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95화>
강을 내려가는 운송선 위.
천문석은 선장에게 물었다.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선장은 피식 웃었다.
"6층 제련 도시 도착하면 광석 포대 내리는 거나 도와줘. 지금은 편히 쉬라고. 아!"
선장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갑판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가리켰다.
"저 아이스박스에 얼음에 재워둔 맥주랑 음료수 있으니까 마셔. 돈은 적당히 그 옆에 깡통에 넣어두고."
"감사합니다."
천문석은 자잘한 마석 몇 개를 깡통에 넣고, 맥주 두 캔을 꺼내 광석 포대가 쌓인 선수 갑판으로 움직였다.
최설은 지게 위에 차양을 펼치고 그 아래 늘어진 상태.
"최설! 맥주 받아라."
천문석은 최설을 향해 음료수를 던졌다.
탁-
캔 맥주를 받은 최설은 캔을 따셔 단숨에 마시고 탄성을 질렀다.
"하아- 시원하다."
"편하냐?"
천문석이 묻는 순간 바짝 긴장하는 최설.
"너 또 뭘 시키려고?!"
바짝 긴장한 최설을 보니 내심 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 긴장하냐?"
피식 웃은 천문석은 배낭 두 개만 실려 확 낮아진 지게를 툭 쳤다.
"부산물도 다 처리했고, 배도 탔잖아? 이제 목적지까지 편하게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물론 7층 공방 도시에선 짐을 산처럼 실을 테지만 말야. 흐흐흐-'
뒷말을 삼킨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하늘에는 뜨거운 여름 태양이 떠 있고,
광석 포대가 쌓인 갑판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지금 운송선은 한강 2배 크기의 거대한 강 위를 나아가고 있었다.
광산 도시에서 광석 운송선을 타고 출발한 지 벌써 4시간!
강 위에는 몇몇 운송선들이 지나가고.
강 좌우에는 이따금 나타나는 작은 수변구역과 몇몇 마을을 제외하면 높은 절벽과 가파른 비탈이 이어지고 있었다.
배 왼쪽, 북쪽 절벽 너머에는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대한 산맥이 있고.
배 오른쪽, 남쪽 가파른 비탈 너머로 푸른 초지와 숲, 늪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5층은 북서쪽으로 갈수록 높아지고, 남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졌다.
당연히 강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고,
이제 곧 4층과 연결된 출입구 근처의 거점 도시, 물류 도시에 도착한다.
어제 하루종일 걷고 뛰어서 이동한 거리를,
배를 타니 5시간도 안 걸려 이동한 것이다!
추이린이 한 의뢰여서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이번 배송 의뢰는 너무나 편했고 앞으로도 편할 거라는 감이 왔다!
천문석은 강 지도를 펼쳐 운송선이 지나갈 경로를 살폈다.
중앙 산맥을 지나 서쪽으로 나아가는 강.
지금 탄 운송선은 세 번 정박할 예정이었다.
5층 물류 도시.
6층 제련 도시.
7층 공방 도시, 목적지.
5층 물류 도시에선 던전 밖에서 들어온 물품을 선적하고.
6층 제련 도시에선 광석 포대를 내리고 강화 강철과 부산물을 싣는다.
그리고 7층 공방 도시로 이동한다.
오늘 제련 도시에 도착하고,
내일 공방 도시에 도착하는 일정.
던전을 흐르는 이 강에는 마수와 몬스터도 없었고, 6층에서 7층으로 내려가는 급류 구간을 제외하면 위험한 곳도 없었다.
처음 던전 밖 형제 헌터 용품에서 광산 도시에 있는 형제 헌터 주점을 소개받은 게 큰 행운이었다.
광산 도시의 형제 주점 사장님께 운송선을 소개받아 이렇게 쉽게 이동하고 있었다.
역시 헌터 업계는 인맥이었다!
"캬- 이렇게 재수가 좋다니!"
천문석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탄성을 터트리고 최설에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 배를 탄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렇지 않냐? 엄청 편하고 빠르잖아?!"
피식 웃은 최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 어제보다 진짜 편하···. 어?! 잠깐만!!"
고개를 끄덕이던 최설이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야 이 씹! 야! 어제 물류 도시에서 그냥 배 타면 됐잖아!!"
"뭔 소리야? 너 그때 부두에서 같이 봤잖아 배에 공간 없어서 안면 있는 헌터 아니면 돈 내도 안 태운다는 거···."
"하류가 아니라 상류! 걸어서 간 광산 도시 말야! 상류로 올라오는 배를 타고 광산 도시까지 올라오면 됐잖아!"
최설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를 가리키며 외쳤다.
"....!"
아뿔싸!
생각지도 못했다!
