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00화>
2000년 1월 1일, 늦은 저녁.
불이 환하게 밝혀진 경부 고속도로 휴게소.
서울에 게이트가 열린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에는 자동차와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차량과 사람들 대부분이 게이트가 열려 난장판이 된 서울과 경기도를 탈출해 부산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 갑자기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이 모두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불안해진 사람들은 휴게소에 차를 대고 휴게소 마트로 달려가 정신없이 물건을 쓸어 담고 있었다.
고함과 악다구니가 쏟아지는 휴게소 마트가 보이는 주차장.
할머니 두 분과 한 아이가 있었다.
할머니 두 분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할 때.
그 옆에는 허리에 끈이 묶인 아이가 허망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이는 쪼그려 앉은 채로 주위를 돌아봤다.
분명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다고 했는데, 주위를 아무리 봐도 놀이공원은 흔적도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해.’
‘조금만 더 가면 돼.’
‘이제 진짜로 곧 이야.’
‘졸리면 잠깐 자고 일어나 그럼 놀이공원 도착했을 거야.’
……
엄마의 말을 믿고 자다가 일어났는데, 도착한 곳은 놀이공원이 아니라 주차장이다!
아이는 마침내 깨달았다.
엄마한테 또 속았다는 것을!
‘누워야 하나!? 엄마 오면 바닥에 누워서 굴러야 하나!?’
주차장 바닥을 보며 고민하다가 힐끗 할머니들을 봤다.
“라디오가 갑자기 끊겼는데…… 서울 괜찮을까요?”
“설마 뭔 일이야 있겠어요? 정부에서도 잘 막고 있다고 하는데…….”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얼굴이 평소랑 달랐다.
게다가 먹을 걸 구해 오겠다고 뛰어간 아빠와 엄마,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
아이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 때나 누워서 땡깡을 부린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드러눕고, 크게 울고, 소리치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 모두에 타이밍이 중요했다.
적절한 상황과 장소, 시간 게다가 보는 사람까지 고려해야 했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본 아이처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드러누우면, 무관심 속에서 뻘쭘하게 누워 있다가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이가 누울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
번쩍-
바로 앞 자동차 밑에 빛이 번쩍였다.
너무나 빨리 나타났다가 사라진 빛!
그래서 아이 말고는 아무도 이 빛을 보지 못했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빛이 번쩍인 곳으로 손을 뻗었다.
툭-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그리고 자동차 밑에서 나온 아이 손에는 가죽 수첩이 들려 있었다.
가죽 수첩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한 것처럼 반질반질 닳아 있었다.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지?”
고개를 갸웃한 아이는 가죽 수첩을 펼쳤다.
수첩 안에는 페이지마다 빈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내용이 적혀 있었다.
흘려 쓴 작은 글자를 한글을 배운지 며칠 안 된 아이가 읽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페이지가 모두 넘어가고 마지막 장이 나왔을 때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자체로 쓰인 세 글자가 너무나 눈에 익었다!
엄마가 처음 한글을 가르쳐 줄 때 읽는 법을 가르쳐 준 글자였다!
아이는 더듬더듬 글자를 읽었다.
“김. 철. 수.”
스스로 읽은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순간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아빠 이름이잖아!”
“내 이름이라고?”
아이 앞에는 어느새 식료품을 구하러 갔던 아빠가 라면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아빠! 여기에 아빠 이름 적혀 있어!”
“이 수첩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고?”
아이가 건네준 수첩을 받은 김철수 회사원은 별생각 없이 수첩을 봤다.
[김철수]
“진짜네?”
진짜 자신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크게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철수란 이름은 초등학교 전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서 깊은 이름이니까.
학창시절과 사회생활 중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게 수십 번이 넘었다.
“철수라는 이름이 뭐 이렇게 많냐?”
피식 웃은 김철수 회사원은 가죽 수첩을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외쳤다.
“혹시 수첩…….”
순간 눈에 들어오는 주차장에 가득한 인파.
주차장에는 걷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갑자기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이 끊기자, 불안해진 사람들이 휴게소로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지금은 수첩 주인을 찾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김철수가 멈칫할 때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 여기 좀 도와줘!”
문득 고개를 돌리자 보였다.
주차장에 가득한 인파 사이로 나타난 카트!
