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17화>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 북부 구역.
추이린은 방한복을 입고 눈이 높게 쌓인 벌판을 살피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
얼핏 들려온 듯한 웃음소리에 추이린 수석 연구원은 주위를 훑어봤다.
휘이이이이잉-
그러나 거센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 웃음소리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때 바람결에 김철수 발명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왜!? ……흔적 발견한 거야!?”
“아니요. 방금 그 녀석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그 녀석? 천문석?”
김철수 발명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난장판이 된 공방 도시에서, 천문석과 헤어진 지 벌써 5일이 지났다.
레이 실트를 추적하던 W. S. 인더스트리의 이사와 경호원들은 모두 떠나갔고.
이세기라는 헌터를 찾겠다고 온 도시를 들쑤시던 헌터들도 어느새 한풀 꺾였다.
세기말에서 함께 구른 동료 천문석.
천문석 그 눈치, 행동 모두 빠른 녀석이 지금까지 이곳 공방 도시에 있을 리 없었다.
“그 녀석이 지금까지 여기 있겠냐? 걔라면 아마도 지금쯤 KTX 타고 서울 가고 있을걸?”
“아니죠. 그 녀석 도망치는 솜씨는 상상을 초월하니까. 분명 지금쯤 서울 도착했을 겁니다.”
김철수 발명가와 추이린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상상 이상의 난장판!
그 난장판에서 동료 모두가 무사히 빠져나온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천문석이 없었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철수 발명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찾고 우리도 던전에서 나가자. 너에게 알려 줄 것 정말 많다.”
“네, 알겠습니다!”
추이린은 의욕 있게 외치고는 간이 마력 스캐너를 들고 바둑판처럼 선이 그어진 벌판을 하나하나 훑었다.
김철수 발명가는 고개를 돌려 주위에 있는 눈사태가 높게 쌓여 다져진 벌판을 봤다.
문득 5일 전 일이 떠올랐다.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공방 도시 중앙광장으로 돌아와 도망치자마자, 휴대폰이 문자를 수신했다.
공방 도시 인트라넷을 통해 재금 그룹 임직원에게 전해진 문자에는 ‘지시 사항’이 담겨 있었다.
공방 도시에 있는 시민을 고용해, 공방 도시 북부 지역 일부를 평탄화하고 그 뒤에 ‘ㅅㅅㅅ’ 형태의 뾰족한 벽을 만들라는 지시 사항.
지금 자신과 추이린이 있는 이곳, 눈사태가 높게 쌓인 벌판이 그 지시 사항으로 만들어진 장소다.
당시 깜짝 놀라 이 벌판으로 달려 오고 한참 후, 눈사태가 일어났다.
가파른 경사를 타고 밀려 온 눈사태는 ‘ㅅㅅㅅ’ 형태의 뾰족한 벽에 막혀 넓은 벌판에 높게 쌓였다.
도시를 덮칠 뻔한 눈사태를 ‘지시 사항’이 막은 것이다.
이때 다음 문자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해졌다.
눈사태가 높게 쌓인 벌판에서 마력 스캐너로 무언가를 찾으라는 ‘지시 사항’.
이미 한번 지시 사항으로 눈사태 피해를 막았다.
김철수 발명가와 추이린 수석 연구원은 지시 사항대로 움직였다.
눈사태로 쏟아진 눈이 쌓인 이 넓은 벌판에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선을 그어 구획을 나누고, 하나하나 마력 스캐너로 뒤졌다.
그게 벌써 5일 째다.
추이린은 문자가 오너의 지시라고 생각하고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김철수 발명가는 이 문자가 오너의 지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오너는 의식이 심층으로 깊게 가라앉은 상태, 무언가를 지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지시 사항’ 문자를 보낸 ‘날짜’와 보낸 ‘번호’가 너무나 의미심장했다.
문자를 보낸 날짜는, 세기말 대한민국으로 도약하기 하루 전날, 13일 전이었다.
문자를 보낸 번호는, 마찬가지로 세기말 대한민국으로 도약하기 하루 전날, 13일 전의 ‘자신의 휴대폰’이었다.
김철수 발명가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다시금 확인했다.
“…….”
