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427화>
휘이이이이-
커다란 재가루 덩어리가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고 있었다.
서울 상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관악산과 강남을 지나 경기도로 날아온 재가루 덩어리.
재가루 덩어리는 경기도 용인 광교 저수지로 떨어졌다.
파앙-
치솟는 물에 재가루가 씻겨 나가고, 그 안의 육중한 전신 갑옷을 입은 재의 기사는 저수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쿵-
저수지 바닥에 닿는 순간 투구 속에서 이글거리는 눈이 번쩍 생겨났다.
재의 기사는 몸을 쭉 펴고 육중한 걸음을 내디뎠다.
쿵, 쿵, 쿵-
느리나 결코 멈추지 않는 걸음이 이어지고 곧 저수지에서 빠져나와 도착한 산.
재의 기사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힘을 깎아내면서까지 쫓아온 ‘도전자’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전자의 위치만이 아니다.
대기에서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재의 기사는 깨달았다.
이 세계는 마력이 없는 세계다!
공기가 없는 진공에선 소리가 전해지지 않듯이, 마력장이 없는 이곳에선 도전자의 위치가 전해지지 않는다!
재의 기사는 생각지 못한 상황에 사방을 돌아봤다.
앞에는 산, 뒤에는 저수지.
곳곳에 얼어붙은 눈이 쌓여 있고 강풍이 불어온다.
도전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마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
대지에 스러진 백의 기억을 부를 수도 없다.
[…… ]
한참을 고심하던 재의 기사는 무장 벨트에 걸린 롱소드를 뽑아 바위 위에 세웠다.
그리고 손끝으로 롱소드를 때리는 순간.
핑그르르르-
롱소드는 팽이처럼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한참을 회전하던 롱소드가 회전력을 잃고 쓰러졌다.
북쪽!
방향이 정해진 순간 재의 기사는 롱소드를 무장 벨트에 걸고 주저하지 않고 걸었다.
북쪽으로!
쿵, 쿵, 쿵-
재의 기사는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계속 움직이면 천문석이 있는 북한산이 나왔다.
문제는 재의 기사가 떨어진 저수지가 수원시에 있는 광교 저수지라는 거였다.
수원 광교 저수지에서 서울 북한산에 가기 위해서는.
광교산, 청계산, 서초구, 한강, 중구, 성북구를 지나가야 했다.
이 세계에는 마력이 없기에 도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의 서약을 한 재의 기사는 결코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쿵, 쿵, 쿵-
육중한 발걸음에 얼어붙은 땅이 파이고.
쿠르릉, 쿠르릉-
전신 갑옷의 무게에 등산로에 깔린 나무 데크가 요동쳤다.
“으아앗- 깜짝이야!”
“저놈! 저거 뭘 뒤집어쓴 거야!?”
산을 오르던 동네 주민과 등산객들이 깜짝 놀라 외치고.
왕, 왕왕-
동네 강아지가 뒤를 졸졸 따라가며 신나게 짖었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 와 묵묵히 걷는 재의 기사를 따라 걸으며 외쳤다.
“저거 옛날에 스님들이 하던 탁발 아냐?”
“무식하기는! 탁발은 쌀 얻는 거고! 저건 딱 보니까 고행! 삼보일배(三步一拜) 같은 고행이네!”
“삼보일배? 야! 절을 안 하잖아! 절을!”
“갑옷 안 보이냐? 외국인 스님은 고행하는 게 좀 다른가 보지!”
“아유- 총각 뭘 그렇게 입고 걸어? 이거 좀 먹고 걸어?”
“겨울이어도 볕이 따뜻해서 땀 찰 텐데…….”
“내가 목에 수건 걸어 줄 네니까. 나중에 이걸로 땀 닦아.”
……
어느새 재의 기사의 투구 위에는 새마을 모자가 씌워지고 목에는 수건이 걸렸다.
그리고 강철 건틀릿에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걸렸다.
이 검은 비닐봉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넣어 준 물건들로 점점 부풀어 올랐다.
물병, 떡, 김밥, 사과, 오이, 휴지, 양말, 새우깡…….
[…… ]
쿵, 쿵, 쿵-
그러나 재의 기사는 절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렇게 재의 기사가 몇 시간을 걸어 광교산을 넘어 청계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천문석은 북한산 백운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 * *
헉, 허억, 헉-
끊어질 듯 거칠게 이어지는 호흡!
팽팽하게 당기는 등과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허벅지까지!
형제봉에서 백운대까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등산로를 미친 듯이 달리길 2시간여.
