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16화>
‘설마! 백곰권 꼬맹이에게 당한 건가?!’
천문석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랑 같이 기절한 사람 못 보셨습니까?! 마력 각성자 둘에 동글동글한 초대형 뱁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경석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줬다.
한경석이 건넨 것은 구겨진 종이였다.
한쪽 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고, 반대쪽 면에는 한글 문장이 빽빽이 적혀 있는 종이.
급하게 흘려 쓴 필체만 봐도 얼마나 급하게 도망쳤는지 감이 왔다.
[한동안 잠수 탈거야! 나중에 연락할 게!]
[혹시 너한테도 꼬리 붙을 수 있다!]
[너랑 싸운 그놈. 무시무시한 놈이다!]
[한 번 이겼다고 절대 방심하면 안 돼!]
[너도 가능한 잠수타고 조심해라!]
그리고 내용을 보자 누가 적었는지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레이 실트!
이때 한경석이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여자 마력 각성자가 이거 써서 던져주고. 초대형 뱁새? 새하얗고 동글동글한 새가 두 사람 낚아채서 튀었어. 와! 그 새 장난 아냐! 진짜 순식간에 도망쳤어! 엄청 빨라!"
천문석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한 니케의 추적도 따돌린 게 초대형 뱁새다.
초대형 뱁새를 타고 도망쳤다면 레이 실트와 마력 각성자는 무사할 거다.
이제 다른걸 걱정할 때다.
레이 실트는 자신이 싸운 상대가 위험한 놈이란 걸 강조하고, 한동안 잠수 타겠다고까지 말했다.
천문석도 이 말에 동감이었다.
이번 난장판에는 초거대기업 W. S. 인더스트리의 이사와 전술 등급 마도 병기, 나이트 아머까지 나타났다.
마력 각성자 하나 잡는데 나이트 아머까지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라니!
백곰권 꼬맹이는 엄청난 권력자의 비호를 받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W. S. 인더스트리의 이사 중에서도 고위직 이사가 뒤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사람이 적이라면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랐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 다른 이의 개입이 없는 절벽 위에서 승부했지만, 이 정도 권력자가 마음먹고 움직이면 엄청난 압박이 들어올 것이다!
다행히 얼굴을 가리고, 이름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게다가 백곰권 꼬맹이의 모든 신경은 레이 실트에게 향해 있었다.
일개 헌터인 자신보다는 놓친 레이 실트에게 집중할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곧 부산 던전에서 나간다!
또 다른 세계나 마찬가지인 부산 던전과 달리, 던전 밖에선 초거대기업 W. S. 인더스트리의 권력자라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부산 던전 밖은 대한민국.
W. S. 인더스트리를 능가하는 깡패 기업 재금 그룹의 본사가 있는 나라였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전 세계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도 욕을 먹는 깡패 기업 재금 그룹이지만, 우리 편일 때는 이만큼 든든한 존재가 없었다!
그러나 레이 실트의 말대로 한동안은 몸을 사릴 필요는 있다.
즉, 류세연이 전기료와 가스비를 내주는 옥탑방에서 대놓고 농땡이를 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경쾌한 웃음.
카캬카카카-
천문석은 벌떡 일어나 암살검 한경석을 향해 고개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밍이 기막혔습니다!"
한경석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타이밍 장난 아니지?! 내가 후식이한테 들어온 의뢰 가로챘어! 감이 왔거든! 여기 오면 친구 만날 것 같다는 감이!"
"역시 암살검다운 예리한 직감! 대단하십니다! 카-!"
천문석은 엄지를 치켜들며 탄성을 터트렸다.
이때 수레가 크게 휘어진 산길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곧 앞을 가린 절벽이 사라지고 탁 트인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많은 배가 떠 있는 강이 보이고 그 강 중앙 강변 도시가 나타났다.
-5층 물류 도시!
이 물류 도시에 짓다 만듯한 탑이 까마득한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일명 바벨탑!
저 바벨탑을 이용하면 위층으로 이어지는 편도행 통로를 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편도행 통로를 걸으면 몇 시간이면 부산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바벨탑은 사용료가 더럽게 비싸지만, 그건 문제없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대인전 랭커 한경석이니까!
천문석이 한경석을 보는 순간.
한경석이 번쩍 손을 들고 예상 그대로의 이야기를 했다.
"친구! 나한테 바벨탑 무료 이용권 있어! 나 랭커잖아!"
"역시 암살검! 대인전 랭커! 카-!"
천문석이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카캬카카카-
흐흐흐흐흐-
이 순간 천문석은 물류 도시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세계 쿠팡맨 시즌2!
처음 생각과 달리 시즌2도 시즌1 못지않은 난장판이 벌어졌다.
부산 던전 배송 의뢰로 시작해서.
과열된 지열봉을 냉각하러 지하 유적을 달리고.
