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458화 (459/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58화>

천문석은 뒤를 돌아봤다.

일행 모두 [성수대교]라 적힌 도로 표지판을 보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장철과 장민.

양손으로 귀를 꼭 막고 주위를 살피는 아이.

아이는 시선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눈을 꼭 감았다.

장철의 딸은 특급 헌터와 달리 낯가림이 많았다.

천문석은 내심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이제 성수대교만 건너면 압구정입니다. 힘을 내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철이 거듭 감사할 때.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버려진 차 사이로 길을 뚫었다.

후미에서 걷는 장민은 복잡한 눈으로 이 모습을 바라봤다.

“…….”

장민의 머릿속에서 밤새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민방위 대피소로 가던 중에 일어난 사고.

집으로 돌아와 새언니를 구급차에 태워 보내고 숨어 있을 때.

몇 번 스치듯 봤던 일진과 선배라는 사람들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 울음소리.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옆집 세찬이네서 석궁을 가져오고 부엌칼로 창을 만들었다.

이들이 현관문을 두들겼을 때 장민은 싸웠다.

유도, 양궁, 검도, 펜싱…….

많은 경험이 있기에 싸움에는 자신 있었다.

석궁 볼트가 바닥에 꽂히고, 부엌칼 창이 겨눠지는 순간 분노하며 달려드는 강도들!

함정으로 다리를 묶고 간격을 두고 견제하며 몇 번 칼빵을 놓으니 결국 강도들은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쳤다.

실전은 생각보다 더 쉬웠다.

하지만 도망치던 강도들이 쏟아져 나온 괴물들에게 당하고 다시 아파트로 숨어드는 순간 깨달았다.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을.

그때 나타난 게 오빠가 귀인이라고 부르는 저 남자였다.

소리도 없이 베란다로 들어와 고립된 자신과 세린이를 탈출시켜 준 남자.

저 남자의 인도로 밤새 중랑천을 달려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괴물과 싸웠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들었다.

전 세계에 생겨날 게이트.

마수와 몬스터, 거대 괴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날 군대.

곧 세상에 나타날 초인들과 변화.

안전지대 제주도와 후방지대 부산.

……

무슨 이유에선지 세세한 내용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믿음이 가는 이야기였다.

문득 이 남자가 해 준 조언이 기억난다.

‘대부분은 해외로 대피할 거다. 하지만 진짜 안전지대는 제주도다.’

‘제주도가 안전지대라는 게 알려지면, 부동산, 생필품 같은 물가 전반이 폭등할 거다.’

‘제주도에 도착하는 즉시 주거지와 생필품부터 확보해야 한다.’

‘5년! 5년만 버티면 된다!’

장민은 문득 고개를 들어 앞서 달리는 남자를 다시금 봤다.

이 남자는 자신이 석궁을 쏘고 창을 찔렀는데도, 언급조차 없이 자신과 오빠, 세린이를 도와주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괴물들과 싸우고 엄청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쳐 주면서까지.

머리와 가슴속에서 터질듯한 의문이 치솟았다.

‘왜 도와주는 거지? 도대체 뭘 원해서?’

순수한 호의를 말하며 접근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다른 대가를 바라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겪었다.

그래서 장민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 절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저 앞에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해 주고 지금도 앞장서 길을 뚫으면서도 호의를 말하지도 대가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이 모든 일을 한다.

그리고 가끔 고개 돌려 자신과 오빠, 세린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지금처럼.

“…….”

앞서 걷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천을 두르고 모자를 눌러써 보이는 것은 두 눈뿐.

이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어째선지 가슴이 울렸다.

남자의 눈빛은 장민이 그동안 타인에게서 받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욕망, 조소, 연민…….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남자는 어째선지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사람처럼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 * *

어린 장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장민의 눈 속에 담긴 의혹과 의심!

언제나 능수능란, 여유만만하던 장민 대표를 보다가 어린 장민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새로웠다.

이렇게 풋풋하고 어설픈 모습이라니!

이건 꼭 사진을 찍어서 돌아가서 보여 줘야 한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장민 대표와 특급 헌터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른 장민 대표!

