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90화>
무성한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미약한 빛.
암녹색 이끼가 가득 올라온 나무.
습기가 가득한 공기와 무른 땅.
늪지 숲!
최설은 늪지 숲을 달리고 있었다.
두껍게 쌓여 썩어가는 낙엽.
함정처럼 널린 뿌리와 덩굴.
푹푹 발이 빠져드는 늪.
사방에 깔린 장애물을 피해서!
지게를 짊어진 채로!
2시간 동안!
“시바- 너! 헉-!”
“너, 이 새! 허억-!"
최설은 미칠 것만 같았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호흡이 가빠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때 옆에서 들려오는 호통 소리.
"야, 호흡! 자세! 유지 제대로 안 하지! 한 호흡에 생사가 갈리는 거야!"
그리고 팔, 어깨, 다리, 옆구리를 찌르는 나뭇가지!
콕, 콕콕, 콕콕콕-
맞은 부위가 전기가 흐르듯 파르르- 떨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가쁜 호흡이 뚫리고 시야가 확 트였다!
놀라운 기술!
그러나 지난 4일 동안 수도 없이 겪어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최설은 죽일 듯 나뭇가지를 휘두른 사람을 노려봤다.
휘이, 휘휘휘-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고,
얍얍, 얍얍얍-
더 장난스럽게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달리는 사람.
천문석!
천문석은 2시간 동안 자신과 같이 달리면서도 조금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최설의 사나운 눈이 천문석의 등으로 향했다.
텅 빈 등!
천문석은 맨몸으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씹!"
최설이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천문석은 충격받은 얼굴로 대답했다.
"뭐야!? 처음에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넵! 부사장님!' 하던 착한 최설 사원은 어디로 간 거야?!"
"하, 시바···."
머리에 열이 끓어오르는 순간.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올 때 천문석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몸으로 때울 거야.'
이 말은 거짓이었다!
몸으로 때우기는 했다.
'우리'가 아니라 '나' 혼자서!
"으아악!"
울분에 찬 고함이 터지는 순간 어깨를 찢어버릴 듯한 무게감이 새삼 느껴지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
접이식 수통에 가득 담긴 물!
야영할 때 사용할 장작 무더기!
짐이 가득 찬 헌터용 대형 배낭 2개!
그동안 사냥한 마수와 몬스터 부산물까지!
....
이 모든 게 자신의 등에 올려져 있었다!
저주받을 '조립식 지게'에 실려서!
빠드득-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가는 순간 천문석이 번개같이 외쳤다.
"정지!"
“전투 준비!”
“이곳에서 늪지 고블린 잡고 간다!"
지난 4일 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전투 준비' 명령.
최설은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전투 준비!"
쿠웅-
복명과 동시에 땅을 짓밟는 발에 실리는 엄청난 무게!
최설은 땅을 밟은 발을 축으로 빙글 180도 몸을 회전하며 검을 뻗었다.
파르르-
섬전 같이 뽑은 검에 전신에 걸린 무게를 실어 일점으로 찌른다!
콰아앙-
폭발하듯 박살 나는 나무 방패!
끼에에엑-
나무 방패 뒤에 숨어있던 형형색색 염료를 칠한 늪지 고블린이 검에 꿰뚫리는 순간.
하앗-
최설은 배운 그대로 한 호흡을 삼키고 늪지 고블린 무리를 향해 폭풍처럼 돌진했다.
쿵, 쿵, 쿠웅-
엄청난 무게가 실린 발걸음에 무른 땅이 푹푹 꺼지는 매 순간.
팡, 팡, 파아앙-
폭발적인 힘이 실린 거친 검격이 쏟아진다!
핑, 피잉-
늪지 고블린의 단검을 든 팔과 목을 날려 버리고.
끼에엑-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을 낚아채 집어 던진다!
쾅, 콰드득-
충돌 순간 단숨에 돌진해 뒤엉킨 고블린을 짓밟고.
후드드득-
쏟아지는 독침을 높게 짐이 쌓인 지게로 막아내는 순간.
하앗-
지게를 벗는 동시에 다시 한 호흡을 삼키고 돌진!
무인지경으로 늪지 고블린 무리를 박살 낸다!
핑, 피잉, 피잉-
최설이 만들어낸 강철의 폭풍이 수십 마리의 늪지 고블린을 으스러트렸다.
