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75화>
강릉행 811호 KTX 열차 안.
최설은 깊은 잠 속에서 꿈꾸고 있었다.
몇 번이나 꿔서 이제는 익숙한 꿈속.
언제나 그렇듯 꿈의 시작은 익숙한 트럭 안, 김철수 사무실의 복합 엔진 트럭이 지하터널을 달리는 장면이었다.
운전석에 천문석 부사장.
조수석에 헌터 부대 군인.
뒷좌석 바로 옆에 엠마 대리.
그리고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자신이 있었다.
이날 모든 것이 변했다.
삼합회 상해 단주의 비서였던 자신이, 신동대문 난장판에서 잘못 얽힌 천문석 부사장에 의해 강제로 김철수 사무실 직원이 된 날!
그리고 수많은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끝없이 쏟아지는 서류!
갑자기 나타난 하얀 번개 추이린!
야망을 품고 덤벼든 부산 던전 배송의뢰!
그러나 천문석 부사장과 함께한 부산 던전 배송의뢰는 생각과 전혀 달랐다.
의뢰보다 더 힘든 수련과 대련!
마침내 도착한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의 난장판!
게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 남겨져 뱃일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천문석 부사장은 다시 한 번 공방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도시에서 강으로!
강에서 절벽으로 이어지는 추격전!
이 추격전에는 수백 척의 배와 수천의 헌터.
어이없게도 나이트 아머까지 나타났다!
‘아니, 시바!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꿈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황당한 상황!
이 모든 걸 버텨내고 마침내 사무실로 돌아와 대리 승진을 해냈다!
비록 다른 사원들도 모조리 대리 승진을 했지만…….
그리고 다시금 쏟아지는 서류에 치여 매일매일 야근을 했다!
보통 회사원이라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울 업무 강도!
그러나 최설 자신보다 더욱 빡세게 구르는 ‘직원들’이 있었다.
김철수 사장!
어이없게도 김철수 사무실에선 사장인 김철수가 가장 빡세게 굴렀다.
김철수 사장은 살인적인 데이트 일정에 치여 살면서도, 결재 서류를 클라우드에 올리면 언제나 5분 안에 결제를 끝냈다.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 업무시간 동안에도.
오후 5시에서 다음 날 아침 9시, 퇴근 후 시간에도!
놀랍게도 하루 24시간!
언제 서류를 올려도 5분 안에 결제하고 코멘트까지 달렸다!
보통 이렇게 빡세게 사는 사람은 둘 중 하나로 갈린다.
힘든 티를 팍팍 내는 사람.
묵묵히 아무 말 없는 사람.
김철수 사장은 둘 다 아니었다.
언제나 퀭한 얼굴,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가장 빡세게 구르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김철수 사장이 1등이었다!
그리고 2등, 두 번째로 빡세게 구르는 사람은 천문석 부사장이었다.
천문석 부사장은 놀랍게도 장기 휴가를 받은 다음 날 회사에 나와 인맥을 다졌다!
부사장의 주선으로 사무실에 들어온 직원들!
대인전 랭커, 암살검 한경석!
태성 길드 길드장, 이태성!
정체불명의 꼬맹이!
이걸 위해 천문석 부사장은 온몸을 바쳐 퇴마 의식까지 치렀다!
온 힘을 다해 퇴마 킥, 퇴마 펀치를 날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사장님이라니!
이 순간 죽은 듯이 잠든 최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문득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주저앉는 건 등에 진 짐이 무거울 때가 아니라, 그 짐을 홀로 지고 있을 때였다.
김철수 사장, 천문석 부사장.
엠마, 게릭, 클릭스, 폴리머 대리가 자신의 주위에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사람이 추가됐다.
내 제일 친한 친구!
이제 내 밑에서 일 할 부하 직원!
매일매일 사무실에서 야근할 신입사원!
진교은!
‘교은아 내가 잘 챙겨 줄게. 크크크킄-.’