‘이건 특급 사진이야!’ 신나게 외치며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게 엄마 사진을 보여 줄 특급 헌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거리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때 도로가 점점 높아지고 주위가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성수대교 진입로!

천문석은 웃음을 지우고 재빨리 주위를 확인했다.

왼쪽으로는 앙상한 나무가 가득한 서울숲과 뚝섬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강변 북로, 중랑천,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든 곳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무작정 걷는 남자.

-성수대교가 보이자 환호성을 지르는 일가족.

-정신 나간 얼굴로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사람들을 헤집는 여자.

-묵묵히 리어카를 끄는 할아버지와 리어카에 탄 불안한 얼굴의 할머니와 아이들.

게이트가 열린 지난 밤을 버텨낸 사람들이 성수대교를 넘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성수대교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동호대교와 한남대교.

왼쪽으로 영동대교와 청담대교까지.

시야가 닿는 모든 다리에 대피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리 진입로와 다리 중간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군대와 경찰이 곳곳에 배치되어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한강에 놓인 다리로 향하는 시가지와 도로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고 마수와 몬스터와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마수와 몬스터의 수가 적고 수준도 낮았다.

‘광화문 봉쇄에 성공한 건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곧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 괴수는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잡지 못한다.

전차 포탄과 미사일을 쏟아부으면 잡을 수 있지만, 아직 게이트가 열린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정부가 수도 서울에 포탄을 쏟아붓는 선택을 할 리 없었다.

이때 장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이 보입니다!”

어느새 도로를 막고 있던 버려진 자동차가 사라지고 시계가 트였다.

성수대교 방향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진지를 구축한 군인들이 가까워졌다.

“동작 그만! 멈추세요!”

모래주머니로 만든 기관총 진지 뒤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천문석은 재빨리 강철봉을 등에 메고 멈췄고, 곧 장철과 장민이 다가와 천문석 옆에 섰다.

이때 진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야! 멈추긴 뭘 멈춰! 거기 시민분! 빨리 달려 오세요!”

바로 달리자 장교가 병사를 갈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언제 괴물들 튀어나올 줄 알고! 사람들을 멈추래! 습격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 전 규칙대로…….”

“하, 이 꼴통 새끼! 적은 괴물들이다! 최대한 빨리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다! 알겠냐!”

쾅-

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는 병사의 철모를 한번 때리고 바로 바리케이드를 열었다.

“이 도로는 괴물들이 계속 새어 들어와서 막은 상태입니다! 위험하니 바로 위로 올라가세요!”

‘말이 통하는 장교다!’

감을 잡은 천문석은 장교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 앞 막힌 도로 열어 줘야 합니다.”

“네?”

천문석은 바로 몸을 돌려 중랑천을 가리켰다.

“지금 중랑천이 범람하려고 합니다! 중랑천으로 대피 중이던 시민들이 이 도로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당장 차량 빼내고 진입로 열어 줘야 합니다.”

“중랑천이 범람한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장교가 묻는 순간 천문석이 지나온 도로가 울리기 시작했다.

쿵쿵, 쿵쿵쿵-

다리가 흔들리고 버려진 차량이 요동쳤다.

그리고 버려진 차량 사이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아래쪽 경찰과 군인들이 이 도로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습니다.”

장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중랑천은 도봉, 노원, 중랑, 동대문구.

강북 동부 지역 시민들의 주요 대피로다!

중랑천이 범람하면 휩쓸릴 사람 수가 엄청났다!

장교는 바로 움직였다.

“최소 경계 병력만 남고! 진입로 만든다! 3인 1조! 2인은 버려진 차량을 좌우로 밀어내고 1인은 경계한다! 바로 움직인다! 대피하는 시민들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군인들은 다급히 달려가 차량을 밀어내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쿵쿵-

버려진 차가 밀려나 열리는 공간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리와 몸이 젖어 있었다.

중랑천 물이 주위로 넘치기 시작했다!

천문석은 내력을 끌어올려 중랑천 주위를 확인했다.

대피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중랑천 주위는 어느새 휑해진 상태.

중간에 만난 경찰관과 군인들이 제때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했다.

이제 장철 가족을 안전한 성수대교 너머로 데려다주면 자신이 할 일은 끝난다.

“바로 넘어가죠!”

