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96화>
섬광이 하얗게 시야를 물들이는 순간.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세기말 대한민국 시즌2를 찍겠구나!’
그래서 순간적으로 일기일원공을 끌어올리고 어떤 변수가 눈앞에 나타나도 반응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렇기에 시야가 살아나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휙-
한껏 몸을 낮추며 주위를 확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위치는?’
-대나무가 가득한 숲 중앙 공터!
하늘에는 지상을 훤히 밝히는 달이 떠 있다!
‘위협적인 적은?’
-술 냄새, 풀 내음이 담긴 바람과 풀벌레 소리뿐!
기감에 걸리는 마수와 몬스터는 없다!
‘동료들은 어디에?’
-대나무 숲 사이사이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동료들이 보인다!
으으으-
“여기는 어디야?!”
허준!
최설과 진교은!
한호석 교수님!
……
특급 헌터가 없다?!
“특급 헌터!”
외침과 동시에 내력을 폭발시켜 기감을 뻗으려는 순간.
“알바! 나 여기 있어!”
높게 자란 대나무 아래, 낙엽이 가득 쌓인 땅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썩, 들썩-
곧 낙엽이 흔들리더니 그 아래서 벌떡 일어나는 특급 헌터!
특급 헌터는 길리슈트를 입은 저격수처럼, 전신에 나뭇잎을 붙이고 땅에 엎드려 있었다!
“……너 그게 뭐냐?”
“어때 감쪽같지?!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헌터들은 이렇게 위장을 잘해야 한대! 빛이 팟 터지길래! 내가 잽싸게 낙엽 속으로 들어갔어! 잘했지?! 특급 헌터 같았지!!”
자랑스레 외치는 특급 헌터.
“…….”
천문석은 그러려니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동료들과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
이제 동료들 상태를 확인하고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면 된다!
“특급 헌터 내 뒤에 바짝 붙어! 모두 괜찮은지 확인해야 한다.”
“알았어! 나도 도울게!”
천문석과 특급 헌터는 대나무 숲을 달려 쓰러진 동료들을 공터로 모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고, 공터로 옮겨지자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최설, 진교은 정신 들어?”
“이 물 마셔!”
천문석이 질문하는 순간 재빨리 생수병을 꺼내 내미는 특급 헌터.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 나눠 줘라.”
“알았어! 모두 물 마셔!”
특급 헌터는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고 달려갔고, 천문석은 동료들을 모두 확인하고 한호석 교수에게 향했다.
한호석 교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대나무 숲을 달리며 나무와 땅, 밤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한호석 교수의 심각한 얼굴과 일행 모두를 이곳으로 날려 보내버린 빛!
천문석은 뭔가 사고가 터졌다는 것을 바로 직감했다.
이때 한호석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한호석 교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던전 입구가 정상이 아니었다.”
자신이 쏟아지는 빛을 보고 느꼈던 불길함이 사실이었다!
천문석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물었다.
“교수님 어디로 날아온 건가요?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거겠죠?”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
천문석은 바로 다시 확인했다.
“던전 입구가 정상이 아니라고……?”
“아! 뭔가 오해했나 보네. 이곳 이상 던전 안이야. 제대로 들어왔어.”
“……네?”
‘……제대로 들어왔는데 표정이 왜 저래?!’
“교수님. 그럼 그 심각한 표정은 뭔가요?!”
“그 엄청난 빛, 응축된 마력 파장이 터졌는데. 던전에 제대로 들어왔잖아…… 하아-.”
한호석 교수는 깊게 탄식했다.
아니, 지금 이게 뭔 소리야?!
제대로 들어왔는데 왜 탄식을 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질문하려는 순간.
“……!”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제대로 들어왔다!
던전 입구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 물결치듯 밀려오는 빛에 삼켜졌는데도 제대로 된 목적지로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다!
한호석 교수는 천문석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빛, 게이트 마력 파장이다. 그게 왜 던전에서 쏟아진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호석 교수는 밤하늘과 주위를 둘러싼 대나무를 가리켰다.
“이곳은 ‘이상 던전’이고, 던전 입구로 들어왔을 때 처음 나타나는 장소 대나무 숲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
“던전 입구가 완전히 변했는데 같은 장소에 도착한 거다.”
이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기계 오작동으로 3층에서 문이 열렸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밖에는 3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3층이 있어야 할 문밖에 7층이 나타났다!
3층에 나타난 7층!
지금 상황이 이와 같았다!
던전 입구에서 몰아치던 빛의 폭풍!
그 안에 담긴 엄청난 힘이라면, 당연히 모두는 엉뚱한 장소로 날아가야 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 목적지에 그대로 도착했다!
“혹시 환경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장소인 거 아닐까요?!”
천문석이 재빨리 가설을 제시하자.
한호석 교수는 대나무를 가리켰다.
대나무 표면에 칼로 새겨진 흔적.
[08.08 HHS #101]
“이거 저번 조사 때 내가 새긴 거다.”
“……!”
이 순간 바람이 불어오고 대나뭇가지가 바람이 흔들렸다.
우수수수수-
풀 내음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느껴질 리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숲의 음영과 그늘!
어둠 곳곳에 무언가 숨어 자신을 주시하는 것만 같았다!
섬뜩한 감각에 온몸이 부르르 떨릴 때.
천문석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이 정도면 할 만하다!’
그렇다!
이 정도면 할 만했다!
배송 의뢰하다가 1999년 12월 30일! 게이트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으로 날아간 것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때보다 시작도 좋다.
까마득한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서리 늑대처럼 흩어진 동료도 없다.
하하하-
천문석은 웃음부터 터트리고 말했다.
“교수님 그냥 좋게 생각하죠. 어차피 환경이 비슷한 거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얼른 출구로 이동하죠!”
