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40화>
1999년 12월 31일 11시 57분.
최초의 게이트 광화문 게이트가 열리기 3분 전.
게이트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는 모두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천문석은 생각지도 못한 초대박에 웃음을 터트리며 서리 늑대와 산길을 달렸다.
대박이다. 초대박! 나이트 아머라니! 와! 이름 모를 분! 충성충성충성! 감사감사, 캐감사입니다! 카캬카.”
-레이 실트는 경복궁에 마도 황제 폐하 추적법을 사용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으며 기다렸다.
“이 탕수육 진짜 맛있네! 우리 내일도 이거 먹자!”
-추이린은 복잡한 얼굴로 빌딩 아래 광화문에 모인 인파를 바라보다가 한숨 쉬었다.
“와, 이 정신 나간 녀석! 야, 2분 후면 게이트 열리고 서울이 난장판 돼! 탕수육 같은 소리 하네!”
-김철수 발명가는 여의도 아파트 계단에 앉아 부인과 아이를 한번 볼까 말까 망설였다.
“……20년 동안 숨어지내야 하는데. 슬쩍 얼굴이라도 볼까?”
-마법사는 여의도 아파트 옥상에 숨어 김철수 발명가를 주시하며 초대형 뱁새에게 지시했다.
“야, 곧 게이트가 열린다! 긴장해! 시계 회수하면 바로 움직여야 한다! 이번 임무는 진짜 위험하다!”
-초대형 뱁새는 당연히 데굴데굴 굴러 멀어지며 지시를 씹었다.
-……
-재의 기사는 어느새 명동을 지나 인파가 가득한 광화문 광장 초입에 도착해 인파를 몇 번이나 뚫고 들어가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멈춰 섰다.
[…… ]
광화문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꽉 막힌 종로 3가 도로 위 자동차 한 대가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있었다.
조수석에 완전히 식어 버린 치킨과 떡볶이, 순대가 담긴 봉지가 놓아두고.
운전석에 앉아 허탈한 표정으로 도로에 가득한 차를 보는 남자.
장철이었다.
“어떻게 종로 3가까지 막혀……?”
밀레니엄 축제로 도로가 막힐 것을 예상해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도 차가 완전히 막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차를 두고 나올걸.”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겠다는 아이와의 약속.
9시까지는 집에 간다는 동생과의 약속.
11시까지는 꼭 도착할 거라는 아내와의 약속까지.
아이, 동생, 아내와의 약속 모두 지키지 못했다.
거짓말쟁이 아빠, 오빠, 남편이 된 것이다.
장철은 휴대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했다.
딸깍-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받는 전화.
“……너무 늦었지? 미안해. 지금 가고 있는데 도로가 완전히 막혀서 더 늦을 것 같아.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댔는데. 종로 3가 도로까지 완전히 막혔어.”
=회사 일이 지금 끝난 거예요? 당신 저녁은 먹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간단히 먹었어. 김 교수님이 연락이 안 돼서. 김 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 밟는 한호석 씨랑 연락해서 간신히 처리했어. 애는 어때? 늦었다고 화 많이 났지? 지금 시간이면 자고 있으려나?”
힐끗 본 시계는 11시 57분.
치킨을 기다리고 있어도 평소 잠이 많은 아이가 깨어 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순간 깜짝 놀란 외침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앗! 깜빡 잠들었잖아!? 전화!? 엄마! 아빠지!? 아빠가 전화했지! 나 얼른 바꿔 주세요!
다다다다닥-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전화기 너머에서 쏟아지는 아이 목소리.
=나 당연히 깨어 있어! 화도 엄청엄청 났어! 거짓말쟁이! 해지기 전에 온다고 했잖아! 오지 마! 이제 아빠 하나도 안 보고 싶어!
아이의 화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순간.
장철은 웃음을 삼키며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로 아빠 가지 마? 맛있는 치킨 3마리나 있는데…… 그럼 치킨은 어떡하지?”
=앗! 치킨! 엄마! 고모! 뭐라고 대답해야 해? 아빠가 맛있는 치킨 3마리나 샀데! 쓰읍-
아이의 침 삼키는 소리와 동생과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떡볶이랑 순대도 있어?
“당연하지! 오소리감투랑 염통도 많아!”
신나는 웃음소리와 씩씩한 외침이 들려왔다.
=히히힛, 치킨은 죄가 없어! 아빠 엄청 보고 싶어! 조심해서 와!
“알았어. 아빠가 치킨 가지고. 빨리 집에 갈게.”
=안 돼! 아빠! 절대 ‘빨리’ 오면 안 돼!
“……빨리 오지 말라고?”
=선생님이 10분 먼저 가려다가 10년 먼저 가는 거랬어. 천천히 안전하게 와야 해! 알았지? 나랑 약속해! 꼭꼭 안전하게 온다고!
“…….”
몇 번이나 천천히 안전하게 가겠다고 거듭 약속을 하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장철은 멈춰 선 자동차 안에서 미소 지었다.
아이는 너무나 빠르게 자라난다.
처음 옹알이를 하고 첫걸음을 뗀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유치원에서 배운 교통안전 표어로 아빠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렇다.
10분 먼저 가려다가 10년 먼저 가면 절대 안 된다.
자신은 가장이니까.
동생과 아이가 사회에 나가 자리 잡을 때까지 든든하게 지켜 줄 가장.
오래오래 열심히 일해 아내, 아이, 동생이 가지고 싶은 모든 걸 사주고,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거다.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장철은 꽉 막힌 도로에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며 라디오를 켰다.
[…… 밀레니엄 특집 생방송 중입니다. 밀레니엄까지 이제 1분 남았네요. 청취자분들 모두 새천 년 맞이 소원 준비해 주세요. 바로 밀레니엄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60, 59, 58…… ]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순간.