크크크큭-
어느새 최설은 웃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맞은편 좌석에 앉은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지 말고 연락처 좀 주세요.”
“정말 제 이상형이십니다! 부디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신강릉에 우리 길드 하우스가 있는데 생각 있으시면 꼭 연락을…….”
“제가 사실은 유명한 헌터팀의 정찰조입니다. 우리 헌터팀 들어오시면…….”
……
진교은이 헌팅 당하고 있는 모습이!
“……?”
최설은 시선을 돌려 친구 주위를 살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옆 좌석, 좌석 사이, 등받이 위!
친구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만 5명!
게다가 텅텅 비었던 주위 좌석에 앉아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까지!
순간 최설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같은 초등학교에 다닌 친구, 교은이는 원래 이랬다!
타고난 외모에 더해진 친화력과 사교성이 만들어 내는 매력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와 빠르게 친해진다!
외모에 끌려 말을 걸었다가 대화를 나누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깊게 빠져들게 된다!
‘여전하구나! 교은아!’
최설은 새삼 감탄하는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이 정도라면 면접 통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 만날 천문석 부사장은 김철수 사장의 오른팔이자 왼팔!
명실상부한 사무실의 최고 실세였다!
천문석 부사장의 눈에만 들면 바로 채용 결정이다!
최설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야망이 불타올랐다.
김철수 사무실의 다섯 대리 중 최선임은 엠마 대리다!
엠마는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 게릭, 클릭스, 폴리머 대리의 리더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에 반해 같은 대리여도 자신은 혼자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도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다.
친화력과 매력 만렙을 찍은 자신의 친구, 진교은 사원!
최설은 눈앞의 친구를 보며 다짐했다.
부사장님이 맡긴 이번 일을 완벽히 해내 다시금 고속 승진의 꿈을 이룬다!
그걸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최설은 너무나 밝은 목소리로 친구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외쳤다.
“꺼져!”
* * *
갑자기 들려온 꺼지라는 목소리.
“……?”
“……?”
순간 진교은에게 향해 있던 수십 개의 시선에 의문이 실렸다.
“이 분은 누구?”
한 헌터가 묻는 순간 멍하니 앉아 있던 진교은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하아- 제 원수요…….”
“……네?”
진교은이 대답하는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최설에게 모였다!
헌터와 일반인 수십 명의 험악한 시선!
누구라도 위축될 상황이다.
하지만 최설은 부산 던전 배송의뢰에서 천문석에게 수없이 굴려지며 뼈에 새긴 게 있었다.
타이밍!
최설은 움직였다.
꽈드드득-
단숨에 의자에서 튀어 나가 친구의 옆자리에서 치근대는 헌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끄어억-
틀어쥔 옷깃에 옥죄인 목에서 터져 나오는 억눌린 외침!
쓱-
순간 발로 다리를 거는 동시에 복도로 집어던진다!
으아악-
복도로 밀려난 헌터가 비명과 함께 데굴 굴러 갈 때.
최설은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훑어봤다.
고난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지금의 최설은 삼합회의 단주 비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예전의 최설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야근!
부산 던전을 내려가며 했던 수많은 대련!
공방 도시에서는 전신에서 허물이 벗겨질 때까지 했던 뱃일까지!
최설은 사무실과 현장에서 쉴 새 없이 굴러 강하게 단련됐다!
이제 최설의 눈에 담긴 건 엘리트 비서의 냉정한 눈빛이 아니었다.
단호함과 거침없는 폭력성!
천문석이 쉴 새 없이 굴리며 공들여 심어 준 단호함과 폭력성이 눈에서 새어 나왔다!
이런 살기 어린 눈빛을 채집 전문 헌터, 등산객들이 버텨낼 수는 없었다!
최설의 새카맣게 탄 얼굴 한가운데 섬뜩한 안광이 쏟아지는 순간.
