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455화 (456/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55화>

2000년 1월 1일 새해 첫해가 비추는 북한산.

광화문 게이트에서 쏟아진 상급 마수와 몬스터, 거대 괴수 대부분이 북한산으로 밀려 왔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계곡과 능선, 봉우리마다 마수가 울부짖고 몬스터가 무리 지어 달렸다.

그리고 그 자체로 산봉우리 같은 야수형 거대 괴수가 몸을 일으켜 울부짖었다.

크아아아, 아, 아, 아-

거대 괴수의 무시무시한 포효가 끝없이 메아리치자.

쿠릉, 쿠르르릉-

곳곳에서 돌과 흙이 굴러떨어지고 산이 울었다.

이때 능선 위로 거대한 불꽃의 날개가 드리워졌다.

재의 기사!

화르르륵-

불꽃의 날개가 남은 어둠을 사르고 여명 아래서 빛날 때.

재의 기사는 능선을 달려 거대 괴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재의 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거대 괴수의 포효가 뚝 끊기고 고통스러운 울음이 메아리쳤다.

크어어어, 어, 어, 어-

포효하던 거대 괴수가 거짓말처럼 골짜기에 쓰러져 발버둥 치고 있었다.

거대 괴수의 발버둥에 지진이라도 난 듯 산이 요동치고 거대한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나무가 무더기로 쓰러졌다.

이 모습을 무겐다흐 아리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고 있었다.

저 거대 괴수들은 타대륙 북부 고대신들의 대지에 사는 존재들이다.

저 거대 괴수는 마도사 위에 오른 전투 마법사와 경지에 오른 기사 수십 명이 있어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런 거대 괴수가 단숨에 무력화됐다!

거대 괴수 몸 위를 타다닥- 열심히 달리며 콰득, 콰득- 무는 시늉을 하는 저 새끼 다람쥐 한 마리한테!

차원 용병!

황금빛 갑옷을 입은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차원 용병의 엄청난 힘을 밤새 몇 번이나 봤지만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

이때 폭음이 터졌다.

파아아아앙-

거대 괴수의 몸에서 황금빛이 폭발하듯 솟구쳐 긴 포물선을 그리며 능선 너머로 떨어졌다.

끼이이이, 이, 이 ,이-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마수와 몬스터 무리가 무너지는 파도처럼 산을 달려 도망쳤다.

곧 사방에서 포효가 울리고 굉음이 터지고 산사태가 일어났다!

북한산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마수와 몬스터, 거대 괴수, 차원 용병, 재의 기사가 모두 이곳 북한산에 밀집했다!

마력은 의지에 반응한다.

광화문 게이트에서 쏟아진 엄청난 마력장이, 이 밀집한 존재의 의지에 반응해 현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북한산 지역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며 융기하고 곳곳에서 물이 치솟는다!

쿠르르르릉-

계곡을 타고 쏟아져 내린 엄청난 물이 능선을 타고 모이더니 곧 북한산에 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거대한 산악 지대에 생겨난 강이 서울로 쏟아져 내려갔다.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차원 용병은 지형마저 변화시키고 있었다!

“와! 진짜 명불허전이네요. 차원 용병 장난이 아닌데요?”

에코가 감탄하는 순간.

무겐다흐 아리엘은 어이가 없었다.

“에코!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과거를 이렇게 바꾸면 어떡해!? 나비 효과 생기면……!”

“괜찮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아요. 아니지, 어쩌면 이 세계에선 바뀔 수도 있는데……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뭐? 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하라니까!”

아리엘이 에코의 멱살을 잡고 흔들 때.

쐐애애액, 쾅, 쾅, 쾅-

음속 폭음이 근처에서 터졌다.

그리고 확 쏟아지는 찬란한 황금빛!

아리엘과 에코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가 근처 하늘을 날고 있다!

아리엘은 몸을 움츠리며 에코에게 확인했다.

“야, 이 동굴 진짜 괜찮은 거야? 정말로 안 걸리는 거 맞아? 저놈들 엄청나게 끈질겨! 한번 뒤에 붙으면 어디까지 도망쳐야 할지 몰라!”