돌돌, 돌돌돌-
아내가 식료품이 산처럼 쌓인 카트를 밀고 왔다.
김철수는 가죽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아내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 이건 다 어떻게 구한 거야!?”
재빨리 카트를 같이 밀자 들려오는 대답.
“이거 말고 뒤에 아버님이 카트 밀고 오셔! 그거부터 챙겨줘.”
“알았어!”
마트 방향으로 달리며 김철수는 새삼 아내에게 감탄했다.
자신은 라면 한 봉지 구하는 게 다였다.
그런데 아내는 어떻게 했는지 카트에 가득 식료품을 쌓아서 밀고 왔다!
역시 아내는 판단력과 행동력이 남달랐다!
이런 아내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불안했던 가슴이 어쩐지 든든해졌다.
갑자기 광화문에 나타난 게이트와 거기서 쏟아진 괴물들 생각이 사라질 정도로.
이때 식료품이 쌓인 카트를 밀고 오는 아버지와 장인어른과 식료품을 팔라고 채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거기 비키세요!”
김철수는 다급히 외치며 달려가 카트로 달라붙는 사람들을 정신없이 밀어냈다.
몸으로 인파를 밀어내는 전 회사원 김철수의 주머니에는 가죽 수첩이 들어 있었다.
2000년에서 2020년까지, 격동의 게이트 현대사를 거친 가죽 수첩.
가죽 수첩은 김철수 발명가, 마법사 에코, 검성의 손을 거쳐서.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김철수 전 회사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또한 원인과 결과를 잇는 인과의 맞물림이었다.
이로써 2000년과 2020년을 잇는 인과 중 두 개를 제외한 모든 게 맞물렸다.
마법사 에코가 ‘책’의 지시에 따라서 차원 도약시킨, 서리 늑대 17마리.
검성이 ‘인과의 속삭임’에 따라 균열로 던져 버린, 마력 파동 발생장치.
* * *
팟-
섬광에 시야가 새하얗게 물드는 순간.
툭-
밧줄을 잡은 손에 걸린 무게가 사라졌다!
천문석은 직감했다.
‘밧줄이 잘렸구나!’
직감하는 순간 시야가 살아나고, 끊긴 밧줄과 주위에 가득한 구름이 보였다!
휘이이이잉-
동시에 한겨울 칼바람이 전신에 쏟아지고 아찔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천문석은 바로 지금 상황을 알아챘다!
차원 도약이 성공했다!
처음 1999년으로 떨어졌을 때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있다!
천문석은 재빨리 기감을 주위로 뻗었다.
그러자 공중에서 뇌리가 간질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균열!
번쩍 고개를 들자 보이지는 않지만, 균열이 닫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서리 늑대!”
재빨리 기감을 뻗어 하늘과 주위를 살폈지만, 서리 늑대의 서리혼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리 늑대는 차원 도약에 실패했구나!’
끊긴 밧줄을 봤을 때 이미 짐작했지만, 실제 기감을 뻗어 확인하니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동료를 데려오는 데 실패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다른 동료들을 찾고 무사히 내려가는 게 급선무였다.
천문석은 지상을 향해 기감을 뻗으며 외쳤다.
“어디에 계십니까!?”
순간 주위에 가득한 구름이 돌연 사라지고, 탁 트인 지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맥 한가운데 거대한 강이 관통하는 분지.
그리고 이 분지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하늘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너무나 눈에 익은 도시가!
천문석은 재빨리 도시를 훑었다.
거리가 너무 멀고 빠르게 떨어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서 흩날리는 하얀 증기는 너무나 분명히 보였다!
증기 탑에서 흩날리는 증기다!
그렇다면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일 가능성이 컸다!
“마침내 돌아왔다! 하하하-.”
도시의 정체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기감에 잡히는 게 있었다.
5시 방향!
김철수 발명가.
추이린 수석 연구원.
뭉쳐 있는 배낭까지.
먼저 도약한 동료들과 짐이 한 공간에 모여 떨어지고 있다!
천문석은 바로 움직였다.
몸을 수직으로 세워 공기 저항을 낮춰 빠르게 낙하한다!
휘이이이잉-
엄청난 속도로 내려가 동료들이 있는 위치에 도착하는 순간.
“천문석!”
