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54화>
천문석은 장철 가족을 다시 봤다.
환하게 웃는 아이.
아이를 달래는 장철.
석궁을 챙기는 장민.
장철, 아이, 장민. 세 사람과 자신 사이에서 깊은 인연이 느껴졌다.
2020년 부산 던전 7층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1999년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 서울로 떨어졌다.
그리고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젊은 장철과 장민 그리고 장철의 딸을 만났다.
“…….”
이 모든 것에서 거대한 인과의 흐름이 느껴졌다.
천문석은 문득 창밖 밤하늘을 바라봤다.
무심한 하늘은 천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인과는 사람의 인지로는 헤아릴 수 없다.
전생의 스승님을 따라 서쪽으로 여행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동전의 앞 뒷면일 뿐이니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휩쓸리지 말아라.’
‘인과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단지 굳세게 살아가라.’
스승님은 신선 같은 얼굴로 말하고는 천문사(天問寺), 마도 18문의 일문을 자신에게 물려주고 떠나가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도 18문에 입문하여 얼마나 황당하였던가?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이 맞았다.
고아 소년이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가 됐다.
하늘이 지어 낸 인과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잃은 아버지에게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휩쓸리지 말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천문석은 결심했다.
자신은 천마(天魔).
역천(逆天)의 무공, 천마신공으로 극에 달했던 존재다.
과거를 바꿔 미래를 변화시키는 것 정도는 천마신공으로 순리를 거슬러 극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문석은 눈앞의 장철과 장민, 아빠에게 매달리는 아이를 보며 마음으로 말했다.
‘특급 헌터. 내가 사촌 누나를 만들어 주마!’
* * *
“아빠 완전 거짓말쟁이! 치킨 어디 있어!”
아이가 다시 한 번 치킨을 외칠 때.
장민이 안방에서 커다란 배낭을 끌고 나오며 말했다.
“오빠 짐 챙겨놨어.”
“뭐!?”
아이를 달래던 장철은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장민은 두꺼운 옷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멘 채로 석궁과 부엌칼 창을 들고 있었다.
장민은 이미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냈다.
“너…… 그게 다 뭐야? 그 석궁은 또 뭐고?”
“아, 이거? 세찬이네서 빌려 왔어.”
“세찬이네? 옆집 세찬이네?”
“어. 이 석궁 세찬이네. 아버지 취미야. 그보다 어서 이 배낭 받아.”
장민은 장철에게 배낭을 건네주고 바로 조카에게 말했다.
“고모가 말한 거 다 준비했어?”
“네! 다 준비했습니다!”
씩씩하게 외치면서 유치원 배낭을 보여 주고 들고 있는 곰 인형을 보여 주는 아이.
“곰곰이도 여기 있어!”
“준비 잘했는데 얼굴 춥겠다. 들어가서 옷 하나 더 입고 마스크랑 모자 쓰고 나와.”
“알겠습니다!”
아빠를 조르던 아이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힐끗 방문을 본 장민은 장철에게 말했다.
“오빠. 빠져나가자. 여기선 오래 버티기 힘들어.”
“밖에 정말 위험해. 군부대가 구조를 시작했는데. 그냥 집에서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
장철이 망설이는 순간 장민은 천문석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목소리만 들어도 오빠와는 생각이 다른 걸 알 수 있었다.
과연 어려도 장민 대표!
장민은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방금 싸웠을 때도 느꼈지만 감, 근성, 행동력, 상황 판단 모두 탁월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천문석은 배낭에서 지도책을 꺼내 손전등으로 비췄다.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는 여깁니다. 장철님. 아내분은 어디에 계시죠?”
“여기예요.”
장민이 잠실에 있는 한 병원을 손으로 짚었다.
‘서울중앙병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차로 이동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많은 주택가는 몬스터를 계속 끌어들일 거고요.”
“방법이 있나요?”
장민과 장철의 시선이 모여드는 순간.
천문석은 지금 있는 곳 근처에 있는 한강을 향해 남쪽으로 길게 뻗은 하천을 짚었다.
‘중랑천.’
“중랑천을 타고 한강과 만나는 서울숲까지 내려가 성수대교를 건너는 겁니다. 성수대교 너머 압구정으로 들어가면 일단은 안전할 겁니다. 군부대가 다리를 통제해서 한강 이남에는 아직 몬스터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밖은 아이에게 위험할 텐데. 집에서 버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해 뜨는 걸 기다려서 움직이는 게…….”
