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431화 (432/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31화>

천문석은 바로 내력을 실어 외쳤다.

“야!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고 가!”

내력이 실린 외침이 하늘을 뒤흔드는 순간.

초대형 뱁새에게 잡힌 채 날아가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가면 쓴 얼굴이 나타나자 다시 마법 메시지가 들려왔다.

[모두 다 제대로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저도 위아래로 치이는 중간 관리직이에요. 하아-]

깊은 한숨 뒤로 어쩐지 처량함이 느껴지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괜히 세계의 비의를 깨닫겠다고 설쳐서는…….]

[적당히 잘 먹고 잘살 정도만 배우는 건데…….]

[집에도 못 가고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한참 동안 처량한 메시지가 이어지다가 마법사는 번쩍 고개를 들더니 메시지를 보냈다.

[세계는 나무입니다.]

[인과와 가능성을 이어 자라나는 거대한 나무.]

[과거를 바꿨다고 확정된 미래, 이미 자라난 나뭇가지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잇는 새 나뭇가지가 뻗어 나갈 뿐입니다.]

[이미 자라난 나뭇가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ㅁㅁ을 사는 화폐 ㅁㅁ. ㅁ대륙의 ㅁ. ㅁㅁ제국의 ㅁㅁㅁㅁ.]

[흐어억! 왜 벌써 금기가 걸렸어! 야! 빨리 구름! 구름 속으로 들어가! 급해!]

다급한 메시지와 함께 초대형 뱁새와 마법사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순간 구름 속에서 천둥벼락이 터졌다.

쿠르르릉, 쾅, 쾅, 쾅-

거대한 뇌전이 지렁이처럼 구름을 기어가며 쉴 새 없이 터지는 천둥과 벼락!

길게 이어지던 천둥벼락이 멈추는 순간.

구름은 어느새 흩어졌고 마법사와 초대형 뱁새는 사라졌다.

그리고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알아듣게 설명을 하라니까.”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자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중에 집히는 게 하나 있었다.

‘세계는 나무다.’

거대 사슴벌레의 등 위에 올라 신동대문 터널을 달릴 때 갑자기 나타났던 무한의 공간.

그 무한의 공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의 길이 뻗어 있었다.

그 순간의 심상을 떠올리자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의 길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나무.

세계의 나무.

마법사가 말한 ‘세계의 나무’가 이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뿐 다른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북한산 추격전이 끝났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고,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서리 늑대가 마력 파동에 삼켜졌다!

그래도 서리 늑대 한 마리가 남았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 이 서리 늑대를 데리고 원래 계획대로 광화문 빌딩 옥상으로 돌아가면 된다.

지금 시간은 12월 31일 07시 47분.

광화문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는 16시간 13분 남았다.

서리 늑대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탈 수는 없으니,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광화문까지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천문석은 머릿속으로 타이머를 맞췄다.

가능한 오늘 밤 자정,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돌아간다!

천문석은 배낭에서 철물점에서 산 대형견용 목줄을 꺼냈다.

목줄을 채우고 어떻게든 애완용 개라고 우기기.

이게 서리 늑대를 데리고 서울 시내를 가로지를 방법이었다.

천문석은 서리 늑대를 달랬다.

“이 목줄 잠깐만 차자. 사람들이 무서워해요. 광화문 도착하면 풀어 줄게. 알았지?”

목줄을 채우려는 순간 서리 늑대는 픽 쓰러졌다.

“야!? 너 왜 이래!?”

깜짝 놀라 확인하자 고른 숨과 맥박이 느껴졌다.

밤새 초대형 뱁새에게 잡혀 이동한 서리 늑대는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

천문석은 배낭을 앞으로 메고 밧줄을 꺼냈다.

그리고 서리 늑대를 밧줄로 고정해 등에 짊어졌다.

탄력 있는 털에 몸이 파묻히고, 거대한 서리 늑대의 무게가 몸을 짓누른다.

으아악-

기합을 지르며 일어나.

쿵, 쿵, 쿵-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며 천문석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광화문에 도착하면 밤이 아니라 새벽일 것 같았다.

즉, 게이트가 열린 후 난장판이 된 서울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은 있었다.

이제 서리 늑대에게 목줄을 채울 필요가 없었다.

오늘 밤 게이트가 열리면 수많은 마수와 몬스터가 도심을 달리고 거대 괴수가 빌딩을 때려 부술 거다.

서울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서울 시민들은 도심지에 나타난 서리 늑대를 봐도 놀라지 않을 거다.

바다에 강물 한 바가지 부어도 여전히 짠 것처럼.

