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97화>
수백의 그림자가 대나무 숲의 음영으로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휘이이잉-
돌연 불어온 거센 바람에 대나무 숲이 흔들리는 순간.
파아아앙-
새하얀 섬광이 터지고 이 섬광 속에서 40여 명의 헌터들이 나타났다!
“……여기는?!”
“어떻게 된 거야?!”
……
헌터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쏟아질 때. 오발 사고를 우려한 지휘관들은 다급히 외쳤다.
“전원 동작 그만!
“주위 전부 아군이다!”
“총구 내려!”
“방아쇠에서 손가락 빼라!”
잠시 후 섬광이 사라지고 왕체와 김기철, 철검장과 칠성파의 헌터들이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휘이이이이잉-
때마침 풀 내음이 가득 담긴 바람이 불어오자 주위를 확인한 헌터들은 경악했다.
“대나무숲?!”
“하늘에 달이 보인다?!”
갑자기 나타난 대나무 숲!
게다가 하늘이 완전히 변했다.
거대한 달과 밤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별의 강!
칠성산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순간 답을 구하는 헌터들의 시선이 왕체와 김기철에게 모였다.
왕체와 김기철 모두 밑바닥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대나무 숲과 밤하늘을 보는 즉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챘다.
대피소 문을 날려 버리는 순간 쏟아져 나온 섬광, 그 섬광에 휩쓸려 이곳에 왔다!
던전, 균열, 마경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
두 사람은 치솟는 막막함과 현기증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세기 놈이 숨은 대피소를 연 것뿐인데, 무슨 공간 이동이란 말인가?!
이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사색이 된 추적팀 리더가 대나무숲을 가리켰다.
“떨어진 지 얼마 안 된 술 냄새가 숲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술 냄새?”
“그게 무슨 소리야?”
헌터들이 당황해 반문하는 순간.
추적팀 리더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피소 안에 있던 이세기와 그 일행! 그 녀석들이 이곳을 이동했습니다! 대략 1, 2시간 전! 지금 바로 움직이면 뒤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놈들은 이 ‘던전’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 겁니다!”
‘던전에서 나간다!’
같은 생각을 떠올린 왕체와 김기철은 바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이동한다!”
“이세기를 잡으면 돌아갈 수 있다!”
헌터 모두는 달리기 시작했다.
추적팀 헌터들이 앞장서 달리고 그 뒤로 40여 명의 헌터들이 뒤따랐다.
고요한 대나무 숲에 헌터들의 달리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선두 추적팀 헌터들은 굳은 얼굴로 리더에게 모여들었다.
“리더, 지금 여기가 던전이라는……!?”
리더는 손을 들어 말을 끊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여기가 어디든. 지금은 이세기를 찾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방으로 흩어져 흔적을 추적하는 부하들.
확신을 담아 말했으나, 지금 추적팀 리더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이곳이 ‘던전’이라고 말했다.
힐끗 살피니 고용주와 헌터들은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고만 생각할 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이 말이 안 됐다!
분명히 기억한다.
섬광이 터진 장소는 강릉시 인근 칠성산, 게이트 안정화 권역 안이었다!
즉, 안정화 권역 안에 던전, 혹은 균열이 생기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 안에 팀원 전부와 함께 들어왔다!
순간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안정화 권역 안에 생긴 던전이라니!
이 안에서 갑자기 재앙급 마수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세기는 마치 이 던전이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움직였다!
-안정화 권역 안에 세워진 보안등급 대피소.
-보안등급 대피소 안에 있던 특이 던전.
-퇴로가 없는 대피소로 도망친 이세기!
추적팀 리더의 육감이 미친 듯한 경고를 보냈다!
이세기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물이 있다고!
이번 의뢰는 받으면 안 되는 의뢰였다고!
그러나 이미 사건은 터졌고, 자신과 추적팀 5인 전원은 던전 안에 들어왔다.
이제 할 일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이세기를 찾아 던전에서 빠져나간 후 바로 잠수를 타야 했다!
추적팀 전원은 전력을 다해 이세기와 그 일행의 흔적을 추적했다!
점점이 떨어진 술 냄새와 대나무 숲에 찍힌 발자국을!
* * *
천문석 일행이 어둑어둑한 대나무 숲을 한 시간가량 걸었을 때, 갑자기 숲이 끝나고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시야를 전부 가리는 수백 미터 높이의 바위!
그 바위아래에는 환한 빛이 쏟아지는 동굴이 있었다.
한호석 교수는 반색해서 말했다.
“입구는 그대로군! 저 동굴을 지나가면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목적지로 갈 수 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천문석은 바로 선두로 나서서 빠르게 걸었다.
휘이이이-
동굴이 가까워지자 대나무 숲의 습한 바람이 아닌 차가운 바람이 쏟아졌다.
“특급 헌터 내 뒤에 바짝 붙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착 배낭에 달라붙는 특급 헌터.
천문석은 기감을 일으킨 채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로 들어가자 몇 배로 강해지는 바람!
파르르륵-
머리카락과 옷깃이 강풍에 흩날릴 뿐, 특별히 기감에 걸리는 건 없었다.
천문석은 성큼성큼 빠르게 동굴을 나아갔다.
하얗게 빛나는 동굴을 걷기를 100여 미터, 곧 달빛이 쏟아지는 출구가 나타났다.
천문석은 주저하지 않고 출구로 나왔다.
한순간에 시야가 탁 트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맥이 나타났다.
안개의 바다 위.
섬처럼 놓인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뤄진 거대한 산맥!
끝도 없이 이어지는 봉우리 아래 빛나는 안개의 바다가 파도치듯 흐르고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이 모든 게 훤히 보였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환한 달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의 강이 거대한 빛의 베일을 지상에 드리우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
너무나 압도적인 현실감에 모두는 넋을 놓고 이 거대한 봉우리를 봤다.