재앙급 마수 서리 늑대를 만나 시공간을 넘어갔다.
1999년 12월 30일.
최초의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인 세기말 대한민국으로!
그 불꽃 같은 시대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과 존재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장철, 장민, 장세린.
재의 기사, 국민대 뽀미.
초대형 뱁새, 니케, 서리 늑대.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시대를 살아간 군인과 경찰, 사람들.
악연과 선연이 뒤엉키고, 아쉬움과 뿌듯함이 혼재한 난장판이 끝났다.
그것도 그냥 끝난 게 아닌 '엄청난 보상'을 남기고!
천문석은 잡낭을 열고 '엄청난 보상'을 꺼내 튕겼다.
핑그르르르-
공중에서 회전하는 작은 펜던트!
북한산에서 얻은 이 작은 펜던트가 엄청난 보상이었다.
천문석은 매월 월세가 꽂히는 상가 건물을 바라보듯 펜던트를 바라봤다.
이 작은 펜던트 안에는 나이트 아머가 봉인되어 있었다!
대박, 초대박이 났다!
"한 달! 최소 한 달은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논다!"
천문석은 멀리 보이는 바벨탑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내 길고 긴 이세계 쿠팡맨 시즌2가 끝났다!
나이트 아머라는 초대박 보상을 남기고!
카캬카카카-
* * *
카카카카캌-
주인 없는 옥탑방 앞에서 신나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웃음을 터트리는 건 꼬물꼬물 새싹이 돋은 화분 앞에 쪼그려 앉은 새카맣게 탄 아이, 특급 헌터였다.
퐁퐁퐁-
특급 헌터는 퐁퐁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이제 싹이 났으니까! 열매는 금방 열릴 거야! 모두 수고했어!"
구으으-
띠딛디디-
킥, 키키킥-
사슴벌레, 황금 풍뎅이, 니케가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옥탑방 앞 그늘에 널브러진 서리 늑대가 휙, 휙- 꼬리를 흔들며 짧게 짖었다.
왕-
친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특급 헌터는 선언했다.
"이건 혁명이야! 이제 모든 사람이 샐러드에 맛없는 토마토가 아니라! 엄청엄청 맛있는 우리 수박 토마토를 넣게 될 거야! 이제 우리는 엄청 부자 되는 일만 남았어! 수고했어!"
공정한 상벌이야말로 지도자의 덕목!
타고난 지도자인 특급 헌터는 휙, 휙- 퐁퐁검을 휘두르며 고생한 친구들에게 포상했다.
"니케! 밤에도 열심히 싹을 지키느라 완전! 수고했어! 니케는 이제 ‘임시 두목’이 아니라 ‘정식 두목’이야!"
킥, 키키킼키킼킼-!
니케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척- 손을 올려 절도있게 경례했다.
"사슴 벌레, 황금 풍뎅이! 매일매일 화분에 새싹 나라고 기도 잘했어! 둘에게는 특별히 이걸 붙여 줄게! 완전! 멋있어지는 스티커야!"
특급 헌터는 별 모양 스티커를 꺼내 사슴벌레와 황금 풍뎅이 몸에 탁 붙여줬다.
순간 몸 안에서 차오르는 뿌듯한 충족감!
까마득히 높은 존재의 인정을 받아 존재의 격 자체가 오르는듯한 느낌!
구으으으응-!
띠디디디딛-!
두 스카라베 추심원은 집게를 번쩍 들고, 몸을 반짝이며 환호했다.
이때 그늘에 널브러져 있던 서리 늑대가 고개를 들고 짖었다.
왕-
특급 헌터, 니케, 사슴벌레, 황금 풍뎅이.
모두의 시선이 서리 늑대에게 향했다.
-....!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서리 늑대.
서리 늑대는 니케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느라,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 결과 원래도 동글동글했던 몸이 더 동굴 동글해져 이제는 커다란 털 뭉치가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특급 헌터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아지야 미안. 나도 상 주고 싶은데 특급 헌터 상은 굉장히 공신력 있는 상이라서. 열심히 안 하면 줄 수가 없어."
킥, 키킼키킼-
구으으으으응-
띠딛디디디딛-
니케, 사슴 벌레, 황금 풍뎅이가 맞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일 때.
류세연이 옥탑방에서 나오며 외쳤다.
"특급 헌터! 수박 먹자! 손 씻고 평상으로 와."
"맛있는 수박!"
환호성을 지른 특급 헌터는 재빨리 손을 씻고 평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삭한 수박을 한입 베어먹는 순간.
휘이이이잉-
때마침 바람이 불어오고, 평상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가 빗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쏴아아아아-
그러자 물결치듯 흔들리는 다른 나무들!
류세연은 새삼 감탄하여 주위를 돌아봤다.
넓게 가지를 뻗은 수십 그루의 나무로 뒤덮인 옥상.