“…….”
한호석 교수는 말없이 대나무 숲 가운데 일행이 앉은 공터로 걸어갔다.
그리고 땅을 가리키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기가 던전 출구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호석 교수가 가리킨 땅으로 향했다.
땅에는 하얀 암반이 있었다.
배낭에 매달아 둔 종이곽 청주가 터져 흘러내린 술이 고여 있는 움푹 들어간 암반.
청주가 고인 암반 외에는 던전 출구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
“…….”
아득한 침묵 속에서 천문석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설마……?!”
한호석 교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던 던전 출구가 사라졌다.”
순간 엄청난 충격이 일행을 휩쓸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던전 출구가 왜 없어져?!”
“설마! 정말로, 진짜로 출구가 없어진 거예요?!”
허준이 넋 나간 표정으로 외치고, 진교은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몇 번이고 사실인지 확인할 때.
최설은 천문석의 옷을 잡고 흔들었다.
“야, 넌 무슨 방법 있지?! 그렇지 빨리 말해 봐!”
하, 하하하-
천문석은 허탈하게 웃으며 한호석 교수를 봤다.
아니, 교수님…….
던전 출구가 사라진 걸 먼저 말해 줘야죠…….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가 이렇게 폭탄을 터트리시면 어떡합니까!?
모두가 좌절하는 이 순간.
특급 헌터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문이 없어졌으면 다른 문으로 나가면 되잖아?!”
“…….”
“…….”
“…….”
초롱초롱한 눈으로 당당히 외치는 특급 헌터.
특급 헌터의 모습에 분통을 터트리던 모두가 숙연해졌다.
이렇게 작은 아이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데 이런 추태를 보였다니!
모두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몸에 힘이 차올랐다.
“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
천문석이 앞으로 나서 힘을 담아 외치는 순간.
한호석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맞아! 다른 출구로 가면 된다!”
“…….”
“…….”
“……네? 다른 출구라고요? 지금 다른 출구가 있다는 말인가요?!”
황당해 하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호석 교수!
“그래!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 계단으로 2시간 정도 걸으면 출구가 있다. 모두 짐 챙기고, 바로 출발하자. 내 배낭이 어디 있지?”
“저기 대나무 아래서 등산 배낭 봤어! 따라와!”
한달음에 달려가는 특급 헌터와 그 뒤를 쫓아가는 한호석 교수.
“…….”
천문석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할 때.
하아-
하아아-
하아아아-
땅이 꺼질듯한 한숨 소리 3연타가 들려오고,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천문석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지만, 보지 않아도 동료들의 표정이 짐작 갔다.
‘뭐가 이따위야?’
허준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
‘이번에도 이런 식이야?’
최설의 황당해 하는 표정.
‘어떻게든 튀었어야 했는데…….’
진교은의 후회가 득한 표정.
그러나 천문석도 할 말은 있었다.
‘교수님! 중요한 걸 먼저 말해 주셨어야죠!’
이 순간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호석 교수님이 입을 열 때마다 아나운서가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던 상황!
이제야 아나운서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한호석 교수님은 극단적인 미괄식 화법의 소유자였다!
엉뚱한 이야기가 한참을 이어지다가 결론,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나온다!
한호석 교수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핵심을 찔러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때 특급 헌터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얼른 와! 빨리빨리 올라가서 밥 먹어야지!”
천문석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헌터용 배낭을 낚아채 한달음에 한호석 교수에게 달려가 항의했다.
“아니, 교수님! 다른 출구 있는데, 왜 그렇게 심각하셨던 겁니까?”
순간 한호석 교수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여기 출구가 사라졌는데. 다른 출구가 무사할지 모르잖아?”
“……!”
천문석은 한호석 교수의 심각한 표정이 이해됐다.
다른 출구가 있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출구 하나가 사라졌다는 말은, 다른 출구도 사라질 수 있다는 말과 같으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
최대한 빨리 두 번째 출구가 있는 장소로 이동해 출구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출구가 있다면 바로 빠져나가야 했다!
이 이상 던전에 무슨 변화가 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제는 용역 헌터 놈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문석의 시선이 대나무 숲을 걷는 일행에게 향했다.
최설과 진교은, 허준, 한호석 교수.
그리고 퐁퐁검을 휘두르며 씩씩하게 걷는 특급 헌터!
무슨 방법을 써서든 모두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지금 꼭 필요한 게 있었다.
정보!
천문석은 한호석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지금 가는 곳 말고 다른 출구가 더 있습니까? 아니, 이 던전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말해 주세요! 교수님!”
* * *
천문석 일행이 떠나간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어왔다.
우수수수-
바람은 높게 솟은 대나무를 흔들고, 숲 중앙의 공터로 불어 갔다.
휘이이잉-
공터 중앙 움푹 들어간 암반에 고인 청주 향이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흩날렸다.
씁쓸하고, 달짝지근한 청주 향이 대나무 숲에 퍼져 나가는 순간.
대나무 숲의 음영에서 하나둘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수백을 넘어서는 그림자가 대나무 숲에 생겨났다.
수백의 그림자들은 홀린 듯이 청주 향을 머금은 바람을 쫓아 모여들었다.
암반에 고인 청주 주위에.
그리고 산속 옹달샘에 모여드는 동물들처럼 암반에 고인 청주를 깊이 흠향(歆饗)했다.
혼백이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파르르 떠는 그림자들!
수백의 그림자가 일제히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대나무 숲이 길게 이어지는 곳!
혼백을 끌어당기는 청주 향이 바람결에 전해지고 있다!
[……!]
[……!]
우수수수수-
소리 없는 외침이 대나무 숲을 뒤흔들고!
수백의 그림자들은 대나무 숲의 음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일족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