“어, 어어어?!”
“……여기가 던전이라고……?”
“진짜 여기가 던전이 맞나요?!”
“이제 임무가 시작됐다! 카카캌-.”
……
경악한 동료들의 외침이 쏟아질 때.
천문석은 시선을 내려 발아래를 봤다.
단단한 화강암을 깎아 만든 너비 10미터가 넘는 계단!
이 계단 왼쪽으로는 높게 솟은 바위가 오른쪽으로는 탁 트인 하늘이 있었다.
이 거대한 계단이 안개가 흘러내리는 정상과 안개에 자욱하게 잠긴 지상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휘이이잉-
문득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바로 앞에 자리한 안개에 휩싸인 봉우리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널찍널찍하게 깎여나간 계단!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봉우리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장민 대표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합쳐져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 냈다.
계단산!
그렇다, 이곳은 장민 대표가 말한 대로 계단산이었다!
그러나 단지 이야기로 들은 것과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천지 차이였다.
지금 자신이 있는 봉우리뿐만이 아니다.
시야에 닿는 모든 산과 봉우리에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이 있고, 그 정상에는 다른 봉우리로 이어지는 긴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다!
현대에도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계단과 다리가 시야가 닿는 모든 산, 모든 봉우리에 걸쳐 있었다.
이곳은 계단으로 이뤄진 거대한 산맥이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이 계단과 다리를 만들기 위해 들어갔을 엄청난 인력과 노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눈앞의 봉우리와 그 너머 줄줄이 이어지는 봉우리들을 아무리 살펴도 계단만 있었다.
사람의 기척과 다른 문명의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버려진 황금도시처럼 산맥 전체를 잇는 계단을 만들고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 사람들.
“…….”
천문석은 문득 손을 뻗어 계단 위를 흐르는 안개를 잡아봤다.
파스스스-
안개는 마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할 때 상념을 깨는 한호석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2시간 정도만 올라가면 던전 출구가 나온다. 이제 이동하자.”
일행 모두는 풍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특급 헌터만 빼고.
동굴 입구에 쪼그려 앉아 하얀 돌멩이로 바닥에 무언가를 쓰는 특급 헌터.
“너 뭐 하냐?”
“길 잃어버리면 큰일이잖아! 그래서 표식 해 놨어! 딱 보면 어딘지 알겠지?!”
구불구불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적힌 표식.
“어서 올라가자. 빨리 가서 밥 먹어야지.”
피식 웃은 천문석이 말하는 순간 특급 헌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일행들!
“앗! 벌써 저기까지 갔잖아! 알바 빨리빨리 가자!”
다다닥- 계단 위를 달려.
펄쩍- 뛰어 다음 계단으로 올라선다.
특급 헌터는 짧은 팔다리로 열심히 계단을 뛰어오르며 크게 소리쳤다.
“특급 헌터가 왔다! 카카캌-.”
카카카카카-
웃음소리가 끝없이 펼쳐진 산과 봉우리 사이에서 메아리칠 때.
휘이이이이-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드니 거대한 새가 달 아래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마수와 몬스터, 사람 한 명 없는 이 거대한 산맥 위를 날고 있는 새 한 마리.
이 순간 천문석은 묘한 감각을 느꼈다.
빛바랜 흑백 사진에 그려 넣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이 압도적인 풍경 속을 날고 있는 새에게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문석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원을 그리는 거대한 새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때 특급 헌터의 외침이 들려왔다.
“알바 빨리 와!”
어느새 최설을 따라잡아 크게 손을 흔드는 특급 헌터.
“알았어! 바로 갈게!”
천문석은 안개가 흐르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며 머릿속 잡념을 지웠다.
지금 중요한 건 출구를 찾아 이 던전에서 빠져나가는 것!
생경한 느낌의 비밀을 푸는 건 지금 할 일이 아니었다.
단숨에 일행을 따라잡은 천문석은 다시 선두에서 길을 열었다.
이렇게 천문석과 일행이 사라지고 한참 후.
대나무 숲으로 이어진 동굴이 뚫린 바위 꼭대기에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한참 동안 대나무 숲을 살피다가 높게 솟은 바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거대한 암반 위를 미끄러져, 외따로 자라난 나무 그림자를 낚아챘다!
나무 그림자가 크게 휘어지는 순간.
꽈드드득-
동시에 크게 휘어지는 실제 나뭇가지!
파아앙-
그림자는 휘어진 나무의 탄성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콰득, 콰득, 콰드득-
외따로 떨어진 나무 그림자를 연속으로 낚아채, 순식간에 계단 위에 내려섰다!
동굴 입구에 쓰인 글자가 보였다.
꼬불꼬불 알아볼 수 없이 반전된 글자!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공기 중에 흩어진 달짝지근한 청주 향이 느껴졌다!
‘위다!’
그림자는 원숭이처럼 다리로 뛰고 팔로 바닥을 밀며 계단을 달렸다!
이게 시작이었다.
높게 솟은 바위 곳곳 음영 진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림자들!
계단을 달리고, 바위 위로 미끄러지고, 절벽에 자라난 나무 그림자로 도약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섯, 열이 됐다!
환한 달빛에 빛나던 새하얀 봉우리는 어느새 수많은 그림자의 물결에 어두워졌다!
소리도 기척도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의 물결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한계에 달하는 순간.
높게 솟은 파도가 무너지듯 와락 계단 위로 쏟아졌다!
소리 없는 그림자의 파도가 계단 위로 몰아쳤다!
똑, 똑, 똑-
한 방울씩 떨어진 청주가 있는 곳.
천문석이 메고 있는 배낭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