천문석은 앞장서서 빠르게 걸었다.

곧 성수대교 입구가 가까워지고 사방에서 모여든 인파로 도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장철은 깨달았다.

‘하늘이 도왔구나!’

자신이 말한 대로 해가 뜨고 아파트에서 나왔다면 이미 중랑천이 범람한 후였을 거다.

중랑천이 아닌 난장판이 된 서울 시내 도로를 달렸으면 이렇게 빨리 성수대교에 도착하지 못했다.

게다가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인파가 모였다.

몇 시간만 늦었더라면 다리를 건너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

자신과 아이, 동생이 무사히 여기까지 도착한 건 천운!

모두 앞서 걷는 귀인 덕분이었다.

오늘 새벽, 아파트를 나왔을 때부터 일어난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대피 경로를 짜고 자전거로 타고 달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마수와 몬스터가 나타나면 빠르게 판단해 뚫거나 우회해서 피했고.

한계까지 자신과 동생을 몰아붙여서 결국 이곳 성수대교까지 데려왔다.

그 과정에 몇 번은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 동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잘라 냈었다.

그 모습에 내심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성수대교에 무사히 도착한 지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한 사람부터 지켜야 했다.

병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

바로 옆에서 주위를 살피며 걷는 동생.

가슴에 안겨 꼬물꼬물 움직이는 따뜻한 아이.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장철은 이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동생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 시내를 통과했으면, 뭐가 중요한지 잊고 큰 후회를 할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너무나 뼈저린 후회를!

이 순간 앞서 걷는 남자가 너무나 고마웠다.

“…….”

장철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다시 감사를 표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쉽게 감사하면 그 안에 담긴 진심도 쉬워진다.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진심을 보여야 했다.

‘반드시 이 모든 것을 보답하겠습니다.’

장철이 마음속으로 맹세할 때.

가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빠! 나 이제 눈 떠도 돼?”

눈을 가린 손가락 틈으로 몰래 올려다보며 묻는 아이.

성수대교 진입로는 이제 바로 앞이다.

장철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려 할 때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눈 감고 있어.”

어느새 멈춰 선 남자는 굳은 얼굴로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따라 몸을 돌리자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꺄아아-

사람들의 비명과 욕설.

쿠아아아앙-

쾅, 콰앙, 콰르르르-

거친 엔진음과 버려진 차량이 밀려나는 충돌음이 들려온다.

무언가 도로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와, 이 또라이 새끼들!”

그리고 바로 외쳤다.

“먼저 가세요! 전 저거 처리하고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네……?”

반문하려던 장철은 깨달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유보다 행동이다.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알겠습니다! 바로 가자. 장민.”

바로 대답한 장철은 장민과 함께 성수대교 방향으로 달렸다.

달려가던 장민이 멈칫하더니 외쳤다.

“조심하세요!”

* * *

“조심하세요!”

천문석은 장민을 향해 가볍게 손을 한번 흔들고 바로 몸을 돌려 달렸다.

쿠아아아앙-

거친 엔진음과 충돌음이 빠르게 가까워진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소리와 진동만 들어도 정체가 감이 왔다!

천문석은 단숨에 도로를 달려 군인들이 대피로를 만드는 곳으로 달려갔다.

혼이 나간 얼굴로 달려오는 피난민들.

점점 커지는 진동과 굉음!

곧 무전기를 들고 분통을 터트리는 소위가 보였다.

“야! 미친 새끼야! 통과 못한다고! 잘못하면 붕괴한다! 내려! 전원 하차시켜서 걸어서 이동해!”

=……

“뭐!? 국회의원! 시발놈아! 성수대교에 모여든 시민이 수만 명이 넘어! 그냥 진입하면 발포한다! 당장 멈춰!”

=……

천문석은 소위를 지나쳐 자동차를 밟고 뛰어올랐다.

“……엇! 가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다급한 외침을 뒤로하고 몇 대의 자동차를 밟고 뛰어 멈춰 선 트레일러 위에 올라가자 시야가 트였다.

중랑천 방향 도로!

진동을 듣는 순간 짐작했던 그게 있었다.

전차!

전면에 철판을 붙인 전차 세 대가 버려진 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를 뚫고 달려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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