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32화>
부르르르-
회사 인근 주차장에 가까워질 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장철은 슬쩍 고개를 돌려 화면을 봤다.
[게임폐인]
바로 스피커폰을 켰다.
“게임폐인? 너 웬일이야? 취직할 때까지 연락 안 한다며. 뭐 좋은 소식 있냐?”
=흐흐흐- 그래! 형님이 드디어 취직했다! 내가 쏠 테니까. 강철해머 너도 와라! 너 종로에 Y2K 피시방 알지? 우리 길드 애들 오늘 모두 여기서 모이기로 했다. 벌써 모인 애들도 많아. 자, 들어 봐!
휴대폰 너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얼굴 좀 보여 주세요!
=오빠! 목소리 너무 멋있으세요!
=맞아요! 오빠 얼굴도 너무 보고 싶어요!
=형! 솔직히 장비처럼 생겨서 정모에 한 번도 안 나온 거죠!?
=하긴 이 형 아이디부터가 ‘강철해머’ 잖아?
=강철해머형 분명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게 생겼을 거라니까!
=하하하, 흐흐흐, 크흐흑-
……
길드원들의 웃음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쏟아지고 곧 전화를 건 게임폐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지? 망년회 겸해서 길드원 전부 내일 새벽까지 마실 거니까. 너도 꼭 와라.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 받아서 나 완전 부자야! 강철해머 진짜 얼굴 좀 보자!
“나 진짜 안 돼. 내일 가족 여행 가서 오늘 집에 바로 들어가야 한다. 휴가 끝나는 날 보자.”
=가족 여행이면 어쩔 수 없지. 휴가 끝나면 바로 연락해라! 형님이 크게 한턱 쏜다!
“알았다. 하하하- 거하게 얻어먹을게. 그럼 그때 보자. 게임폐인.”
=야, 이제 이름으로 불러! 어, 생각해 보니 이름을 모르네. 강철해머 너 이름 뭐냐?
그러고 보니 오랜 시간 게임을 같이한 길드원들에게 아직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장철은 가볍게 대답했다.
“장철이다.”
=뭐? 야, 강철해머 본명이 장철이래! 이 녀석 ‘장‘씨였어! 너 진짜 장비 후손 아냐?
길드원들의 웃음과 환호가 다시 한 번 쏟아지고, 곧 게임폐인의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철. 휴가 끝나고 꼭 보자! 난 이태성이다. 앞으로 직장인 이태성이라고 불러라! 게임 폐인은 이제 끝이다! 하하하-
* * *
북한산 국립공원 관음암.
천문석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노을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1999년 12월 31일.
게이트가 열리기 전 마지막 날의 해 가!
초대형 뱁새에게 낚여 북한산 국립공원 깊은 곳까지 갔다가, 이곳 관음암까지 달려오는데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해 뜰 때 출발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 백운대에도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예상보다 몇 배나 시간이 더 걸렸다.
초대형 뱁새의 뒤를 쫓을 때와는 달리, 잘 정비된 등산로를 달렸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걸린 이유!
그 이유가 머리 위에서 소리를 냈다.
컹, 헥헥-
여전히 천문석의 등에 업힌 서리 늑대가 긴 혀로 머리카락에 날름날름 침을 묻히며 울었다.
척하면 척.
천문석은 바로 수통을 열어 서리 늑대의 입안에 물을 흘려 넣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이제 내려서 걷고 싶지 않아? 10시간이 넘게 업혀 왔잖아. 너 아까 조금만 더 업어 주면 걷는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스스로 걷는 게 어떨까?”
서리 늑대는 휙- 고개를 돌리더니, 몸에 힘을 빼고 죽은 듯이 축 늘어졌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표시!
서리 늑대는 천문석의 등에서 내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
천문석은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평소라면 버릇없는 서리 늑대에게 무자비한 전법륜인 딱밤을 갈겼을 거다.
그러나 등에 업힌 이 서리 늑대는 자신과 동료들이 2020년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 서리 늑대가 삐쳐서 ‘서리혼’을 안 내보내면, 자신과 동료들에게 남은 방법은 20년 존버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야 했다.
“앗! 생각해 보니까! 더 업고 가도 될 것 같아! 언제든 내리고 싶을 때. 달리고 싶을 때. 말해 줘!”
죽은 척 축 늘어졌던 서리 늑대는 바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컹-
서리 늑대의 대답과 함께 천문석은 다시 등산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저녁의 등산로에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산에서 내려가던 등산객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어?”
“저거 뭐야?”