에코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먹튀한 게 알려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은신처예요! 상대가 차원 용병이어도 절대 안 걸려요!”

아리엘은 문득 주위를 살폈다.

거대한 암반을 파고 들어가 만든 커다란 인공 동굴.

벽과 입구에는 환영, 은폐, 인식 저하 마력회로가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얼핏 봐도 공들여 만든 은신처란 걸 알 수 있었다.

이 은신처 안쪽에선 마도 제국 강습 수송병 뱁새가 비스듬히 누워 무언가를 먹고 있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에코는 어느새 찰칵, 찰칵- 눈에 익은 시계 용두를 누르며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

아리엘은 애증 어린 눈으로 에코를 봤다.

-가문에서 독립해 마도구 공방을 차린 후 첫 직원.

-무게가 변하는 마법 무구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동료.

-케페니안 차원 좌표를 넘겨 파산하도록 설계한 범인.

-시간 오류 수정자란 정체불명의 조직의 일원.

-자신의 이름으로 케페니안 깡패를 고용한 사기꾼.

……

‘에코.’

에코 이 녀석을 다시 만나기만 하면 작살을 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실제로 명치를 아주 세게 쉴 새 없이 때려 줬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케페니안 차원 깡패를 피해서 에코와 같이 숨어 있는 처지였다.

마도 황제 폐하의 흔적을 찾으러 나섰다가 일이 꼬여 이렇게 돼버렸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부터 뭔가 계획대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하아-

아리엘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에코에게 말했다.

“야, 에코! 너 이해가 가게 설명 좀 해 봐.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에코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아리엘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든 걸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아리엘님도 저랑 같은 처지가 되세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지…….”

에코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빛이 맺혀 있는 마법봉으로 동굴 바닥에 네모난 사각형을 그렸다.

그리고 사격형 안과 밖에 이름을 적었다.

[세계]

[시간 오류 수정자]

“이 사각형이 세계입니다. 시간 오류 수정자는 이렇게 세계 밖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존재입니다.”

사각형 밖에 쓴 이름을 지우고, 사격형 안에 이름을 쓰는 에코.

“그런데 시간 오류 수정자가 이렇게 세계에 포함되면 그 자체로 변수가 돼버려서 관찰이 무의미해져요.”

순간 무겐다흐 아리엘은 에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깨달았다.

“관찰자 자체가 변수가 돼서 오류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이야?”

에코는 얼굴이 환하게 변해 끄덕였다.

“바로 알아들으시네요! 맞아요! 세계의 ‘비의’를 깨달아 세계의 본질에 새겨진 ‘금기’를 보게 된 존재는 ‘세계의 나무’에서 튕겨 나가게 됩니다!”

“비의, 금기, 세계의 나무? 마도 황제 폐하의 ‘비의’랑 ‘금기’? ‘세계의 나무’면 원대륙의 창세 신화?”

에코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탄성을 터트렸다.

“와! 역시 마도 명문 무겐다흐 가문! 아리엘님은 어떻게 말 만하면 바로 알아들으세요!? 이건 마도왕도 대부분 모르는 내용인데!”

“야! 나 무겐다흐 가문을 다시 일으킨 마도왕 무겐다흐야! 마탑 27개를 먹었던 무기제작자 무겐다흐! 황제 폐하 이후 첫 번째로 승천의 길을 오를 마법사! 당연히 이 정도야 상식이지!”

으하하하하-

아리엘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자랑을 하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앗! 이게 아니지! 그러니까 거기까지는 이해가 갔어! 그런데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저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는 왜 고용했고?”

에코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사실은 저 갇혔습니다.”

“갇혔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전에 차원 좌표 나한테 넘겼었잖아? 차원 도약으로 빠져나가면 되잖아.”

“힘이 별로 안 남아서 차원 도약은 불가능해요.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요.”

“근본적인 문제?”

“이게 간당간당하게 금기에 걸릴 것 같긴 한데…… 잠시만요!”

에코는 손가락을 회중시계 용두에 올리고 마법봉으로 동굴 바닥에 나무를 그려냈다.

쓱, 쓱, 쓱-

굵은 줄기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가 그려지고.

뻗어 나간 나뭇가지 중 하나가 둥글게 말려 원을 그려낸다.