13일 전, 과거의 자신이 보낸 두 통의 문자가 여전히 휴대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런 문자를 보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김철수 발명가는 문득 고개를 돌려 공방 도시를 바라봤다.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폭발한 지열탑.
터져 나간 증기관.
차단된 중앙 지열봉.
재금 그룹과 W. S. 인더스트리.
두 초거대기업의 협상단.
자신이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했던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된 것처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휴대폰에 온 문자 말고는.’
김철수 발명가는 시선을 내려 손에 잡힌 휴대폰을 바라봤다.
기억에 없는 문자를 자신이 보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4일의 차원 도약 시차가 발생했다.
습관적으로 손으로 품 안을 훑으며 용두를 누르듯 엄지를 움직였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에게 넘겨준 시계가 잡힐 리는 없었다.
“하아-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깊은 한숨을 쉬는 순간.
추이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발견했습니다!”
“알았다!”
김철수 발명가는 상념을 지워 버리고 추이린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여기입니다! 마력 스캐너에 반응이 왔어요! 자연 마석은 아니고 인위적인 마력장 흔적입니다. 반응으로 봐서 대략 17미터쯤? 그 정도 아래에 무언가 있어요!”
추이린은 상기된 얼굴로 흔들리는 마력 스캐너를 내밀었다.
툭, 툭-
미약하게 움직이는 마력 스캐너 바늘!
김철수 발명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파보자.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두 사람은 바로 삽으로 다져진 눈을 파 들어갔다.
파삭, 파삭-
7미터가량 파 들어갔을 때, 다져진 눈 아래서 얼핏 마력광이 보였다!
찾았다!
문자대로 눈사태 아래, 무언가 묻혀 있었다!
순간 김철수 발명가와 추이린의 삽질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리고 예상을 넘어 20미터 넘게 팠을 때, 생각지도 못한 게 드러났다.
타원형의 푸른 마력광에 둘러싸인 7살 남짓한 아이!
아이는 반팔 반바지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설마! 이 아이…….”
추이린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할 때,
김철수 발명가는 바로 호흡과 맥박부터 확인했다.
“……!”
호흡은 느껴지지 않지만, 맥박은 미약하게나마 잡혔다!
“아직 늦지 않았다! 바로 옮기자!”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재빨리 움직였다.
김철수 발명가가 휴대폰을 구급차를 부르는 동안. 추이린은 담요로 아이의 전신을 둘둘 감쌌다.
곧 구급차가 도착하고 아이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승부에서 패배하고 초대형 뱁새에게 잡혀 만 년설에 던져진 후, 눈사태에 휩쓸려 눈 속 깊은 곳에 5일 동안 묻혀 있던 노움.
워커 실트가 돌아왔다.
* * *
“……!?”
번쩍 정신이 드는 순간!
워커 실트는 눈을 뜨지 않고 재빨리 주위 상황부터 확인했다!
도망자는 항상 조심해야 하는 법!
귀를 열어 소리를 듣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를 맡아 분위기를 파악한다!
띠, 띠, 띠-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기계음, 공기 중에 흩어진 소독약 냄새!
‘병원!?’
워커는 슬쩍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1인실 병원 침대 위.
침대 옆에는 잘 개어진 옷과 장비, 신발이 그대로 놓여 있다!
자신의 물건들!
신체도 구속되지 않았고, 장비도 그대로 있다.
다행히 추적자 놈들에게 잡힌 건 아니다.
안도하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내가 왜 병원에 있지?’
의문을 품는 동시에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이 떠올랐다!
초대형 뱁새!
강습 수송병에게 잡혀 바위, 나무, 계곡, 얼음! 사방에 충돌하며 날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만 년설에 던져져 눈사태 속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눈사태를 뚫고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격전에 마력과 심력이 거의 바닥 난 상황!
이러다가 진짜로 훅 가겠다 싶은 순간, 워커 실트는 어쩔 수 없이 실드 마법을 펼치고 신진대사를 낮췄다!
‘다행히 누군가 발견해서 무사히 빠져나왔구나!’
안도한 순간 워커 실트는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벌떡 일어나 환자복을 던져 버리고, 옷을 갈아입고 모자와 고글, 신발, 공구 벨트를 착용했다.
그리고 바로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확인했다.