“어, 어? 어!”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지더니, 곧 깜짝 놀란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흐어억! 저거 곰 아냐!?”
“늑대! 늑대가 나타났다!”
……
오늘 등산로를 달리며 하루 종일 몇 번이나 겪은 일이다.
천문석은 천천히 걸으며 능숙하게 외쳤다.
“늑대가 아니라 개입니다!”
“이 개 품종이 원래 좀 커요!”
“놀라지 마세요! 이거 그냥 큰 개입니다!”
“그리고 제 몸에 꽁꽁 묶여 있어서 안전합니다!”
깜짝 놀랐던 등산객들이 곧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그게 진짜 개라고!?”
“무슨 개가 사람보다 커?”
“이건 뭐. 개가 아니라 호랑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와, 이런 놈이 마당에 있으면 도둑은 근처에도 못 오겠어.”
“완전 늑대네. 늑대! 그놈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네!”
“그 개 얼마짜리야? 나도 한 마리 사고 싶은데.”
사람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서리 늑대를 바라보며 질문을 쏟아 냈다.
천문석이 적당히 대답할 때.
서리 늑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채고 보란 듯 고개를 우뚝 들고 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들려오는 질문.
“와! 이런 개는 처음 보네! 이놈 견종이 뭐라고?”
컹-
서리 늑대가 마치 대답하듯 우는 순간.
천문석은 주저 없이 몇 번이나 했던 대답을 했다.
“시고르자브르 종입니다.”
오오오-!
견종을 듣는 순간 탄성을 터트리는 등산객들.
“시고르자브르? 시고르자브르! 이놈 이름도 그럴싸하네!”
“이거 소련 개 아냐? 이름 뉘앙스가 딱 소련인데!?”
“몸 큰 거 봐서는 미국 같은데? 미국이 뭐든지 크잖아!?”
“어디가 됐든. 이 녀석 보통 개가 아니네! 와, 저놈 저거 송곳니 섬뜩한 거 좀 봐봐! 황소도 한 번에 물어 죽이겠어!”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감탄하는 등산객들.
서리 늑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탄을 알아듣고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울었다.
우오오오-
천문석에게 업힌 채로.
“이야! 울음소리도 장난이 아닌데!”
“이거 완전 늑대네!”
“맞아. 혼자 만났으면 호랑인 줄 알겠어!”
“앗! 이거 좀 먹어 봐라.”
감탄한 등산객들이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서리 늑대에게 음식을 먹였다.
날름날름 천연덕스럽게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서리 늑대.
“…….”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서리 늑대를 본 등산객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더 호의적이었다.
거대한 늑대를 보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음식까지 주고 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
어, 이런 반응이면 사람 피해서 북한산 등산로를 달릴 필요 없겠는데?
이거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은 안 돼도 택시는 태울 수 있는 거 아냐?
천문석은 걸음을 늦추고 지도책을 꺼내 살폈다.
지금 있는 곳은 도봉산 관음암 인근.
처음 계획은 사람들의 시선이 적은 북한산 등산로를 타고 백운대를 거쳐 형제봉에 가서.
게이트가 열리고 난장판이 됐을 때 북악산을 타고 경복궁, 광화문으로 가는 거였다.
그러나 일정이 지체되며 이 계획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졌다.
천문석은 지금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로를 찾았다.
관음암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원통사’가 그리고 산 아래 ‘우이동’이 나온다.
지도책 위 우이동에 놓인 손이 아래로 움직였다.
[쌍문동, 수유동, 미아동, 길음동, 동성동, 보문동, 신설동!]
신설동에서 멈춘 손이 지하철 1호선 라인을 타고 왼쪽으로 움직였다.
[신설동, 동대문, 종로 3가, 종각역!]
종각역에 도착하면 광화문은 순식간이다!
천문석은 이 순간 새로운 이동 경로를 짰다.
-서쪽 북한산 백운대, 형제봉이 아닌 남쪽 도봉산 원통사를 거쳐 우이동으로 내려간다.
-우이동에서 택시를 잡아본다.
-택시가 잡히면 바로 광화문으로 이동한다.
-택시가 안 잡히면 도로를 타고 신설동으로 내려가 지하철 1호선 라인을 따라 종각으로 달린다.
산길이 아닌 평지.
그것도 큰 도로를 따라 달리는 경로다.
길을 헤맬 리도 없고 당연히 이동시간도 확 줄어들 거다.
잘하면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광화문 빌딩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서리 늑대를 서울 시민에게 노출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등산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보니 한 마리라면 어떻게든 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문석은 바로 이동 방향을 바꿨다.