최설이 가리키는 운송선에는 짐이 반 정도밖에 실려 있지 않았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느라 연료비가 든다고 해도 하급 정제 마석을 이용하는 선박용 마력 엔진이라 뱃삯도 별로 들지 않았을 거다.
상류로 올라가는 배를 타고 올라와서,
화물을 싣고 하류로 내려가면 되는 거였다!
이걸 놓쳤다니!
"와! 와!! 와!!! 시바! 개 시바! 이런 병신같은 삽질을 하다니···."
으아악!
쿵, 쿵, 쿵-
최설은 어느새 익숙해진 한국어 욕을 쏟아내며 분통을 터트렸다.
천문석은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위신을 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대응 논리를 세우고 입을 열었다.
"야, 당연히 그거 알고 있었지."
"뭐? 야, 이! 알고도 그 개고생을 시켰다는 거야!? 지게를 짊어지고 늪지를 달리고! 100마리가 넘는 늪지 고블린이랑 개같이 싸웠어! 진짜 뒤지는 줄 알았잖아! 그리고···."
최설이 분노를 쏟아낼 때.
천문석은 전생의 기억 속 전진파 도사처럼 말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박수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법!
천문석이 말없이 인자한 미소만 짓고 있자,
분노가 담긴 최설의 외침은 점차 가라앉았고.
"그래서···.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최설이 묻는 순간!
탁-
천문석은 한 호흡에 강화 해머를 뽑아 들고 최설에게 달라붙었다.
파앙-
묵직한 강화 해머가 공간을 가르는 동시에.
피잉-
강철 현이 끊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섬전 같은 검격이 쏘아졌다!
쿵-
천문석은 단숨에 진각을 밟아 검격을 피하고 훅 치고 들어가며 강화 해머에 무게를 실었다.
후웅-
거력이 실린 강화 해머가 태산처럼 누르는 순간.
부드럽게 눕힌 검면으로 강화 해머를 미끄러트리는 최설!
차르르릉-
쏟아지는 불꽃을 따라 강화 해머에 실린 무게가 흩어지는 타이밍!
빙글빙글-
최설은 검을 회전시켜 강화 해머를 떨어뜨리고 오히려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하앗-
배운 그대로 한 호흡 들이키는 순간 폭풍 같은 검격이 쏟아졌다!
깡, 깡, 콰아앙-
매 충돌의 순간 터져 나오는 불꽃과 굉음!
유검과 쾌검 그리고 중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다가도 섬전같이 찔러 들어오고 다시 태산같이 짓누른다!
최설의 가볍고, 빠른 쾌검 일변도였던 검에는 어느새 부드러움과 무게가 담겼고,
몸의 움직임에는 거친 기세와 터프함이 실렸다.
천문석과 최설은 순식간에 30합을 지나 40합에 이르도록 겨뤘다.
그리고 50합에 이른 순간.
팟-
천문석은 훌쩍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며 내력을 실어 외쳤다.
"최설 알겠냐!"
뜬금없는 질문에 바로 따라붙으려던 최설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뭐···?!"
천문석은 전생의 기억 속 겉모습은 최강이었던 전진파 도사처럼 위엄을 담아 외쳤다.
"30합도 버티지 못했던 네가! 지금 나와 50합이 넘게 겨뤘다!"
"....!"
최설은 깜짝 놀라 자신이 든 검을 봤다.
방금 대결이 생생히 기억난다!
처음 던전에 들어왔던 4일 전,
순식간에 패배했던 자신이 50합이 넘게 승부를 펼쳤다!
검력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성장했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때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늪지 고블린과의 격전!
"설마···. 어제! 너 일부러 나한테 실전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그래서 배를 타지 않고 늪지를 가로지른 거야!?"
탁-
천문석은 강화 해머를 벨트에 걸고 성큼성큼 다가와 최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내 뜻을 알았구나! 최설!"
"...."
최설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원망을 했다니!
최설은 무공 각성 이전에도 검공을 수련했었다.
그렇기에 작은 무학의 가르침조차 얼마나 귀하고 배우기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문석은 4일 만에 검력이 이렇게 불어나는 가르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풀었다!
게다가 어느새 자신이 평대 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이토록 대인대덕한 마음이라니!
"부사장님···."
최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천문석은 쐐기를 박았다.
"최설. 검!"
천문석은 검을 건네받는 순간.
한 호흡에 일곱 걸음 걸어 36검을 펼쳤다!
천문석이 펼치는 36검이 갑판 위에 하늘의 성좌를 그렸다.
최설은 다시금 경악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검공이 있단 말인가!?
보고 있어도 알 수 없는 너무나 아득한 무리!
상상조차 하지 못한 무의 경지에 최설이 전율하는 순간.
“최설 보아라!”
천문석은 다시금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나의 호흡에 일곱 걸음 나아가 서른여섯 검격을 뿌린다.“
"하나의 호흡은 극(極)에 이르고."