마수와 몬스터로 난장판이 된 서울에서 서리 늑대가 달리는 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탄력 있는 털이 한겨울 칼바람을 막아주고, 자신을 개고생시킨 마법사가 상급 포션까지 줬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게 많았다!

12월 31일 아침.

쿵쿵, 쿵쿵-

천문석은 거대한 서리 늑대를 등에 업은 채 밝아오는 북한산을 달리며 외쳤다.

“긍정적 마인드!”

“나는 운이 좋다!”

“나는 대박을 낼 것이다!”

“나는 반드시 건물주가 된다!”

* * *

밝아오는 하늘 아래에서 천문석이 북한산을 달릴 때.

1999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금요일 아침이 시작됐다.

2000년 1월 1일 토요일.

모든 게 바뀔 순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때 김철수 발명가는 자판기 커피를 든 채로 난간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멍한 머리.

3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김철수는 자판기 커피를 들어 단숨에 마시고 난간 너머로 광화문 거리를 내려다봤다.

금요일 출근 시간의 광화문 거리에는 평소처럼 직장인과 학생들로 가득했다.

이 평범한 풍경도 오늘로 끝이다.

오늘 밤 자정이 지나고 2000년 1월 1일이 되면 모든 게 변한다.

“…….”

불쑥 마음속에서 치솟는 생각.

‘지금이라도 사람들에게 경고할까?’

그러나 1999년 12월 31일. 세기말인 지금 터질 듯 넘쳐 나는 게 종말론이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쏟아진다고 말하면 누가 귀를 기울일까?

생각과 동시에 쓴웃음이 지어지고 자신도 모르게 가죽 수첩을 꺼내서 펼쳤다.

마치 수백 년이 지난 듯 빛바랜 수첩 안.

수도 없이 겹쳐 써서 검게 물든 페이지가 보였다.

페이지 전체에 가로줄이 그어져 있고, 여백에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불가능]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탁-

김철수는 가죽 수첩을 닫고 몸을 돌려 옥상을 봤다.

쿵, 쿵, 쿵-

물결치듯 퍼져 나오는 은폐 마력장 아래.

정제 마석 수십 개가 박혀 있는 마법 회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레이 실트의 실력이 예상 이상이라 마법 회로 조정에 속도가 붙었다.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1월 2일 오전 중에 마법 회로 조정이 끝난다.

조정이 끝나면 천문석이 서리 늑대를 데려오는 순간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전에 오늘 밤 자정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김철수는 문득 고개를 돌려 광화문 빌딩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빌딩을 올려다봤다.

너무나 눈에 익은 빌딩, 1999년의 자신이 근무 중인 회사가 있는 빌딩이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남쪽을 바라봤다.

한강 철교 너머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이 있는 방향이다.

김철수는 손에 쥔 빛바랜 가죽 수첩을 다시금 봤다.

마침내 때가 왔다.

과거의 자신에게 이 ‘가죽 수첩’을 넘길 때가!

“으으으- 왜 이리 추워?”

이때 추이린이 덜덜 떨며 잠에서 깨어나는 게 보였다.

박스와 비닐, 신문지로 천막을 만들고, 바닥에는 두꺼운 스티로폼과 전기장판을 깐 임시 숙소.

하지만 추이린은 덜덜 떨고 있었다.

당연했다.

추이린은 이불과 전기장판을 돌돌 두른 레이 실트에게 밀려나 맨바닥에서 잠들어 있었으니까.

“이게 뭐야!? 와! 레이! 이 어이없는 녀석!”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추이린이 분통을 터트릴 때.

피식 웃은 김철수는 이미 차게 식은 자판기 커피를 뜨겁게 덥히며 걸어갔다.

“이거 마시면 몸이 좀 풀릴 거다.”

* * *

쿵, 쿵, 쿵-

이른 아침 동호 대교에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중한 발걸음 소리의 주인은 재의 기사였다.

재의 기사는 이제는 전혀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가려진 전신 갑옷.

머리엔 새마을 모자를 쓰고, 투구 위에는 수건과 천을 돌돌 둘렀다.

몸에는 담요를 두르고.

등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손에는 먹거리가 가득 담긴 검은 봉지까지 들려 있었다.

재의 기사의 변한 모습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광교산, 청계산을 거쳐 서초구를 지나 동호 대교를 건널 때까지 만난 수많은 사람의 작품이었다.

[…… ]

그리고 동호 대교 위를 걷는 재의 기사의 시선은 천천히 주위를 훑고 있었다.

부으으응-

도로를 달리는 강철의 마차들.

넓은 강에 놓인 거대한 다리와 드높은 성채에 밝혀진 불꽃들.

기억과 감정 모두 타 버리고 서약만이 남겨진 몸에서 불쑥 옛 기억이 치솟았다.