일주일 동안 매일 봐서 익숙한 풍경, 공방 도시!
다행히 다른 곳으로 옮겨지진 않았다!
워커는 바로 창문을 열고 뛰어 증기관을 잡고 번개같이 병원 지붕으로 올라갔다.
높게 솟은 병원 지붕에 올라서자마자, 바로 격전이 벌어진 봉우리를 찾아 고글을 조정했다.
기이이잉-
렌즈 초점이 맞고 봉우리 정상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커다랗게 보였다.
봉우리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텅 빈 봉우리 정상을 보는 워커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에 머리가 식는 순간.
반대로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저곳이 추적의 시작점이다!
생사 대적을 찾기 위한 추적의 시작점!
“천검 이세기!”
워커 실트는 높게 솟은 봉우리를 향해 달렸다!
이세기와의 승부는 1차전이 끝났을 뿐이다!
2차, 3차, 4차!
이길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천검 이세기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정정당당히 싸워 이기기 위한 정보가!
워커는 달리면서 시계를 잡고 직속 부하를 불렀다!
“로롤로!”
“야, 로롤로!”
“얌마, 로롤로!”
그러나 완전히 먹통이 됐는지 시계형 통신기는 전혀 반응이 없다!
당장 천검 이세기의 뒷조사를 해야 하는데 통신기가 먹통이 되다니!
탁, 탁탁-
스패너로 시계를 두들겨 봤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로롤로! 이 멍청한 녀석! 나가면 반성문 깜지 천장이다!”
로롤로에게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W. S. 인더스트리가 움직이면, 흑전의 불운도 움직인다!’
천검 이세기는 이 세계에서 싸운 존재 중 가장 까다로운 적이었다.
전투 장면을 복기해 보니 이세기 놈의 노림수가 몇 개나 보였다!
이세기는 함정에 함정을 깔고, 다시 한 번 함정을 깔아 뒤통수를 치는 스타일이다!
이것만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방법이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흑전의 불운이 움직였다!
감이 왔다.
이세기 놈은 이미 흑전에 완전히 동화됐다!
예전 자신의 동료가 자석처럼 재앙을 끌어당겼을 때처럼!
이사들과 경호원, 수백 명의 헌터들이 그 뒤를 쫓았는데, 하나같이 개고생을 하다가 스스로 와해됐다!
결국, 의표를 찌르는데 특화된 백곰권으로 싸웠는데도 졌다!
그런 천검 이세기를 이기려면 발상 자체를 다르게 해야 한다.
작용, 반작용!
W. S. 인더스트리를 동원해 봐야 흑전의 불운이 더 크게 작용해 난장판이 되고 와해할 뿐이다!
차라리 혼자 움직이는 게 낫다!
하지만 당연히 그냥 싸워서는 안 된다.
나이트 아머!
로롤로 이사의 나이트 아머를 타고 제국 군단이 추격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마도구와 장비를 모두 사용해서 싸우는 거다!
이번 승부에서는 마도 제국, 일곱 재앙의 보스로 싸우는 거다!
두 눈에 섬뜩한 빛이 스치는 순간.
워커 실트는 재빨리 펜던트에 마력을 밀어 넣어 나이트 아머 추적장치를 활성화하고 달리는 방향을 바꿨다.
나이트 아머가 날아간 산맥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건물 지붕과 옥상을 달려 공방 도시를 가로지르는 워커 실트.
워커 실트는 이미 처음 공방 도시에 온 목적, 레이 실트를 찾아 천공탑에 돌아간다는 계획은 어느새 잊었다.
게다가 자신이 부하로 삼은 두 사람.
-시간 오류 수정자 에코.
-레이 실트 사칭범, 아리엘 무겐다흐.
에코와 아리엘 또한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워커 실트의 머릿속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천검 이세기!
“이세기! 이번에는 내가 이긴다!”
워커 실트는 하늘을 향해 선언했다!
워커는 흑전에 맹세한 대로 흑전의 주인에게 다시 한 번 재앙이 되었다.
흑전의 주인, 천검 이세기에게!
그렇다. 천문석은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천검 이세기라고 구라를 쳤다.
워커 실트가 선언한 이 순간 첫 단추가 완전히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