장철이 아이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며 망설이자 장민이 고개를 젓고 설득을 시작했다.
“빨리 한강을 넘어서 후방으로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새언니도 찾아야 하고…….”
천문석은 장철의 생각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마수와 몬스터와 싸운 장철 입장에서는 위험한 밖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걸 망설이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민방위 대피소에서 사람들을 구한 군인들까지 봤으니 이제 곧 구조대가 올 거로 생각할 거다.
아파트 13층은 현대의 성채, 벙커나 마찬가지다. 전기, 수도만 끊기지 않으면 일주일 정도는 몬스터 상대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날이 밝으면 1월 1일, 내일은 1월 2일이다.
1월 2일이 지나면 언제 EMP 마력 폭풍이 몰아칠지 모른다.
서울에 EMP 마력 폭풍이 터지는 순간 전자기기와 화약 무기는 무력화되고, 군은 엄청난 타격을 받고 경기도까지 밀려난다.
그때가 되면 아파트는 안전한 벙커가 아닌 감옥이 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군대는 경기도에 전선을 펼치고 다시 서울을 수복하려 하지만 전국에 게이트가 열리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다.
긴 게이트 전쟁이 시작되는 거다.
그때가 되면 서울을 벗어나 안전지대까지 피난 가는 건 몇 배나 힘들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어른보다 아이가 더 버티기 힘들 거다.
지금 장철 가족에게 최선은 가능한 한 빨리 한강을 건너 안전지대 ‘제주도’로 가는 것.
차선은 게이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락되지 않는 ‘부산’으로 피난하는 거다.
장철 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자신이 할 일이 그거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었다.
천문석이 어떻게 장철을 설득할지 고심할 때.
장철을 설득하던 장민의 말투가 변했다.
“여기서 당장 빠져나가야 해. 아파트 현관 언제 뚫릴지 몰라. 밖에 괴물들 모여들기 전에 강도질하러 들어온 사람들 있었어.”
“강도질이라고!?”
장철이 놀라자 장민은 석궁과 부엌칼 창을 툭 치고 베란다를 가리켰다.
“정전되기 전에 앞 동에 무장한 사람들이 들어갔어. 이 석궁이랑 창 그래서 준비 한 거야.”
“…….”
장철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할 때.
천문석이 끼어들었다.
“지금은 우선 피할 때가 맞습니다. 혹시 부산이나 제주도에 연고가 있으십니까?”
“네? 부산, 제주도요?”
장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장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차고 있던 허리 가방에서 비행기 표를 꺼냈다.
“내일, 아니 이제 오늘이네요. 오늘 제주도행 항공권 있어요. 이것도 준비했고요.”
뒤이어 꺼내놓는 약간의 현금.
그러나 서울수복 작전이 성공하고 군과 헌터들이 대반격을 시작하려면 5년은 걸린다.
“5년은 버텨야 하는데 그걸로는 모자랄 것 같네요. 혹시…….”
툭, 투둑-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수건에 쌓인 수십 개의 금반지와 목걸이, 시계가 쏟아졌다.
“너 이게 뭐야?”
장철이 깜짝 놀라자 장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현관을 가리켰다.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손전등을 현관에 비췄다.
말라붙은 핏자국과 수십 개의 발자국!
“…….”
장철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할 때.
장민은 무덤덤한 어조로 배낭을 열며 말했다.
“강도들 우리 집에도 들어왔었어.”
열린 배낭 안에는 만 원권 지폐 다발이 몇 개나 들려 있었다.
“…….”
더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아파트의 철문이 몬스터는 막아도 사람은 막을 수 없었다.
천문석과 장철, 장민 그리고 아이는 바로 아파트를 빠져나와 중랑천으로 이동했다.
* * *
중랑천 주위 도로는 한강을 향해 무리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사람들은 어슴푸레하게 밝아지는 중랑천 변을 걸으며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중랑천에는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로 너머 멀리 주택가에선 비명과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라 주저앉고 경기라도 들린 듯 몸을 파르르 떨고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차량이 정체되자 하나둘 버려진 차로 간선도로는 완전히 막힌 상황.
차에서 나와 맨몸으로 걷는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이때 자전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릉, 따릉-
문득 고개를 돌리자 자전거 3대가 바짝 붙어 달려왔다!