제주도 휴가에서 돌아와 확인한 옥상은, 어느새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옥상 정원이 되어있었다!
옥상 곳곳에 놓였던 화분들.
특급 헌터가 장난하듯 나뭇가지를 꾹꾹 심어 만든 화분에서 자라난 나무가 만든 기적이었다!
류세연은 신기한 눈으로 옥상을 둘러 보다가 새싹이 꼬물꼬물 나온 화분을 봤다.
특급 헌터가 제주도에서 돌아온 이후 공을 들이고 있는 수박 토마토 화분!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몇 번이나 물었던 것을 다시 한번 물었다.
"특급 헌터. 저기 수박 토마토 화분 왜 키운다고 했지?"
"세연! 왜 자꾸 까먹어! 내가 다시 잘 설명해줄게!"
특급 헌터는 벌떡 일어나 줄줄이 늘어선 화분을 가리키며 외쳤다.
"토마토는 맛없어! 그런데 수박은 맛있어!"
"수박 토마토는 수박 맛이 나는 토마토야! 아주 맛있어!"
"당연히 엄청 맛있으니까. 아주아주 잘 팔리고 나랑 친구들은 엄청엄청 부자가 되는 거야!"
류세연은 처음 듣는 것처럼 물었다.
"엄청 부자 되면 뭐 하려고? 특급 쌩쌩이 다시 사려고?"
"아니지, 세연! 특급 쌩쌩이 사도 커다란 로봇이 와서 들고 가면 끝이라고 했잖아!"
"그럼 커다란 로봇 사려고?!"
특급 헌터는 척 앞에 놓인 류세연의 휴대폰을 들어서 내밀었다.
"그것도 아니지 세연! 내가 벌써 검색했는데, 커다란 로봇은 안 팔아!"
"그럼 부자 되면 뭐 할 건데?"
특급 헌터는 벌떡 일어나 옥상 뒤로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저 산사서! 커다란 로봇 놔둘 거야. 창문에서 바로 보여서 아무도 못 훔쳐가! 원래는 우리 집 옥상에 놓아두려고 했는데, 장민이 무슨 무슨 법 때문에 안 된데."
‘지금이 하이라이트다!’
류세연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제주도에서 올라오고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러니까 로봇도 없는데, 로봇 놔둘 산부터 살 거라고?"
이 순간 특급 헌터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조금의 의심도 없이 외쳤다.
"난 알바를 믿어! 분명 알바는 이번에 커어다란 로봇을 주워 올 거야!!"
류세연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제주도의 마지막 날 밤.
옥탑방 오빠, 천문석은 특급 헌터에게 약속했다.
'커다란 로봇, 나이트 아머를 줍게 되면 특급 헌터에게 꼭 주겠다고!'
장난감도 아니고 나이트 아머를 줍다니 전제부터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돌아온 날부터, 특급 헌터는 ‘수박 토마토’라는 정체불명의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옥탑방 오빠가 주워올 커다란 로봇, 나이트 아머를 놓을 산을 사기 위해서!
언젠가 당첨될지도 모를 자동차를 위해서 미리 주차장부터 사놓는 격이었다.
이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 확신에 찬 목소리, 조금의 의심도 없는 얼굴이라니!
특급 헌터는 어째선지 옥탑방 오빠가 이번 의뢰에서 반드시 나이트 아머를 주워올 거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의뢰에서 돌아온 옥탑방 오빠와 신나서 뛰어나온 특급 헌터가 마주하는 모습!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흐흐흐-
류세연은 웃음을 삼키며 은근슬쩍 물었다.
"오빠가 로봇 못 주워올지도 모르잖아?"
"난 특급 알바를 믿어! 알바는 반드시 커어어다란 로봇을 주워올 거야!"
특급 헌터는 마치 내일도 태양이 뜬다고 말하는 것처럼 확신을 담아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외쳤다.
이때 류세연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특급 헌터가 제주도에서 할머니한테 얻은 건물 소유권 각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모든 걸 걸고 승부할 타이밍이다!
류세연은 승리의 확신을 담아 외쳤다.
"특급 헌터! 그걸로 나랑 승부하지 않을래!?"
특급 헌터는 승부를 피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류세연과 특급 헌터의 승부가 다시 한번 시작됐다!
승부 조건은 천문석이 커다란 로봇, 나이트 아머를 주워오는지 여부!
두 사람이 승부에 건 물건은 임옥분 여사님의 각서, 그리고 옥상 전체의 사용권이었다!
각서에 손도장만 찍으면 건물 전체를 얻게 되는 특급 헌터에게는 불합리한 승부였다.
그러나 절대로 손도장을 찍을 생각이 없는 특급 헌터는 환호했다.
"만세! 이제 옥상은 내 거야! 카카캌-"
“어딜! 이번에야말로 내가 승리한다! 앞으로 집주인 누나라고 불러라!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