드디어 눈앞에 새하얀 바위 봉우리 셋이 나타났다!
만경대, 백운대, 만수봉.
목적지 백운대가 바로 앞이다!
천문석은 몇 번 호흡을 고르고 바로 움직였다.
백운대 정상까지 이어진 로프를 잡고 정상 오르자, 맑은 겨울 하늘 아래 북한산 전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도.
백운대 정상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넓은 바위에 흩어져 있었다.
천문석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평일인데도 많은 인파가 모였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서리 늑대의 사진이 찍히면 역사가 바뀐다!
그렇다고 이 많은 사람의 카메라를 모조리 뺏어서 던져 버릴 수도 없었다.
이때 뭔가를 기다리듯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세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뭐가 나오긴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좀 기다려 봐. 날아간 지 30분 정도 지났으니까. 곧 돌아올 거야.”
……
이 순간 천문석은 깨달았다.
백운대 위에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하늘로 향해 있다!
게다가 잎이 없어도 울창한 나무와 나뭇가지에 맺힌 상고대로 대지가 가려졌다.
당연히 땅을 달릴 서리 늑대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다!
기회다!
바로 서리 늑대를 찾아 시야가 닿지 않는 깊은 계곡으로 빠지는 거다!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끌어올리며 기감을 넓게 퍼트렸다.
그리고 서리 늑대를 부르기 위해 일기일원공이 실린 휘파람을 불려는 순간.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이잉-
이 바람에는 피리 소리 같은 울음이 실려 있었다.
히리…….
히리…….
“나타났다!”
누군가 외치는 동시에 백운대 정상에 자리한 수십 명의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오고 있다!”
순간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파아아아아앙-
그리고 바람을 뚫고 가까워지는 울음소리!
히리히리히리-
곧 새 모양으로 일렁이는 공기 형상이 나타났다.
절정의 은신법을 펼친 듯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계속 시야에서 사라지는 새 형상!
“초점이 안 맞아!”
“너무 빨라서 찍을 수가 없어!”
“저거 새는 맞는 거야? 자꾸 시야에서 사라지는데!?”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올 때.
천문석은 느꼈다.
이 새를 쫓아오는 거대한 존재감들!
지상!
휘이이잉-
휘몰아치는 얼음과 눈 폭풍이 멀리 북한산 북쪽에서 다가오고 있다!
거센 눈 폭풍에 그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익숙한 존재감만으로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서리 늑대!
서리 늑대 무리가 눈 폭풍을 휘감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문석은 바로 일기일원공이 실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
휘이이익-
절정의 일기일원공이 실린 휘파람이 퍼져 나가고 잠시 후.
멀리서 질주하던 눈 폭풍이 멈췄다.
됐다! 서리 늑대가 자신을 인식했다!
이제 내려가서 재빨리 서리 늑대랑 도망치면…….
이 순간 머릿속에서 마법 메시지가 들려왔다.
[드디어!]
휘이이익-
깜짝 놀라 휘파람을 멈추고 고개를 드는 순간.
일렁이는 새 형상이 거대한 빙하가 쪼개지듯 깨져 나갔다.
쩌어엉-
그리고 드러난 새의 모습!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 빠르게 움직이는 짧은 날개.
삼각형의 짧은 부리와 까만 눈.
그리고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몸까지.
“저거 뱁새 아냐!?”
누군가 소리친 순간.
뱁새가 엄청난 속도로 백운대로 날아왔다.
우와아아아-
“진짜 새였어!?”
“와아- 뭔 뱁새가 저렇게 빨라!”
환호성이 터지고 사람들이 다급히 카메라를 들어 올릴 때.
다시 한 번 다급한 마법 메시지가 들려왔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어디로 날아가!]
그리고 터져 나오는 마력광!
파스스슥, 펑, 펑, 펑-
사람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사람들이 카메라를 던져 버릴 때,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 뱁새 뭐 이리 커!?”
히리히리히리-
파아아아아앙-
원근감을 무시하는 듯한 크기!
초대형 뱁새가 엄청난 속도로 백운대를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악-
“도망쳐!”
“괴물 새다!”
다급한 비명이 터지고 사람들이 도망치는 순간 천문석은 오히려 앞으로 달렸다.
이대로 무작정 도망치다가 뒤엉키면 몇 명이나 추락할지 모른다!
하앗-
기합을 터트리며 나아가.
쿵-
진각을 밟아 끌어올린 지기를 내력이 담긴 강철봉으로 내려친다!
콰아앙-
쿠으으으응-
지기와 내력이 충돌해 거대한 바위가 요동치는 순간.