천문석과 장철, 아이, 장민으로 이뤄진 일행이었다.
“지나갑니다!”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눈빛이 변한 사람들이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
“저 좀 태워 주세요!”
“한강까지만 데려다주세요!”
“거기 그 자전거 내가 살게!”
“한 대! 자전거 한 대만 파세요!”
……
자전거 경로를 막으며 다급히 외치는 사람들.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겪은 일이다.
천문석은 대답 없이 손을 휘저었다.
후우우웅-
손에 들린 강철봉이 위압적으로 휘둘러지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밀려났다.
으아악-
이때 눈이 돌아간 몇몇이 강제로 자전거를 멈추려는 듯 악을 쓰며 밀고 들어왔다.
천문석은 옷소매를 낚아채 던졌다.
허수아비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사람들!
날아간 사람들이 달려드는 사람들과 뒤엉켜 쓰러지며 곧 길이 열렸다.
“바짝 붙어요!”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장민과 장철이 탄 자전거가 바짝 뒤로 붙었다.
아파트를 나와 여기까지 중랑천을 달리면서 몇 번이나 했던 일이다.
자전거 세 대는 능숙하게 가속해 쓰러진 사람들을 지나쳤다.
“잠깐만!”
“좀 태워 주세요!”
몇몇 사람이 크게 소리치며 달려왔지만, 곧 떨어져 나갔다.
컹, 커엉-
이때 제방 위 도로를 달리던 서리 늑대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익-
천문석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고 외쳤다.
“우리 괜찮아! 다른 놈들 새어 들지 못하게 위에서 그냥 달리기만 하면 돼! 싸울 필요는 없어!”
서리 늑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달려갔다.
이때 장철이 착잡한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장철은 뒤엉켜 쓰러진 사람을 보며 짧게 한숨 쉬다가 포대기에 싸인 채 가슴에 안겨 잠든 아이를 봤다.
자전거로 중랑천을 달리며 장철의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장철은 타인에게 속아 미끼로 버려지고, 마수와 몬스터와 몇 번이나 싸웠으면서도 어떻게든 타인을 도우려고 했다.
그건 가족과 다시 만나 아이를 품에 안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어쩌면 장철이 큰 후회를 하게 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철에게는 내 사람을 지키는 명확한 선이 없기에, 무른 구석이 있었다.
이건 개개인이 타고나는 품성이기에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정보를 줘야지?’
천문석이 장철을 보며 고민할 때.
장민이 자전거를 붙이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까 말한 건 무슨 뜻이세요?”
“아까 한 말?”
“부산이나 제주도에 연고가 있냐는 말이요. 거기는 안전한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장민은 뚫어지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거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하는 거지…….’
천문석이 고심할 때.
장민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까 이 괴물들을 몬스터라고 부르고. 제주도, 부산에서 5년은 버텨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혹시 뭔가 알고 계시나요?”
장민의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천문석은 고개를 돌려 장철과 아이, 장민을 봤다.
장철은 곧 각성해 1세대 헌터가 되고 빠르게 강해질 거다.
그러나 아직 마음에 명확한 선이 없고 무른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장민은 장철과는 달랐다.
직접 싸워봐서 알 수 있었다.
함정을 몇 겹으로 깔아두고 폭풍처럼 몰아치던 근성과 과감함!
집안에 들어온 강도를 역으로 털어먹는 냉철함까지.
아직 어린 장민은 그 속에 단단한 심지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단단한 심지는 천문석에게 익숙했다.
아직 어린 장민에게서 먼 미래 장강 유통이란 대기업을 이룬 장민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장민 대표는 몇 개의 정보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수완을 보여 줬다.
‘어린 장민이 미래를 알게 된다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미래를 바꾸기로 했다.
그렇다면 장민에게 가족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정보를 주는 거다!
그렇다고 모든 정보를 알리면 어떤 나비 효과를 일으킬지 감당이 안 된다.
게이트 전쟁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마음의 결정을 한 천문석은 생각을 정리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나타난 괴물들이 몬스터다. 군대는 곧 낙동강까지 밀려날 거다.”
……
2000년 1월 1일 아침 해가 뜨는 중랑천.
천문석은 어린 장민에게 앞으로 일어날 게이트 전쟁의 정보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