위대한 제국이 무너지고, 잊힌 고대신과 어둠으로 숨어든 악이 대륙에 돌아왔을 때.

기사는 영혼육백 모든걸 태워 서약했다.

‘문명의 불꽃을 지켜 낼 기사를 길러내겠다.’

재의 기사는 서약대로 긴 세월 동안 재의 숲에 온 수많은 도전자와 싸워 기사의 힘을 일깨워 줬다.

그것이 일개 기사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도전자를 쫓아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까지 왔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다시 보리라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봤다.

하늘의 별 이상으로 아름다운 지상의 별들.

찬란하게 빛나는 문명의 불꽃.

그리고 이 문명의 불꽃 속에서 살아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

마치 마도 제국이 되살아 난 듯한 모습이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나 차게 식은 재만 남겨진 마음.

이 차가운 재 속에서 발간 불꽃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재의 기사의 육중한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지고, 이글거리는 두 눈에 이성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재의 기사는 결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인도 위를.

* * *

“하필이면 오늘 바이어에게 연락이 와서는!”

장철은 탄식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12월 31일 금요일 아침.

원래라면 평범한 출근일이겠지만, 오늘은 사장님이 지정한 휴무일이었다.

사장님은 지난 7월에 공포의 대왕 강림으로 한번 헛다리를 짚으셨다.

하지만 이번만은 분명하다고 1999년 12월 31일. 새천 년이 되기 전 마지막 날인 오늘을 휴무일로 지정하셨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공포의 대왕이 강림하면 모든 게 끝장이니 가족과 함께 보내라는 배려였다.

뭔가 어이없는 배려였지만, 직장인에게 휴일이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게다가 1월 1일은 신정, 1월 2일은 일요일이다.

12월 31일 금요일을 쉬면서 3일간의 연휴가 생겼다.

장철은 여기에 1월 3일과 4일에 휴가를 사용해서 5일 동안의 연휴를 만들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여행 갈 첫 가족 여행 계획을 세웠다.

원래대로라면 이 차는 가족을 태우고 제주행 비행기가 출발할 김포 공항으로 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이어의 급한 연락이 오면서 일정이 어그러졌다.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라, 협력업체도 관련된 일이라 밤늦게야 해결될 일이었다.

장철은 가족들 먼저 제주도로 보내고 뒤따라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딸 아이가 꼭 아빠랑 비행기를 같이 타겠다고 떼를 쓰면서 일정이 밀려 버렸다.

다행히 1월 1일 내일 제주행 비행기 표를 구했다. 하루 늦게 출발하는 것만 빼면 첫 가족 여행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장철은 피식 웃으며 백미러에 걸린 사진을 봤다.

환하게 웃고 있는 네 사람.

자신과 아내.

딸아이와 동생.

힘들던 학창 시절과 달리 회사에 취직한 후에는 너무나 운이 좋았다.

가족 모두를 태울 수 있는 자동차.

딸아이와 동생에게 각자 방을 줄 수 있는 전세집.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첫 번째 제주행 가족 여행까지.

뭐에 꽂혔는지 딸이랑 동생이 펜싱 학원에 다니겠다는 건 어이없었지만.

그것도 잘하면 한 방에 해결될 것 같았다!

때마침 신호가 걸리자 장철은 지갑에서 주택 복권을 꺼내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늘의 운세에서 말한 ‘귀인’을 만나 ‘천운’을 받은 주택 복권!

평생 복권 같은 건 된 적이 없었지만, 어째선지 이 주택 복권은 꼭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신비로운 귀인!

바로 앞에서 대화하고 이름까지 들었는데도.

꿈속에서 만난 것처럼 귀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얼굴도 흐릿했다!

마치 옛이야기 속 산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러나 그 귀인이 꿈일 리는 없었다.

장철의 시선이 대시보드를 향했다.

그 신비로운 귀인이 준 묵직한 대검이 저 대시보드 안에 들어 있었으니까.

금도끼, 은도끼가 아닌 대검이라니!

피식 웃은 장철은 주택 복권을 잘 접어 지갑에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힘들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너무나 좋은 시절이 왔다.

안정된 직장.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작년에 든 이자율 13%짜리 적금.

회사에서 무이자 대출해 준 돈으로 구한 전세집과 회사에서 나온 자동차.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있었다.

휘이, 휘휘휘-

장철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생각했다.

오늘 밤 집에 돌아갈 때는 숨겨 둔 비상금으로 딸이랑 동생이 좋아하는 치킨, 아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떡볶이와 순대를 잔뜩 사 가는 거다.

장철이 운전하는 차가 새천 년맞이 축제 준비 중인 광화문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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