“넘어왔구나!”
추이린과 김철수 발명가의 반색한 외침이 들려왔다.
“우선 서로 연결할게요!”
파아앙-
천문석은 밧줄에 내력을 실어 던지며 외쳤다.
“잡아서 벨트에 묶으세요!”
내력이 실린 밧줄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뻗어 갔다.
추이린이 벨트에 고정하고 던지고, 김철수 발명가가 다시 잡아 벨트에 엮었다.
이때 천문석은 반대쪽 밧줄로 뭉쳐 있는 배낭을 엮었다.
순식간에 동료들과 짐까지 밧줄로 연결된 상황.
천문석은 남은 밧줄을 팔에 감으며 외쳤다.
“레이님은!? 레이님 못 보셨나요!?”
추이린과 김철수 발명가가 대답하기 전에, 하늘에 깔린 구름에서 피리 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히리히리히리히리-
모두의 시선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하는 순간.
휘이이이이잉-
구름을 뚫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새!
초대형 뱁새!
그리고 보였다.
뱁새의 발에 잡혀 있는 두 사람.
레이 실트와 마법사.
순간 천문석은 내력을 실어 외쳤다.
“레이님! 여기에 있습니다!”
천둥 같은 외침이 터진 순간.
수직으로 떨어지던 초대형 뱁새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파아아아앙-
초대형 뱁새는 워터 슬라이드를 미끄러지듯 곡선을 그리며 동료들이 모인 곳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머리에서 울려 퍼지는 메시지 마법!
[지나갈 때 밧줄 던져!]
천문석은 바로 움직였다.
팔에 감은 밧줄을 풀어 배낭에 묶어 돌린다!
휭휭, 휭휭휭-
배낭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파아아아아-
초대형 뱁새가 일으킨 거센 바람이 훅 불어오는 순간.
천문석은 돌리고 있던 밧줄을 놨다!
휘이이잉-
배낭이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타이밍.
탓-
날개를 접고 45도 각도로 떨어진 뱁새가 배낭을 물었다!
파아앙-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자유 낙하하던 몸에 힘이 걸렸다!
으어엇-
으아악-
추이린과 김철수 발명가가 다급한 외침을 토해 내는 순간.
휘이이이잉-
초대형 뱁새는 크게 원을 그리며 지상으로 내려갔다.
밧줄에 줄줄이 엮인 모두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도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흩날리는 안개 아래, 너무나 익숙한 탑이 보였다.
높게 솟은 증기탑!
증기탑이 세워진 도시는 천문석이 아는 한 단 하나뿐이다.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
지금 떨어지는 곳이 공방 도시라는 확신이 왔다!
하지만 천문석은 공방 도시 곳곳을 살폈다.
장소뿐 아니라 시간도 확인해야 했다.
1999년 광화문에 떨어졌을 때처럼 엉뚱한 시간대에 떨어졌으면 끝장이다!
그리고 곧 천문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부두가 보였다.
배에서 자재와 사람이 쉴 새 없이 내리고 한쪽에 해체된 증기탑이 서 있는 부두가!
이 부두에 있는 해체된 증기탑이 너무나 눈에 익었다!
며칠 전 자신이 살수차를 끌고 와 냉각하고, 김철수 발명가, 추이린 수석 연구원과 함께 들어간 그 증기탑이다!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은 증기탑을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자신과 동료들이 1999년으로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대에 돌아왔다!
천문석의 얼굴이 환해질 때.
김철수 발명가와 추이린 수석 연구원도 같은 걸 깨닫고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히 오차가 거의 없다!”
“와, 진짜! 마지막에 뒤통수 맞은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며 천문석을 보는 추이린.
추이린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20년 존버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천문석도 동감이었다.
20년 존버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끝이 좋으면 전부 좋은 거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네가 고생 많았다. 하하하-.”
“배송 의뢰가 이렇게 난장판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하아-.”
“제가 원래 상상 이상이긴 하죠! 하하하-.”
“……그래, 진짜로 상상도 못했다. 하아아-.”
……
2000년에서 돌아온 모두가 긴장을 풀고 웃고 농담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공방 도시 중앙,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지붕에 앉아 있던 꼬맹이가 벌떡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드디어 왔구나! 이제 시작이다! 카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