“……아 전 이만!”
“……죄송합니다!”
흠칫 놀란 헌터들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 주위 좌석에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분분히 일어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최설과 진교은이 앉은 자리 주위가 텅텅 비었다.
최설은 털썩 좌석에 앉았다.
순간 진교은이 한탄하듯이 말했다.
“얼음꽃에 가시까지 생겼구나…… 나도 이제 곧 그렇게 되겠지?”
최설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야, 너 우리 부사장님 만나면 바로 나한테 감사할 거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거 너한테 기회야!”
“…….”
진교은은 짧은 침묵 뒤 대답했다.
“높은 분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그 대단한 부사장님 말이지?”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하는 진교은.
‘암살검 한경석. 태성 길드 이태성 길드장.’
“맞아!”
최설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고.
진교은은 다시금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제는 최설이 다단계에 빠진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만난 암살검 한경석이 너무나 분명한 증거였다!
하지만 최설이 다단계에 빠진 게 아니라는 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KTX 열차를 타고 오면서 들었고 방금도 확인한 높은 분 중 한 사람의 이름 때문이었다.
한국 길드 랭킹 1위, 태성 길드의 이태성 길드장!
진교은은 이미 이태성 길드장과 한번 얽혔었다.
카지노 나이트!
제주도에서 시작해 남중국까지 이어진 모든 게 엉망진창 난장판이 됐던 인생 최악의 밤!
자신이 직접 겪은 이태성 길드장은 인간 재해라는 별명에 너무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이태성 길드장의 도움을 받아 철검장을 정리했지만, 이태성 길드장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태양처럼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말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태성 길드장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사람과 같이 일하게 됐다.
이 일은 도망칠 수도 사양할 수도 없었다.
암살검 한경석의 살벌한 경고를 받았으니까!
최설은 던전에서 꼬맹이를 데리고 나와 경호원에게 인계하는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진교은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카지노 나이트도 시작은 쉽고 간단한 의뢰였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룰렛에 구슬을 던져 이태성 길드장이 이기게 만드는 일.
그러나 여기에 정체불명의 각성자가 끼어들며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이 순간 기억 속 모습이 떠올랐다.
타겟과 함께 나타난 악어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각성자!
이 악어 가면 각성자가 일으킨 연쇄 반응.
-삼합회 조직원과의 전투.
-갑자기 쏟아져나온 몬스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고속 공작선, -제주도의 수호신 거대 거북이 위에서 벌어진 전투.
-거대 거북이 등 위에 꽂힌 고속 공작선과 줄줄이 꿇어앉은 간첩들.
그리고 이태성 길드장은 악어 가면. 아니 그때는 벌꿀 가면을 쓴 남자를 불렀던 명칭.
‘내 동생.’
최설에게 김철수 사무실의 부사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태성 길드장이 동생이라고 부른 이 남자의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논리적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정체불명의 남자와 지금 최설이 설명하는 부사장의 이미지가 계속 겹쳤다!
그리고 KTX 열차가 강릉역으로 가까워질 수록 카지노 나이트의 밤 카지노 유람선에 오를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갬블러의 감이 말하고 있다.
당장 일어나서 이 판을 떠나라고!
그러나 자신의 등 뒤에서 이 판을 구경하는 사람은 암살검 한경석이다!
차마 자리에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무슨 방법이 없을까!?’
딜레마에 빠진 진교은이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을 때.
KTX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강릉역에 도착합니다. 지금…….]
“다 왔네! 이제 내릴 준비 하자. 부사장님 역 앞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최설은 밝은 얼굴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그리고 잠시 후 밝은 얼굴의 최설과 끝내 방법을 찾지 못한 진교은을 태운 KTX 811호 열차가 강릉역 플랫폼으로 진입했다.
최설과 진교은.
천문석과 특급 헌터.
왕체와 최림.
용역 헌터 수백 명.
이렇게 모두가 강릉역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