관음암 남쪽 원통사 그리고 우이동 방향으로!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천문석은 주위 등산객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앞에는 헌터용 배낭을 메고, 뒤에는 늠름하게 고개를 든 시고르자브르 종 서리 늑대를 업은 채로 등산로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천문석의 발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12월 31일 자정.
광화문 게이트가 열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1999년 12월 31일 18:00]
[새천 년맞이 국민대축제 - 광화문 2000]
거대한 전광판 시계 아래.
환하게 밝혀진 대형 간판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름 3미터가 넘는 인공조명이 거대한 기중기에 걸려 대형 간판 위로 옮겨졌다.
순간 광화문 도로에 모인 인파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
거대한 환호성이 광화문 거리와 빌딩을 뒤흔들었다.
광화문 거리에는 2000년 밀레니엄을 축하하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차를 막은 도로와 인도뿐 아니라 주변 건물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이 모습을 김철수와 추이린, 레이 실트가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영상으로 보던 거보다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데요?”
추이린의 말에 김철수 발명가는 인파를 가리켰다.
“아직이야. 점점 더 인원이 많아져서. 11시 넘어가면 이곳에 10만 명 넘게 모일 거다.”
“10만 명이요!?”
추이린이 상상 이상의 숫자에 깜짝 놀랄 때.
옥상 입구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어? 여기 원래 문 있지 않았어?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안 보이는데?”
“그러게? 이상한데?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인가?”
쿵, 쿵, 쿵-
몇 번 더 문을 두들기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곧 사라졌다.
밀레니엄 축제를 보기 위해 옥상으로 나오려는 사람들.
오늘 저녁부터 몇 번이나 겪은 일이다.
김철수 발명가의 시선이 레이 실트에게로 향했다.
“저 문 괜찮을까요? 인식 장애 마법은 무의식에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레이 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어. 인식 장애 마법뿐 아니라 다른 방법도 사용했거든. 저 문은 절대 안 열려!”
“다른 방법?”
추이린이 묻는 순간.
흐흐흐-
레이 실트는 음흉하게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저 문 반대쪽 입구. 내가 주위 벽이랑 똑같이 보이게 벽 패턴 떠서 문에 씌웠어!”
“게다가 저 철문이랑 문틀을 통째로 용접했다!”
“저건 이제 문이 아냐! 강철 벽이지!”
하하하-
레이 실트가 통쾌하게 웃는 순간.
추이린은 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이런 미친…… 훌륭한 녀석! 이번엔 철저하게! 제대로 했구나! 간만에 잘했다!”
“야, 간만이라니! 나 원래부터 엄청 철저한 사람이야! 문석이 걔가 사용하는 롱소드! 그거 만든 게 바로 나야!”
레이 실트가 의기양양하게 웃고.
추이린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김철수 발명가는 난간에 기대어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 세 마력 각성자들은 어느새 여유를 찾았다.
김철수 발명가는 옥상에 드러난 마법 회로를 살폈다.
서리 늑대를 찾으러 간 천문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마법 회로 조정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빌딩 옥상에 새겨진 마법 회로는 마치 이렇게 조정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더미 회로도 없이 최소한의 암호화만 돼 있었다.
당연히 마법 회로 조정은 빠르게 진행되어 내일 1월 1일 아침이면 조정이 끝날 것 같았다.
이제 강행군이 아닌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천문석이 데려올 서리 늑대를 기다리면 됐다.
다행이었다.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신의 사정 때문에 마법 회로 조정 작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제 1999년의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김철수 발명가는 문득 고개를 돌려 광화문 도로에 세워진 대형 전광판을 바라봤다.
[18:18]
게이트가 열리는 건 24시 00분.
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집에서 자신을 찾아 출발하는 건 새벽 1시쯤.
과거의 자신이 텅 빈 집에 도착하는 건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다.
즉, 자신이 오늘 반드시 해야 하는 일.
1999년 자신과 가족이 사는 집의 현관 벨을 누르고 그 앞에 가죽 수첩과 회중시계가 담긴 상자를 놓는 건 새벽 1시 이후에 하면 된다.
아직 오후 6시 18분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광화문에 인파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곧 지하철은 근처 역에 정차하지 않을 거다. 이미 버스와 택시, 차량은 통제선과 인파에 막혀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조금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이 뛰어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1999년의 가족을 먼발치에서나마 다시 본다는 생각에.
‘지금 바로 움직인다.’
김철수 발명가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추이린과 레이 실트를 향해 말했다.
“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 좀 비워야겠다. 게이트가 열리고 내일 새벽쯤에나 돌아올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