장철은 힐끗 대시 보드에 놓인 시계를 봤다.
11:59분.
이제 곧 세기말로 혼란스러웠던 1999년이 끝나고, 기대 어린 새천 년 2000년이 시작된다.
하지만 1999년은 장철 인생 최고의 해였다.
방이 셋이나 되는 전셋집으로 이사해 첫 가족 여행 계획을 짰던 해.
아내, 아이, 동생.
가족 모두가 즐거워한 한 해.
당연히 새천 년 맞이 소원으로 말할 건 하나뿐이다.
마음속으로 소원을 생각하고.
[5, 4, 3, 2…….]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장철은 백미러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소원을 말했다.
“2000년도 1999년과 같기를!”
[1, 0! 무사히 새천 년이 왔습니다! 당연히 Y2K, 공포의 대왕 같은 건 없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하하-]
라디오에서 웃음소리가 터지는 순간 커다란 폭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펑, 펑, 펑, 펑-
그리고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오색의 빛!
광화문에서 쉴 새 없이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 폭죽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경적과 환호성.
빵, 빵, 빠아앙-
도로에 가득한 자동차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우와아아아아아-
꽉 막힌 도로에 멈춘 자동차와 인도에 가득한 사람들이 폭죽이 터지는 광화문 하늘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장철도 운전석 창을 열고 광화문 하늘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1999년 고마웠다!”
이때 광화문 하늘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타원형의 빛이 나타나 수백 발의 폭죽 불꽃을 삼키고 밤을 낮으로 바꿨다.
그리고 1초도 안 돼 픽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섬광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빛으로 만들어진 커튼!
직접 보는 건 대부분 처음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이름.
“오로라!”
누군가 외치는 순간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어느새 밤하늘에는 북극권에서나 볼 수 있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오로라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 폭죽으로 오로라를 만들어 낸 거야!?”
“이야! 한국화약 장난 아니네!”
“와! 이거 어떻게 한 거야!?”
……
사방에서 환호성과 들뜬 목소리가 쏟아질 때.
아무 전조 없이 하늘에 펼쳐진 오로라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에 유리창이 모조리 박살 나고 뒤이어 거대한 충격파가 밀려 왔다.
으아악-
인도와 도로에 멈춰 선 사람이 사방으로 나뒹굴고.
콰드드드득-
가로수가 부러질 듯 휘고 가로등이 뽑혀나가 도로 위로 굴렀다.
쿵, 쿵, 쿵-
꽉 막힌 도로 위에 멈춰 선 차량이 충격파에 밀려나 서로 충돌할 때.
끼이이잉-
몇몇 차량이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고 질주했다.
콰앙, 쿵, 콰앙-
충격파가 덮치는 중에 차량이 연쇄 충돌해 사방에서 비명과 충돌음이 쏟아졌다.
부아아앙-
이때 트럭 한 대가 불쑥 튀어나와 장철이 타고 있는 자동차를 들이박았다.
쿠아아앙-
단숨에 연석을 타고 인도로 올라가는 자동차!
“위험합니다! 피해요!”
장철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다급히 외칠 때 인도에 멈춘 유모차가 보였다.
으아악-
장철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오른쪽으로 급회전하는 동시에 자동차가 부러진 가로등을 밟고 튀어 올랐다.
순간 자동차 앞에 나타난 철제 셔터!
빙글 180도 회전한 자동차가 철제 셔터를 뚫고 가게 안으로 처박혔다.
콰아아앙-
자동차 엔진룸이 찌그러들고 충돌의 충격이 차 안으로 쏟아졌다.
단숨에 새하얀 금이 가는 창문.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에어백.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집기.
퍽-
에어백에 머리를 들이박는 순간.
충격파가 안전벨트를 한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콰아앙-
시야가 어두워지고 의식이 흐릿해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시야에 얼핏 보이는 게 있었다.
백미러에 걸린 가족사진!
이때 얼굴을 때리는 게 있었다.
철퍽-
순간 얼굴을 흐르는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차게 식은 떡볶이 봉지가 터져 얼굴에 쏟아졌다.
으아아악-
장철은 악을 지르며 몸에 힘을 줬다.
흐릿해지던 의식이 돌아오고 간신히 손이 움직인다.
안전벨트부터!
턱, 턱-
그러나 안전벨트는 고장이라도 난 듯 풀리지 않았다.
으아악-
악을 쓰며 강제로 몸을 빼내려 하지만 찌그러진 문과 안전벨트가 몸을 내리누르고 있다.
이때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대시 보드!
재빨리 팔을 뻗어 대시 보드를 여는 순간 튀어나오는 묵직한 대검!
바로 대검을 잡고 안전벨트를 잘라 내려는 순간.
크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포효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울려 퍼진 적 없는 거대 괴수의 포효!
거대 괴수의 포효가 유전자에 각인된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충격파에 나뒹굴다가 간신히 일어나던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사람들을 도우러 달려 오던 사람들이 주저앉아 공포에 전신을 덜덜 떨었다.
대검을 잡은 장철도 머리가 하얗게 변해 경직됐다.
덜덜덜 떨리는 손!
툭-
힘이 빠진 손에서 대검이 떨어지는 동시에 시야가 어두워지고 의식이 급격히 흐려졌다.
이때 백미러에 걸린 가족사진이 보였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가족사진.
흐어, 흐어어-
다시 한 번 악을 써 보지만, 덜덜 떨리는 몸에선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크아아아아아-
이때 다시 한 번 포효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시야에서 가족사진이 사라지는 순간.
장철은 뒤집힌 차 안에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