가볍고 빠르기만 하던 검 최설의 쾌검술에서 폭풍 같은 기세, 섬뜩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이 모습을 어느새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간 천문석이 보고 있었다.
"이제야 좀 무인답게 싸우네."
천문석은 흐뭇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최설이 싸우는 전장은 늪지 숲속에 자리한 공터.
공터 주위를 둘러싼 나무와 수풀에서 형형색색의 염료를 칠한 늪지 고블린 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고 있었다.
늪지 고블린을 뒤에 달고 늪지 숲을 달린 지 2시간.
뒤를 쫓던 100여 마리의 늪지 고블린은 숲을 달리는 동안 산산이 흩어졌다.
결국, 형형색색 염료를 칠한 늪지 고블린 들은 철저히 포위 사냥하던 평소와 달리,
하나둘 숲에서 튀어나와 맹목적으로 달려들어 순식간에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늪지 고블린 전사만이 아니다.
독침과 독화살을 사용하는 사냥꾼까지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최설은 어렵지 않게 늪지 고블린을 상대할 수 있었다.
늪지 고블린 무리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최설이 짊어지고 있는 지게 꼭대기에 꽂혀있는 뼈 인형.
사냥 중이던 늪지 고블린 부족장에게서 자신이 슬쩍한 '토템' 때문이었다!
늪지 고블린들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부족의 토템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최설의 실전 훈련!
늪지 고블린 사냥!
자신의 일석이조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쾌검에 집착해 일격필살의 기세가 부족했던 최설의 검에 불과 4일 만에 제대로 된 기세가 실린 것이다!
”역시 난 잘 가르친단 말야.“
스스로에게 흐뭇해하던 천문석은 휙 손을 뿌렸다.
파아앙-
순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돌멩이!
퍽-
핏줄기가 수풀 위로 치솟고 수풀 속에서 느껴지든 껄끄러움이 사라졌다.
주술을 사용하던 늪지 고블린 주술사가 쓰러진 것!
천문석은 넓게 기감을 퍼트려 다른 주술사가 접근하는지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지게를 벗고 폭풍처럼 적을 몰아치는 최설을 다시 살폈다.
최설은 제대로 된 쾌검을 사용하는 무공 각성자였다.
그러나 쾌속(快速), 가볍고 빠른 검에 너무 치우쳤다.
무공은 치우치는 순간 약점이 생겨나고,
이건 쾌속의 검으로 경지에 달한 최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속도를 누르는 무게(重).
속도를 압도하는 머릿수(多).
속도를 제압하는 허허실실(幻).
....
치우친 쾌속의 검을 제압할 방법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최설이 자신의 둔보(鈍步)에 단숨에 제압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치우침을 알았으니 이제 보완해야 할 때.
그래서 천문석은 최설에게 말했었다.
“너 검에 허점이 너무 많은데?”
“....부사장님. 제가 배운 검, 백 년이 넘게 내려온 무공입니다. 비록 제가 부족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무공이 아닙니다.”
최설의 어투는 공손했으나, 굳은 얼굴에는 자신이 배운 무공에 대한 높은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무인이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천문석은 슬쩍 도발했다.
“그럼 한번 붙어 볼까?”
천문석과 최설은 겨뤘고,
당연히 천문석이 압도적으로 이겼다.
무거운 강화 해머.
가벼운 나뭇가지.
장난하듯 던지는 돌멩이.
맨손으로 펼치는 권장지법까지.
천문석이 무엇으로 상대해도 최설은 20합을 채 버티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동대문에서 겨뤘을 때보다 더 큰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당연했다.
천문석은 신동대문 사태 이후에도 쉴 새 없이 구르며 무업을 쌓았고.
현생의 무업과 절정의 경지가 만나 전생에 쌓은 무공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으니까.
걷고 앉고 눕고 잠자는 매 순간 천문석은 강해지고 있었다.
이런 천문석에게 수없이 패배한 최설은 깨달았다.
쾌속의 검에 치우쳐 오히려 허점이 생겼다는 천문석의 말이 맞다는 것을.
그러나 최설도 경지에 달한 검사이자, 무공 각성자.
치우침을 아는 것과 부족함을 채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도 알았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내공과 외공 모두 조화를 이룬 진정한 ‘검의 고수’에게 배워야 했다.