"일곱 걸음은 북두(北斗)에 닿으니."
"서른여섯 검격은 천강성(天罡星)을 그린다!"
"그렇기에 북두 36천강검!"
하앗-
파아아앙-
천문석의 검격이 다시금 펼쳐지고 성좌가 그려지는 순간.
최설은 마침내 깨달았다.
천문석은 자신에게 이걸 가르치고 있었다!
이 엄청난 검공,
북두 36천강검을!
끓어오르는 격동에 최설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깊게 고개 숙였다.
"스승님!!"
이 순간 천문석은 최설의 어깨를 짚었다.
"아니다."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들려오는 위엄 가득한 목소리.
"최설. 사제(師弟)의 연을 맺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같은 회사의 사우(社友)! 북두 36천강검을 배우고 강해져라! 그것이 진정 내가 바라는 바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일심으로 받들겠습니다!"
"그래! 강인한 허리와 허벅지에서 터프함이 나오는 법! 우선 마종권의 마보를 서라!"
"네! 부사장님!"
최설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모두 담아 외치고,
갑판 위에서 마종권의 시작이자 끝 마보를 섰다.
그리고 천문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떻게 이번에도 얼렁뚱땅 잘 넘어갔네···.'
천문석은 힐끗 최설을 봤다.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열기!
자신이 직접 검공을 보여준 게 주요했다!
지렁이 창술, 구인창.
눈뽕 터트리기, 굉천수,
둘과는 달리 이번에는 이름부터 그럴듯한 검공.
북두 36천강검(北斗三十六天罡劍)!
사실 이건 전생에 한밤중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만들었다.
어두운 밤 고구마의 36면 전체에 골고루 불을 입혀 최고의 군고구마를 만들던 기술.
이 검술의 원래 이름은 사실 따로 있었다.
물 한 모금 없이 고구마만 먹여 목이 컥, 컥- 막히는 것처럼 상대를 압도하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
고구마 검술.
문득 전생 천마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고구마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보던 녀석들!
천문석은 현생의 대학에서 마케팅을 배우며 브랜드 네이밍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내복' 은 한겨울 강추위에도 왠지 입기가 꺼려지지만,
'히트텍' 은 찬바람 부는 가을만 돼도 편하게 입게 된다.
검술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마 검술'은 배우는 수련생들의 의욕이 바닥이었는데,
'북두 36천강검'으로 이름을 바꾸니까 수련생의 의욕이 하늘을 뚫으려 한다!
자발적으로 마종권의 마보를 서다니!
천문석은 은근슬쩍 지게에 쳐둔 차양 아래에 앉아 최설에게 외쳤다.
"기감은 결국 구현. 상상해라."
"발로는 지기(地氣)가 올라오고."
"머리에선 천기(天氣)가 내려온다."
"천기와 지기가 사람의 단전에서 만나니 이것이 진기(眞氣)."
"한 호흡의 진기에 천지를 담아, 정중동의 이치를 구현한다. 그것이야말로 마종권 마보의 정수."
....
부산 던전 5층의 광석 운송선 갑판 위 갑자기 무공 전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운송선 선장이 보고 있었다.
"요즘 헌터들은 다 저런가? 갑자기 치고받더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저거 벌서는 건가? 얘들 참 희한하네······."
게이트 전쟁 때부터 광석을 나른 생활 헌터 운송선 선장이 고개를 갸웃하고.
마종권의 마보를 서는 최설이 귀에 들려오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가슴에 새길 때.
마종권의 무리를 적당히 읊어주던 천문석은 어느새 광석 포대를 베고 누워 깜빡깜빡 졸기 시작했다.
마수와 몬스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며, 강은 잔잔하다.
늪지 고블린을 달고 늪지를 달렸던 긴박했던 어제와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한때.
그냥 이렇게 누워있어도 운송선은 거대한 강을 지나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천문석은 나른한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운이 좋을 것 같더라니! 카캬카-"
그리고 천문석의 말대로 진행됐다.
5층 물류 도시에 도착해 던전 밖에서 들어온 물건들을 선적할 때.
6층 제련 도시에 광석 포대를 하역하고 강화 강철과 마석, 부산품을 선적할 때.
그리고 제련 도시의 여관에서 하룻밤 잘 때까지도.
사건은커녕 작은 문제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천문석이 세운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운송선이 문제없이 배송 목적지 7층 공방 도시로 출발하는 순간.
천문석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최설 봤지? 지금 완벽히 내 계획대로 되고 있다! 내일 공방 도시에 도착하면 이번 배송 의뢰도 끝이다! 하하하-
이날도 갑판에서 마종권의 마보를 서던 최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외쳤다.
"탁월한 계획이었습니다! 부사장님!"
천문석과 최설 두 사람을 태운 운송선이 7층 공방 도시, 배송 의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