무작정 도망치던 사람들이 픽, 픽- 제자리에 쓰러졌다!
천문석은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지나 돌진했다.
쿵, 쿵, 쿵-
매 걸음 진각을 밟아, 지기와 내력을 충돌시켜 폭발적인 힘을 끌어올렸다.
어느새 초대형 뱁새는 천문석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천문석은 지기와 내력이 담긴 강철봉의 무게를 올렸다.
엄청난 힘이 담긴 채 천천히 떨어지는 강철봉.
강철봉에서 시작된 진동이 거대한 종처럼 대기를 떨어 울렸다!
구으으으으응-
충돌 직전!
탓-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던 초대형 뱁새가 수직으로 뚝 떨어져 백운대 바위 위에 멈춰 섰다.
그리고 휙 짧은 날개를 들어 경례하듯 머리에 올렸다.
강철봉을 들고 돌진하는 천문석을 향해서!
* * *
“…….”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바위 위에 앉더니 경례하는 초대형 뱁새.
이 초대형 뱁새를 향해 날아가는 엄청난 힘이 실린 강철봉!
구으으으응-
천문석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초대형 뱁새에게선 살기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재빨리 떨어지는 강철봉의 방향을 바꿨다!
강철봉이 백운대 바위를 때리는 순간.
구으으으응-
이 거대한 바위가 종처럼 진동하고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나뒹굴었다.
이때 초대형 뱁새는 총총총- 가볍게 뛰어 진동을 피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까만 눈으로 천문석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초대형 뱁새.
-……
“뭐지 이 녀석?”
천문석이 칼로리 바를 꺼내서 건네주려 할 때 마법 메시지가 들려왔다.
[멍청한 새 대가리 녀석! 그 휘파람 너 부른 거 아냐!]
“……!”
마법 메시지를 듣는 순간 감이 왔다!
자신이 서리 늑대를 부른 휘파람.
절정의 내력이 실린 휘파람에 이 초대형 뱁새가 반응했다!
천문석은 재빨리 일기일원공을 실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 휘이이익-
휘파람이 들려오는 즉시 짧은 날개로 척- 다시 한 번 경례하는 초대형 뱁새!
이 모습을 본 순간 만경대에 숨어 있던 남자는 깨달았다.
‘아차- 통신을 들었구나!’
마법이 없는 세계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 방심했다!
마법 메시지가 ‘천운의 헌터’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
남자는 재빨리 마법 메시지를 암호화하고 파트너를 확인했다.
군기가 든 모습으로 경례 중인 초대형 뱁새!
“와, 저 멍청한 녀석!”
이 모습만 봐도 파트너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갔다.
내력이 실린 휘파람이 들려오자. 뱁새 이 녀석 제국 군에서 복무 중이던 기억을 떠올렸다!
제국 기사가 중상을 입고 죽어 갈 때, 내력이 실린 휘파람으로 부르는 노래.
진혼진군가(鎭魂進軍歌).
초대형 뱁새는 자신과 파트너가 되기 전, 마도 제국의 강습 수송병이었다.
구출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장 위험한 전장 한가운데서 진혼진군가를 부르며 죽어 가는 제국 기사를 구하는 수송병!
이 멍청한 녀석이 내력이 실린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자, 천운의 헌터가 죽어 가는 제국 기사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천운의 헌터를 낚아채 존재하지도 않는 전능 옥좌까지 날아가게 생겼다!
남자는 파트너에게 마법 메시지를 보냈다.
[야, 잘 들어 봐!]
[곡조가 다르잖아!]
[그 휘파람 진혼진군가 아냐!]
그리고 재빨리 기억 속 진혼진군가를 마법 메시지로 전달했다.
[우리는 진군한다-]
[죽어 버린 전우여-]
……
-……!
진혼진군가가 들려온 순간.
초대형 뱁새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 경직됐다.
이때 천문석과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휘이이- 이거 먹히는 거야 안 먹히는 거야?”
[야! 빨리 계획대로 안 하고 뭐 해!]
초대형 뱁새는 슬그머니 짧은 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글 몸을 돌려 총총총- 바위 위를 달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휘이이이잉-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뱁새.
“뭐야!? 쟤 갑자기 왜 그냥 날아가!?”
천문석이 황당해하는 순간.
만경대에 숨어 있는 남자는 경악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쪽팔린다고 화풀이……!]
파아아아앙-
하늘 높이 올라간 초대형 뱁새는 엄청난 속도로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눈 폭풍을 휘감고 멈춰 선 서리 늑대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