각성해서 검공을 쓰는 무공 각성자는 많지만 진정한 ‘검의 고수’는 남중국 전체를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족함을 알았으나 이 부족함을 채울 방법이 없었다.
최설은 좌절했고,
천문석은 이런 최설을 보며 웃었다.
최설의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고금 제일의 마공 천마신공으로 극에 달했고.
마공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정사마, 유불선의 온갖 무공을 익혔던 사람.
그리고 마침내 일기일원공이라는 새로운 무공까지 창안한 무학의 일대종사!
나!
게다가 속성으로 가르치는 건 어려서부터 천문석의 특기였다!
무공에 입문하기 전에도 속성 교육으로 사당에서 같이 살던 동생 전원을 마종문 입문 시험에 합격시킨 게 자신이었다!
천문석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최설! 내가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다!”
“네? 부사장님이요? 저 검사인데···.”
천문석은 아직도 긴가민가한 최설에게 바로 보여줬다.
최설의 검을 빌려 펼치는 검술로!
길고 짧고,
가볍고 무겁게.
강, 유, 쾌, 중, 둔!
(剛, 柔, 快, 重. 鈍)
상상도 하지 못한 무공의 경지에 최설이 경악한 순간.
천문석은 무학의 일대종사처럼 선언했다.
"최설! 내 지도만 따라오면! 부산 던전에서 나갈 때까지 최소 2배는 강해진다!"
"대가는 어떻게···."
"부사장, 평사원으로 직위는 다르지만, 우리는 김철수 사무실의 동료! 대가는 필요 없다! 단지 이 각서에 사인만 하면 된다!"
[사회통념에 반하지 않는 한 '을'은 '갑'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다.]
[갑 : 천문석 / 을 : ]
너무나 간단한 각서,
대가도 없이 가르침을 베풀겠다는 말이었다!
감동한 최설은 즉시 각서의 빈칸에 이름을 적고 사인하고 고개를 숙이며 가르침을 청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부사장님! 일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최설의 수련이 시작됐다.
-‘조립식 지게’에 짐을 산처럼 쌓아 짊어지고.
-‘호흡법’을 호흡곤란이 올 정도로 반복하고.
-‘마종권’을 허리가 끊어지고 다리가 터지기 직전까지 수련했다.
그리고 3, 4, 5층 수많은 마수와 몬스터와 ‘홀로’ 싸웠다.
이렇게 4일이 지난 지금.
최설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하, 역시 난 잘 가르친단 말야!”
천문석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수풀 속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휘익, 퍼억-
휘이익, 퍽-
---
헉, 허억, 헉-
미친 듯 뛰는 심장,
가쁜 숨에 터질 듯 요동치는 가슴!
최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100마리에 가까운 늪지 고블린을 잡았다!
중급 마수도 사냥하는 늪지 고블린을 100마리나 잡는 동안, 천문석은 구경만 한 것이다!
“....!”
당장이라도 분통을 터트리고 싶지만, 소리칠 힘도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 가득 떠오르는 건 눕고 싶다는 생각뿐.
하지만 눕는 순간 다시 일어나 저 거대한 지게를 다시 짊어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천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전장에서 퍼지면 그냥 뒤지는 거야! 최설! 즉시 전장 정리 시작한다!"
"...."
최설은 번쩍 고개를 들어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온 천문석을 노려봤다.
깨끗한 헬멧, 깨끗한 옷, 깨끗한 장갑과 안전화까지.
천문석은 4일 전 처음 소금 평원을 걸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당연했다!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니까!!
그에 반해 자신은 거지······.
최설이 몸을 살피려 할 때 들려오는 목소리.
"너 아무래도 딴 생각하는 거 보니까 힘이 남아도나 보네? 오늘 밤은 마종권을 두 배로 수련······."
마종권!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경련하는 다리와 허리.
처음 마종권을 수련하다가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와, 와! 너! 진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말문마저 막히는 순간.
휙-
천문석은 너무나 낯익은 종이 한 장을 꺼내서 팔락, 팔락- 흔들었다.
[사회통념에 반하지 않는 한 '을'은 '갑'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다.]
[갑 : 천문석 / 을 : 최설]
“이거 안 보여?”
자신이 직접 이름을 적고 사인한 각서였다.
“....”