그림이 완성되자 에코는 회중시계를 누르며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찰칵-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찰칵-

“이 둥글게 말려 있는 나뭇가지 위예요.”

찰칵-

“원래대로라면 이 나뭇가지가 쭉쭉 혼돈으로 뻗어 나가 경계를 만들어 내야 했는데.”

찰칵-

“이 나뭇가지가 어느 시점. ‘분기점’에서 불의의 사고가 터졌습니다. 결국, 나뭇가지가 뻗어 나가지 못하고 휘어서. 이렇게 원을 그리게 됐습니다.”

찰칵-

“이 원을 그리는 나뭇가지에서는 일반적인 차원 도약을 해 봤자. 다시 원을 그리는 나뭇가지 위로 돌아올 뿐입니다.”

찰칵-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고. 가장 쉽고 안전하게 빠져나갈 방법은 이겁니다.”

찰칵-

“세계의 나뭇가지가 원을 그리게 된 ‘분기점’! 이 분기점에서 빠져나가는 겁니다.”

에코는 둥글게 말린 나뭇가지의 시작점을 짚었다.

“그게 여기입니다!”

“야, 그렇게 짚어서 어떻게 알아!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아리엘이 어이없어하자.

에코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리엘님이 이미 가 본 장소입니다. 언제 넘어갈지 시간도 아마 들으셨을걸요?”

“뭐?”

반문하는 순간 아리엘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 정신을 차린 장소!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빌딩.

에코가 만든 마법 회로가 새겨진 옥상!

에코는 뭔가 알아챈 아리엘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떨어지셨던 광화문 빌딩 위. 거기 맞습니다.”

에코는 품 안에서 가죽 수첩을 꺼내 흔들었다.

“이미 만나셨죠? 김철수 발명가님. 그분이 ‘분기점’입니다. 그분이 열어 줄 도약 통로가 유일한 출구입니다.”

“뭐!?”

아리엘은 반사적으로 말했다.

“야, 그냥 20년을 버티면 2020년 갈 수 있잖아!?”

에코는 어쩐지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네요. 제 친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는 스케일이 장난 아니었죠. 와! 천 년. 천 년을 버텨서…….”

아리엘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엉뚱한 데로 빠지지 말고! 20년 버텨서 2020년 미래의 우리가 이곳으로 온 그때로 가면 되는 거잖아? 최악의 경우라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하면 시간 역설은 생기지 않잖아.”

에코는 고개를 젓고 바닥에 그려진 쭉 뻗어 나간 나뭇가지를 마법봉으로 짚었다.

“여기가 이렇게 쭉 뻗은 세계였으면 그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이렇게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에요.”

에코의 마법봉이 나뭇가지가 휘어져 원을 그린 곳으로 움직였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하면 이렇게 됩니다.”

쓰윽-

휘어진 나뭇가지가 만들어 낸 원 위에 마법봉으로 원을 그리는 에코.

“……?”

아리엘은 처음에는 에코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에코는 마법봉을 멈추지 않고 계속 원을 그렸다.

쓰윽, 쓰윽, 쓰윽-

휘어진 나뭇가지가 만들어 낸 원이 점점 커져 다른 나뭇가지와 뒤엉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세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닫힌 공간!?”

아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긴 닫힌 공간. 시공의 감옥입니다. 저랑 제 파트너. 그리고 이곳에 떨어지신 네 분과 서리 늑대까지 모두가 ‘오류’예요. 저희가 계속 이곳에 있으면.”

쓰윽, 쓰윽, 쓰윽-

에코는 빠르게 원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 원이 점점 더 커져서 한계를 넘어가는 순간. 세계의 나무 약 15% 정도가 붕괴합니다.”

아리엘은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리로 에코와 바닥에 그려진 세계의 나무를 번갈아 봤다.

이때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분기점에서 시작해 휘어져 다시 분기점으로 돌아오는 수백 개의 원.

-여전히 보석 가면을 쓴 채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에코.

-이 세계를 부른 시공의 감옥이란 말.

어느새 무겐다흐 아리엘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

아리엘은 문득 고개를 들어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에코를 봤다.

“너 이 세계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