구로 달렸다.
달과 별은 여전히 밝고, 거센 바람에 안개는 모두 흩어졌다.
시계가 확 트이고, 소리, 냄새, 촉각. 오감이 완전히 살아났다!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천지 사방으로 기감을 뻗었다!
거칠 것 없이 쭉 뻗어 나가는 기감에 걸리는 건 둘!
아득한 하늘에서 원을 그리는 커다란 새.
자신이 지나온 계단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존재!
계단을 달려오는 존재는 기감에 걸리는 존재감만 봐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천문석은 레이 실트의 강철봉을 뽑아 들고 가볍게 손을 돌렸다.
파스스스스-
강철봉 안의 모래가 흐르고 올올히 풀려 나온 내력이 강철봉에서 흩날릴 때.
파아아아앙-
거센 열풍과 함께 기다리던 상대가 나타났다!
집채만 한 나무통 세 개가 올라간 쇠 지게를 짊어진 사람이!
“……어?”
* * *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정작 나타난 건 쇠 지게를 짊어진 사람이다!
어이없어하는 것도 기세와 투지를 끌어올리는 순간.
터져 나온 황당해하는 외침.
“뭐야!? 또 인간이잖아!?”
‘또?’
의문은 품는 즉시 풀렸다.
커다란 나무 술통 위에 짐짝처럼 널려 있는 헌터 복장의 세 사람!
그중 한 사람이 낯익었다.
칠성파 김기철!
자신이 나무에 걸어 두고 온 김기철이다.
순간 천을 둘둘 두르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맹렬한 화염 속, 금빛 안광이 화살처럼 날아온다!
바짝 긴장해 내력을 끌어올릴 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야, 지금 난리 났어! 빨리 튀어야 해!”
쿵-
진동이 울리는 순간 거대한 지게가 바람처럼 옆을 스쳐 지나가 캠프가 있는 장소로 들어간다!
“……!”
깜짝 놀라 뒤를 쫓자, 모닥불이 있던 장소에 우뚝 멈춰 선 거대한 지게가 보였다.
그리고 분통을 터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시바 경계는 왜 또 없어진 거야!? 하, 다음 경계까지 달리기엔 간당간당할 것 같은데!?”
하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니 바로 몸을 돌리는 지게꾼.
“야, 너도 어서 튀어! 곧 제사장이 깨어난다! 걸리면 아작나는 거야! 저 위에 한 시간 거리에 경계 있다! 바로 달려!”
쿵쿵, 쿵쿵쿵-
계단을 가리킨 지게꾼은 한달음에 캠프에서 뛰어나가 바람처럼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지게꾼이 나타나고 사라지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뭐야, 저 녀석!?”
자신도 모르게 말하는 순간 번쩍 깨달았다.
계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던전에서 만난 이상한 지게꾼.
‘이 존재와 말이 통했다!’
게다가 이 녀석이 가리킨 계단 위쪽!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경계!
감이 왔다.
한호석 교수가 말한 3번째 출구를 말하는 거다!
“제사장? 제사장은 또 누구야?”
이때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쿠르르르르릉-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는 대지!
곧 수백의 거대 원숭이들이 계단에서 나타났다!
거대 원숭이들은 지게꾼이 사라진 계단 위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렸다.
마치 재난 현장에서 도망치는 동물들처럼!
“……!”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순간.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거대한 달과 별의 강이 흐르던 밤하늘에 신기루가 나타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산과 봉우리.
그 사이사이를 파도치듯 흐르는 안개들.
지금 자신이 있는 광활한 계단산을 그대로 옮긴듯한 엄청난 규모의 신기루!
지상 전체를 거울로 비춘 듯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신기루를 보는 순간 천문석은 알아챘다.
신기루가 아니다!
저건 진짜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리고 이 반전된 세계의 한곳으로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인식하는 순간 까마득한 거리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는 사람.
이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가면을 쓴 채 밑동만 남은 나무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잠들어 있었다.
후우, 후우우-
이 잠든 사람의 숨결에서 마굴의 대요마조차 지워 버릴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순간 벼락 치듯 깨달았다.
제사장!
저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제사장이다!
미친 듯이 계단을 달리던 지게꾼과 수백의 거대 원숭이들!
이들 모두를 도망치게 만든 제사장이 깨어난다!?
모든 감각이 경고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하나라고!
천문석은 숨어 있는 동료들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모두 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